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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 채식주의자의 도덕적 우월감이 불편하다고?

  • 입력 2016.11.11 15:16
  • 기자명 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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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지난 11월 8일, '채식주의자의 도덕적 우월감이 불편한 이유'를 게재한 뒤 독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이 잇따랐습니다. 글쓴이 동의 없이 기사 전면에 고기 사진을 내거는 등 여러모로 채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기사였습니다. 아울러 위 기사의 사실관계가 잘못됐다는 지적이 있어 그에 대한 반론기사를 함께 싣습니다. 해당 기사로 상처입으신 모든 분께 사과 드립니다.

내가 반론 기사를 쓰는 이유

직썰에서 올린 글(바로가기: 채식주의자의 도덕적 우월감이 불편한 이유)을 읽고 감정적으로 힘들었다. 나는 평소 온라인에 오르내리는 글들에 대해 어떤 반응을 쓰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다른 곳도 아니고 직썰에서, 이런 식의 글이 올라온 것에 대해 일종의 배신감을 느껴 글을 쓴다.

우선 나는 위 기사의 필자(이하 '필자'로 서술된 대상은 위 '채식주의자의 도덕적 우월감이 불편한 이유'의 필자를 지칭함)에게 '공격적'으로 말했다는 비건이 누구인지 모른다. 정황 역시 짧게 설명돼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도 잘 모른다는 점을 밝혀 둔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오프라인도 아닌 온라인에서 “너는 어떻게 그러고 사니”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혹은 그러한 방식의 접근법과 마주했을 때 반감을 느낀다. 아마 위 기사의 필자도 이 지점에서 반감을 느꼈을 것이다.

내가 이러한 접근 방식을 거부하는 이유는, 이 말을 듣는 사람에게 반감만 심어줄 뿐 채식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전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 비건이라는 분이 그런 글을 읽고 순간적으로 느꼈을 괴리감이나 박탈감은 십분 이해하지만, 나는 인스턴트식으로 이뤄지는 온라인 공간에서 제대로 된 정치적 대화가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에는 회의적이다. (물론 그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이 필자의 글에 이렇게 길게 답변을 하는 이유는, 필자는 이 불편함에 대해서만 글을 쓴 것이 아니라 비거니즘(veganism, 동물성 제품을 섭취하거나 이를 사용하지 않는 식습관)과 채식 자체에 대해 불충분한 지식과 논리로 이를 비판하는 글을 작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름 오랫동안 채식을 하고 공부를 한 사람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오해를 풀어보려고 한다.

채식인들은 도덕적 우월감을 원하지 않는다

필자는 먼저 ‘동물을 먹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 도덕적 우월감을 바탕으로 남을 가르치려 한다고 주장하지만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직썰을 읽는 독자 중에 ‘여성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남에게 그런 생각을 '강요'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권력자가 비권력자를 착취하고, 살인하고, 강간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게 언제부터(적어도 소위 진보라고 일컬어지는 이 집단에서) '강요'가 되었나? 또한, 페미니스트나 인종주의 반대자가 도덕적으로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그 신념을 믿고 생활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페미니스트와 인종주의 반대자인 우리가(물론 타자화 되어있지만) 여성혐오를 저지르는 사람과 인종차별주의자보다 도덕적으로 옳다고 믿는 것은 사실이다.

‘우월’이라는 단어 자체가 권력관계를 재생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가 '우월'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도 비채식인과 채식인이 도덕적으로 동등하지 않다고 스스로 자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채식인들은 도덕적 우월감을 원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동물 소비를 줄이길 바랄 뿐이다. 만약 필자가 동물 소비가 줄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서 도덕적 열등감을 느꼈다면 그건 자신이 왜 이러한 열등감을 느끼는지에 대해서 고민해 봐야 할 문제다.

'식물도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고기를 먹어도 된다'는 논리는 틀렸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생명을 좌지우지 하냐’는 비건의 말에 필자는 ‘식물보다 동물이 우선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반문했다. 채식인은 식물의 생명보다 동물의 생명이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채식주의자들이 비인간 동물을 먹지 않는 이유는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고통과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과학적으로 접근하자면 비인간 동물도 뇌와 신경계 등으로 구성된 개체다. 과학적 지식이 없더라도 동물과 잠깐이라도 교감해 본 사람이라면 비인간 동물들도 생각을 하고, 뇌를 사용하고, 감정을 느끼고,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채식주의는 동물이 식물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는 운동이 아니다. 동물을 물건 다루듯 이용하는 인간들의 무자비한 행태에 반대하고 이 일련의 과정에서 생산된 음식,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운동이다. 또한, 채식의 요지는 식물이 아니다. 사람들이 '채식'을 듣고 자연스럽게 식물을 떠올리는 이유는 세상은 동물과 식물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오는 것이다. 고통을 느끼는 비인간 동물을 섭취하지 않겠다는 주장에 식물을 끌어다 쓰는 것은 논리적으로 전혀 관계가 없는 두 가지를 연관시키는 일이다.

동물과 식물을 구분하는 핵심은 '고통을 느낀다는 기준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일 것이다. 이에 대한 논의는 매우 중요하다. 실제로 비건 커뮤니티 내에서도, 굴과 같은 동물의 소비에 대한 입장이 나뉜다. ‘굴은 뇌도 신경계도 없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지 못하므로 먹어도 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생선들도 고통을 느낄 수 있음이 밝혀졌으므로, 혹시 모르기 때문에 먹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또한, '지금 고통을 느끼는' 것이 확실한 동물들의 소비 역시 줄이는 것이 맞다. 어찌되었든 채식주의자의 공통적인 목표는 '인간의 소비를 위해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생명체가 희생되는 걸 최대한 줄이자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물론 식물은 뇌도 없고 신경계도 없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지 못하지만, 혹시 모르는 식물의 고통이 그렇게 걱정된다면 식물도 소비하지 않고 식물의 '배설물'인 과일만 먹는 방식(프루테리언, fruitarian)으로 식습관을 들이면 될 일이다. 식물이 고통을 느낄지도 모르기 때문에 고기를 먹어도 된다는 논리는 말이 안 되는 것이다.

한편, 인간이 채식을 하는 건 식물에게도 유리한 현상이다. 현재 인간은 동물을 먹기 위해 어마어마한 양의 곡물과 식물을 동물 사료로 쓴다. 이 때문에 '이 중간 과정을 없애고 바로 이 곡물과 채소들을 인간이 먹는다면 그 즉시 세계 기아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주장도 많이 제기되고 있다. 진정 식물의 삶이 중요하다면 그 사람 역시 채식을 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옳다. 보다 많은 사람이 채식을 하면 할수록 식물이 필요 이상으로 생산, 소비되지 않기 때문이다.

'공장형 축산 시스템'만이 문제가 아니다

필자는 이어서 ‘경제성과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공장형 축산 시스템에 대한 비판이라면 그 시스템의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했는데, 바로 그 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하는 게 채식인들이다. 채식인들은 고기 섭취 행위 자체를 비판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장식 축산 시스템과 고기 소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이를 고려하면, 실제 그 주장을 언급하지 않은 채식인이라 하더라도 행동만으로 '공장식 축산 시스템'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채식인들을 중심으로 한 공장식 축산 시스템에 대한 문제제기는 지속적으로 이뤄져 왔다. ⓒ연합뉴스

축산업자들은 왜 인도적 축산을 놔두고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공장식 축산을 선택할까? 답은 간단하다. 수요에 맞게 공급을 맞추기 위해서다. 오늘 하루 동안 당신이 먹은 육류를 생각해 보라. 현대 인간은 연평균 1인당 300마리의 동물을 소비한다고 한다.(이것도 오래된 책에서 나온 통계라 아마 지금은 다르겠지만.) 단지 '음식으로 소비되는 동물만' 따진 수치다. 즉, 축산업자들은 이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공장식 축산을 택한다. 동물이 느끼는 고통이야 어찌되었든 돈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돈은 소비자로부터 나온다.(기업과 정부에서 고기 소비를 부추기기도 하고, 이를 위해 로비가 오가기도 하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채식인은 경제성과 효율성 그 자체를 비판하지 않는다. 그 경제성과 효율성이라는 이름 아래 동물들이 희생되는 시스템을 비판하는 것이다. 인간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기업과 축산업자들은 동물들을 자신의 몸이 겨우 들어갈 만한 곳에 욱여넣는다. 이후 암컷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강제 임신당하고, 새끼들은 태어나자마자 바로 격리되고, 수평아리와 수소, 수퇘지들은 세상의 빛을 볼 시간도 없이 죽여져 고기로 팔려 나간다.(공장식 축산 시스템 하에서 동물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는 간단한 인터넷 검색만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채식인들은 이런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인 시스템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 어떠한 채식인도 생존을 위해 사냥하거나 동물을 섭취하는 행위를 비판하지 않는다. 채식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산업화된 사회에서 나왔다. 현대사회에서 대부분의 인간은 더 이상 먹이사슬 안에 있지 않고 환경과 조화롭게 사는 것이 아니며, 이미 동물을 죽이지 않더라도 먹을 것이 풍족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에 채식을 주장하는 것이다.

채식이 오히려 환경파괴를 일으킨다고?

필자는 ‘식물의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농업 시스템’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물론, 농업이라는 것이 환경파괴적인 산업이라는 사실엔 동의한다. 많은 채식인들이 이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농업의 파괴성을 잘 안다면, 육식을 더더욱 줄여야 한다. 소고기 한 점을 얻으려면 엄청난 양의 곡물이 들어간다.(소를 키우기 위해 소에게 사료를 줘야 하는데, 이 사료가 곡물이다.) 차라리 소에게 먹일 곡물이 인간에게 돌아가면 농경지가 많이 필요할 이유도 없다.

미국에서 생산되는 옥수수는 전세계 생산량의 45%를 차지한다. 그리고 이 중 60%가 동물들의 사료로 쓰인다.

또한, 동물들이 비좁은 축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산다면 이를 위해 더 많은 경작지가 필요할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틀렸다. 모든 사람들이 채식을 하면 '죽기 위해 태어날 동물의 수'가 줄어들 것이기 때문에 더 많은 경작지가 필요하지 않다.

‘동물들을 자유롭게 살게 해 줌으로써 경작지가 늘고, 이것이 환경파괴로 이뤄져 극단적으론 결국 멸종이 도래할 수도 있다’는 문장은 오히려 지금 현 세태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문장이다. 필자의 주장과 반대되는 문장이라 생각한다. 전세계적으로 육류소비가 급증함에 따라 수많은 땅이 목초지와 경작지로 바뀌고 있다. 동물을 키우기 위해, 그리고 그 사료를 만들기 위해 밀림과 자연이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공장식 축산 시스템에서 발생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분뇨들은 지구온난화와 환경파괴의 주범이라는 사실도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채식주의자의 도덕적 우월감도 많은 사람이 육류를 소비하기 때문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도 이야기했는데, 앞에서 언급했듯 채식인은 도덕적 우월감을 원하지 않는다. 채식인이 진정 도덕적 우월감을 느낀다고 생각하고, 채식인이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는 게 싫다면, 그리고 이것이 필자 말대로 육류 소비 때문이라면, 스스로 육류 소비를 줄이면 될 일이다.

'채식은 부르주아나 하는 것'이라는 지적에 대해

채식이 고소득자와 부르주아의 운동이라는 비판은 이미 세계적으로 많다.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인데, 이 현실에 대해 정확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다. 나는 미국에서 5년 정도 생활한 적이 있다. 이곳에서의 채식 생활은 비채식 생활보다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에서 채식을 하려면 많은 비용이 뒤따르는 게 사실이다. 유기농 재료와 몸에 좋은 곡물과 채소가 너무나 비싸서 한국인 누구나 혀를 내두르는 것이 현실이다.

유기농이 아닌 작물이라고 하더라도 확실히 비싸다. 이러한 환경에서 채식은 더더욱 힘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라고 해서 우리가 “채식은 비싸니까 부르주아들이나 하고 우리 같은 서민들은 잡식을 해야 한다.” 혹은 “유기농 곡물과 채소는 비싸기 때문에 상류층만 먹고 우리는 농약 들어간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식의 결론을 내려야 할까? '평등한 사회'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우리도 유기농으로 재배된 몸에 좋은 작물들을 먹을 수 있어야 한다.”가 옳지 않을까?

사람들은 채식인들이 타인에게 채식을 '강요'한다고 한다. 하지만 채식을 함부로 권유하지 못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경제적으로 윤택하지 못한 사람에게 채식을 안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하다. 나 역시 미국에서 생활할 때에 비해 한국에서 채식하기가 너무 어려워 힘든 경우가 많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렇다고 해서 ‘내가 힘들기 때문에 동물을 계속 죽이는 시스템에 가담해야겠다’라는 결론이 나와선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노력을 해보겠다는 마음가짐’이 드는 게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현대사회에서 누구나 여성혐오, 인종주의, 성소수자 혐오를 내재화하고 있다. 이건 당사자도 마찬가지다. 이 혐오들을 타파하기 위해 우리는 사회적으로 많은 것을 감내한다. 사회가 나를 힘들게 한다고 다시 이 시스템에 돌아가겠다는 사람은 없다. 비록 내가 완벽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최대한 노력하는 삶을 사는 게 우리가 지향하는 바다. 채식도 이와 같다. 내가 사는 환경이 채식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내 신념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채소는 왜 육류에 비해 비쌀 수밖에 없을까?

채소가 비싼 문제에 대해 경제적으로 접근해 보려 한다. 옥수수 한 개를 얻기 위해 필요한 물, 땅, 노동력 및 기타 들어가는 자본과 고기 한 근을 얻기 위해 필요한 그것들을 비교해 보자. 과학적 지식이 없더라도, 여느 채소와 마찬가지로 옥수수는 소 한 마리를 키우는 것보다 적은 시간과 공간을 차지하고 들어가는 자본도 훨씬 적다는 걸 알 수 있다. 소 한 마리를 키우기 위해서, 그리고 그 특정한 소의 살점 부위를 떼어내기 위해서는 옥수수 한 개를 키우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 시간, 노동력 등이 필요하다. 그러함에도 우리가 느끼기에 채소가 훨씬 더 비싼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그만큼 경제 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우리나라 유통구조에 심각한 결함이 있음은 이미 직썰을 읽는 정도의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경작하는 사람은 고작 몇 백 원을 받고 배추 한 포기를 팔았는데, 도시 소비자들은 이걸 사기 위해 몇 천 원을 지불하고 있지 않은가.

또한, 육류가 저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동물들을 그만큼 좋지 않은 환경에서, 짧은 시간 내에 항생제와 약으로 범벅이 된 질 낮은 사료를 먹이며 공장식으로 키웠기 때문이다. 같은 가격이면 고기를 먹어야 더 잘 먹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문화적, 사회적 사상이나 분위기도 이 경제적 선택에 한 몫을 할 것이다. 나도 채식하기 전에 바로 그 생각을 했으니까.(이 문제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웹사이트 검색을 추천한다. 쉽고 친절하게 설명된 경제적 분석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공장식 축산 시스템의 잔인한 사육 방식은 전세계적으로 지탄받고 있다.

채식인들은 매 순간 육식을 강요 받는다

강요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겠다. 채식을 '강요'한다고 말들을 하는데, 채식인이 육식을 '강요' 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봤는지 모르겠다. '육식 강요'란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채식을 하기에 녹록지 않은 경제적 환경이 육식을 강요하고, 채식인들 눈에는 죽은 시체로밖에 보이지 않는 고기 광고가 매일매일 매 순간마다 주변에 나뒹굴고, 나는 분명 내가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친구들과 밥 먹을 때마다 미안해 하며 죄책감까지 들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먹는 저 고기 한 덩이가, 내 눈에는 정말 살리고 싶은 생명이었음을 인식하면서도 행여 그 사람이 기분 나쁠까 싶어 참고, 결국엔 그래도 믿을 만한 정보통이라는 직썰 같은 곳에 올라온 글이 나의 신념을 이렇게 무시하고, 오해하는 것.

이런 시스템적인 강요는 보지 못하고, 어쩌다 한번 주변의 채식인이 “당신이 먹는 고기가 어디서 오는 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라고 하는 말이 그렇게 불편한 것인지 묻고 싶다. 물론, 불편할 수 있다. 어느 사회적 운동과 마찬가지로(인종차별 반대, 여성주의, 성소수자 운동, 장애인 운동; 모두 우리가 여기 있고 지워지지 않을 것임을 주장하는 운동이다.) 주변을 불편하게 하는 게 채식인이 해야 할 일이니까. 그런데 그러한 불편함을 느끼고 나서 불편하게 한 사람을 나무라는 게 아니라 ‘내가 왜 이게 불편할까’ 하고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직썰 독자 중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해요”라고 한다고 해서 그걸 강요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주의 문제는 도덕적 우월감의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확장하면 우리 모두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소수자 차별에 반대해야 해요”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면, 그가 그런 말을 한 이유는 도덕적 우월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그리고 우리 모두의 삶이기 때문이다.

채식인은 당사자성이 없다는 이유로 비판받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중심사회에서 인간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동물들을 대신해 “동물 소비를 당장 끊어햐 해요”도 아니고 “동물 소비를 조금씩 줄여 나가야 해요”라고 말하는 것조차 듣기 싫고 불편하다고 하면, 이야말로 '육식인이 허락하는 채식주의'만 하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고 또 무엇인가. 정말 '각자의 길을 가자'고 주장하고 싶다면 채식인이 삶을 사는 데 있어서 진정 비채식인과 동등한 권력적 위치에 있는지 잘 생각해 보길 바란다. 직썰을 읽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마지막으로, 그 누구라도, 자신이 정체화하지 않는 집단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으로, 제대로 공부도 하지 않은 채 글을 쓰는 것은 지양했으면 한다. 정말 불편하다면, 이상하다면, 싫다면, 마음에 들지 않는 대로 있으면 된다. 직썰 같은 미디어 아울렛에 글을 쓴다는 것은 분명 개인적으로 끝날 제스쳐가 아니고 퍼블릭과 소통을 하고 싶다는 건데, 대화를 하고 싶다면 제대로 공부를 하고, 사유하고, 고민 한 후에 글을 썼으면 좋겠다.

필자 주:

*이 글에서 채식인이라고 지칭 한 사람들은 윤리적인 이유에서 채식을 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내가 쓴 채식과 여성주의와의 관계에 대해 읽고 싶으면 여기로 가세요.

채식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소의 페미니스트적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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