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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오늘, 약산 김원봉의 의열단이 출범했다

  • 입력 2016.11.09 12:17
  • 기자명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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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에 붙인 사진 속의 의열단원들의 모습.

1919년 9일, 만주 길림성 파호문 밖 한 중국인의 집에 모인 독립지사들은 밤새워 논의한 끝에 이튿날인 급진적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항일비밀결사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했다. 결사의 성격은 조직 후 만든 공약 10조의 첫 조항인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한다.’에서 유래한 단체명[의열(義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의열단의 단원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중심으로 고문에 김대지와 황상규, 단원은 김원봉·윤세주(1901~1941)·이성우·곽경·강세우·이종암·한봉근·한봉인·김상윤·신철휴·배동선·서상락·권준 등 13명이었다. 단장에는 약산(若山) 김원봉(1898~1958)이 선출되었다.

의열, '정의를 맹렬히 실행한다'

고문인 김대지와 황상규는 김원봉의 동향 선배로 의열단의 지도이념 및 사상을 정립하는 데 영향이 컸고 뒷날 단재 신채호가 조직의 강령을 체계화했다. 의열단의 독립투쟁노선과 행동강령은 단재가 1923년 1월에 완성,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일명 의열단 선언)에 잘 드러나 있다.

▲ 의열단 창립단원 약산 김원봉과 석정 윤세주

때는 1919년, 지난 봄에 거족적으로 전개된 3·1운동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은 일제에 대항할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항일독립운동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만주와 중국 본토지역 독립운동 단체들의 미온적이고 온건한 독립운동 방식을 불만스럽게 여긴 이들은 급진적인 폭력투쟁을 지향하였다.

의열단은 당시 일부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 노선이었던 문화주의·외교론·준비론 등 일체의 타협주의를 배격했다. 이들은 민중 직접혁명과 평등주의에 입각하여 오직 폭력적 민중혁명에 의한 일제의 타도라는 전술을 통하여 독립의 쟁취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들은 공약10조 외에도 파괴해야 할 일제 기관 5개를 뜻하는 ‘5파괴’와 암살 대상인 ‘7가살’을 정하여 본격적인 의열투쟁을 전개하려 하였다. 의열단은 파괴해야 마땅한 일제의 기관으로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경찰서, 기타 중요 기관으로 정했고, 조선 총독과 이하 고관, 일본군 수뇌, 대만 총독과 대만 총독부 고관, 친일파 거물, 밀정, 반민족적 토호, 매국노 등을 ‘7가살’로 꼽았다.

▲ 의열단 의열투쟁의 주역들. 이들은 거사 후 현장 또는 수감 중에 순국한 경우가 많았다.

“조선총독 죽이기를 5~6명에 이르면 후계자가 되려는 자가 없을 것이고, 도쿄에 폭탄을 터뜨려 매년 2회 놀라게 하면 그들 스스로 조선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의열단의 의열투쟁은 1920년 일제 고관 암살과 중요 관공서 폭파 목적의 제1차 암살파괴계획에 따라 밀양과 진영에 폭탄을 반입하려던 투쟁으로 시작되었다. 이 계획은 일제에 사전 탐지되어 실패하였지만 이후 부산경찰서와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1920), 조선총독부 폭탄투척(1921), 상하이 황포탄 의거(1922),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투쟁(1923) 등이 이어졌다. [<의열투쟁 일람> 참조]

1920년대의 의열투쟁

의열투쟁은 1924년 도쿄 궁성 앞 이중교 폭탄투척과 1926년에도 나석주 의사의 동척과 조선식산은행 폭탄투척으로 계속되었다. 이후에도 제3차 폭탄계획, 대구 부호 암살 계획, 북경 밀정 암살 사건, 경북의열단 사건 등 의열단이 계획하고 실행한 의거는 계속되었는데, 의열단의 항일투쟁은 민족운동사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1926년 이후, 의열단원들은 중국 국민당 정부가 운영하던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정치교육을 받았다. 뒤에 의열단은 상해 임시정부를 둘러싼 독립운동 조직들이 일본과 싸우기 위하여 통합한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편되었다.

임시정부는 초기에 의열단의 폭력투쟁 노선을 '모험행동'으로 받아들여 이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정작 의열단의 김원봉은 이승만의 신탁통치 제안이나 임정 내부의 파벌 싸움에 실망한 나머지 독자노선을 견지했다.

한편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배격하던 김구도 의열단의 활동에 고무되어 한인애국단(1931)을 조직 운영하였다. 도쿄의 경시청 사쿠라다몬(櫻田門) 앞에서 일왕 히로히토 일행에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거(1932)와 윤봉길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의거(1932)는 김구가 조직한 의열 투쟁이었다.

▲ 1923년의 제2차 파괴암살계획에 따라 폭탄을 반입하려다 실패한 의열투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밀정>

최근 영화 <밀정>이 인기를 모으면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약산 김원봉이 의열단을 조직하였을 때 그는 스물한 살이었다. 오늘날의 청년과 피식민지 시절의 젊은이들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는 항일비밀 결사를 이끌어 나갔던 탁월한 독립운동가였다.

그가 주도하는 의열 투쟁에 충격을 받은 일제는 거액의 현상금을 걸었다. 임정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에게 걸린 현상금은 60만 원, 김원봉에게는 100만 원이 걸렸다. 오늘날의 화폐 가치로 따지면 약 200억~300억 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그만큼 그가 벌인 의열 투쟁은 일제에게 뼈아팠던 것이다.

1923년의 제2차 파괴암살계획에 따라 폭탄을 반입하려다 실패한 의열투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밀정>에서 약산은 실명으로 등장(이병헌 분)한다. 송강호가 분장한 이정출은 바로 이 계획에 참여했던 경기도 경찰부의 경부 황옥을 모델로 한 인물이다.

▲ 약산 김원봉은 의열단과 조선의용대를 이끈 열혈 독립투사였지만 남북 모두에서 잊힌 존재가 되었다.

▲ 약산 김원봉이 조직한 조선의용대 성립기념 사진.(1938. 10,. 10.)의용대는 중국본토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약산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주도로 조선의용대가 조직된 것은 1938년 10월이다. 조선의용대는 국민당 정부군의 지원부대로 중국 본토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며 대원들은 국민당 정부로부터 매월 식비와 공작비를 지원받았다.

남북 양쪽에서 잊힌 독립운동가 김원봉

약산이 1942년 7월 임시정부에 참여하자 의용대의 일부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었고,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을 거쳐 군무부장에 취임했다. 광복 후, 귀국한 약산이 고향인 밀양에 돌아왔을 때 온 군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민족주의민주전선, 조선민주청년동맹 등에 참여한 약산은 좌익 혐의로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붙잡혀 수모를 당한 뒤, 사흘 동안 통곡을 했다고 한다. 더러 열혈 민족주의자였던 약산이 1948년 김규식·김구 등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가했다가 돌아오지 않은 이유를 이때의 굴욕 때문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북한 정권이 수립된 뒤, 약산은 국가검열성상, 노동상,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지만 1958년 김일성에게 숙청되었다. 전언에 따르면 그는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그의 무덤은 독립운동가들이 묻힌 평양 애국열사능에도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남북 어디서도 독립을 위한 약산의 풍찬노숙을 기억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이 독립운동가는 이제 남북 모두에서 잊힌 인물이 된 셈이다.

▲ 부산시 금정구 구서동 만남의 광장에 세워진 박차정 의사의 동상.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약산은 첫 아내와 사별한 뒤, 1931년 독립운동가 김두봉의 조카딸로 의열단원이었던 박차정과 결혼했다. 여학교 때부터 동맹휴학을 주도하고 근우회 사건(1930)으로 옥고를 치렀던 박차정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 등을 지냈고 1939년 전투 중 부상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1944년 5월 광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했고 남편 김원봉도 월북하여 각료를 역임했기 때문에 공적을 평가받지 못하다가 1995년에야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부산시 동래구에 생가가 복원되고 부산 금정구에 동상이 세워졌다. 아내에게 미친 뒤늦은 기림이 약산의 삶과 투쟁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줄 수 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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