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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10.26 혁명 동기 중 하나는 박근혜 때문"

  • 입력 2016.10.26 10:23
  • 기자명 아이엠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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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6일)은 10.26 사건이 발생한 지 37년이 되는 해입니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와 차지철 경호실장을 암살합니다. 김재규는 항소이유서에서 10.26을 “5·16과 10월유신을 거쳐 완전하게 말살시켜놓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켜놓기 위한 혁명”이라고 밝혔습니다.

왜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를 암살했느냐에 대해서는 “유신체제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정도의 한계점에 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박정희, "부마항쟁 같은 일이 또 일어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김재규는 부마항쟁이 “불순세력이나 정치세력의 배후조종이나 사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일반시민에 의한 민중봉기”라고 박정희에게 말했지만 “박 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면서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라며 역정을 냈다고 밝혔습니다.

옆에 있던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 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00∼200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는 김재규의 증언을 보면, 어쩌면 10.26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끔찍한 학살이 일어날 수 있었다는 무서운 생각도 듭니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발포명령 발언이 단순히 말에만 그치지 않으리라고 판단했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그는 군인 출신이고 절대로 물러설 줄을 모르는 분입니다. 더구나 10월유신 이후 집권욕이 애국심보다 훨씬 강하여져서 심지어 국가의 안보조차도 집권욕의 아래에 두고 있던 분입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여러모로 비교도 하여보았지만 박대통령은 이박사와는 달라서 물러설 줄을 모르고 어떠한 저항이 있더라도 기필코 방어해내고 말 분입니다.

4·19와 같은 사태가 오면 국민과 정부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질 것은 분명하고 그렇게 되면 얼마나 많은 국민이 희생될 것인지 상상하기에 어렵지 아니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4·19와 같은 사태는 눈앞에 다가왔고, 아니 부산에서 이미 4·19와 같은 사태는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셋째로,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원하지 않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국제적으로도 고립되고, 특히 미국은 대한정책을 바꾸게 될 충분한 가능성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 나라의 장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 본인은 이와 같은 절박한 상황에서 도저히 더 이상 늦출 수가 없어서 10·26 혁명을 결행하였던 것입니다.”

김재규 항소이유보충서 중에서

김재규, "10.26 혁명 동기 중 하나는 박근혜 때문"

김재규는 항소이유보충서를 통해 10.26이 혁명이었고 정당하다는 사실을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 항소이유보충서에는 박근혜 대통령과 최태민의 이야기도 들어 있습니다.

김재규는 ‘10.26 혁명 동기의 보충’ 부분에서 “10·26 혁명의 동기 가운데 간접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 한 가지는 박 대통령이나 유신체제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박 대통령의 가족에 관한 것”이라며 “공개된 법정에서는 밝힐 수 없는 것이지만 꼭 밝혀둘 필요가 있으므로 이 자리에서 밝히고자 합니다.”라며 박근혜와 박지만, 두 사람을 거론합니다.

10·26 혁명동기의 보충

본인이 결행한 10·26 혁명의 동기 가운데 간접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 한 가지는 박 대통령이나 유신체제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박 대통령의 가족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공개된 법정에서는 밝힐 수 없는 것이지만 꼭 밝혀둘 필요가 있으므로 이 자리에서 밝히고자 합니다.

① 구국여성봉사단과 관련한 큰영애의 문제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총재에 박근혜양이었는 바,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왔고 따라서 국민, 특히 여성단체들의 원성이 되어왔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영애가 관여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도 문제 삼은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민정수석(民情首席) 박승규 비서관조차도 말도 못 꺼내고 중정부장인 본인에게 호소할 정도였습니다.

본인은 백광현 당시 안전국장을 시켜 상세한 조사를 시킨 뒤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나 박 대통령은 근혜양의 말과 다른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직접 친국까지 시행하였고, 그 결과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면서도 근혜양을 그 단체에서 손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양을 총재로 하여,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 놓은 일이 있었습니다. 중정본부에서 한 조사보고서는 현재까지 안전국(6국)에 보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② 지만군의 문제

육군사관학교는 전통적으로 honor system이 확립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육사에 입학한 지만군은 2학년 때부터 서울 시내에 외출하여 여의도 반도호텔 등지에서 육사생도로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오입을 하고 다녔읍니다. 그래서 본인이 박대통령에게 육사의 명예나 본인의 장래를 위하여 다른 학교에 전학시키거나 외국유학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간곡하게 건의한 일이 있었읍니다. 그러나 그러한 건의는 결코 받아들여지지 아니하였습니다.

③ 위와 같은 문제는 아이들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박 대통령의 태도에서 본인은 그의 강한 이기심과 집권욕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자녀들의 문제이지만 이런 일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국민을 우매하게 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임은 물론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를 이런 기회에서나마 밝혀두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1980. 1. 28 김재규

김재규가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를 언급했던 가장 큰 동기는 최태민의 범죄 사실을 박정희에게 보고해 직접 심문까지 했지만, 오히려 두 사람의 관계가 더 돈독해졌다는 점도 있었습니다. 10.26의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지만, 김재규가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를 통해 이 정권을 더는 놔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배경 중의 하나는 분명해 보입니다.

대를 이어 박정희 일가를 몰락시킨 최태민 일가

2016년 10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을 통해 최순실 게이트 의혹에 대해 “국민 여러분께 깊이 사과드립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대국민사과는 고작 1분 35초에 불과했고, 이마저도 사전에 녹화된 영상이었습니다.

‘최순실 게이트’는 박근혜 정부를 무너뜨리는 가장 큰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예상할 수는 없지만, 이미 박근혜 정부는 도덕성과 신뢰가 모두 무너진 ‘식물 정부’라고 봐야 하진 않을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김재규가 왜 ‘항소이유보충서’에서 박근혜와 박지만 문제를 언급했는가를 보면 장기 집권에 의한 권력 대물림을 예상하지 않았느냐는 생각도 듭니다. 2인자를 절대 두지 않는 박정희의 속성상 정권을 박근혜가 물려받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고, 이를 혁명 동기의 하나로 충분히 고민했을 것입니다.

김재규의 마지막 유언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나의 죽음, 즉 나의 희생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우리나라 모든 국민이 동시에 자유민주주의가 절대 필요하고 자유민주주의는 절대 회복돼야 하겠구나 하는 것을 전체 국민이 아주 확실히 깨닫게 되고 또 그것을 확실히 자기 몸에다가, 목에, 자기 가슴에다가 못 박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될 것입니다.”

김재규의 유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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