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통장에 100억이 100만번쯤 찍힌다면 이렇게 써 주마

  • 입력 2016.10.21 13:51
  • 수정 2016.10.21 13:52
  • 기자명 20timeline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 개인 번역가 쓰는 사람이야~

뭐든지 멋진 김혜수 언니가 얼마 전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보고 싶은 원서가 있으면 번역가를 고용한다고. 그렇게 번역된 책을 보는 것이 취미라고. 세상에, 개인 번역가라니. 이 얼마나 고급진 소비인가? 돈 벌면 건물이나 살 생각을 하던 내가 급속도로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나만 속물인 건가? 혹시 몰라 사람들과도 얘기를 나눠 봤다.

“니가 로또에 당첨됐어. 후천적 금수저가 된 거야. 그러면 뭘 해서 어떻게 돈을 쓸 거야?”

대답들은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혼자 보기 아까운 답변들을 여기에서만 살짝 공개한다. 우리끼리 얘기니까 비웃기 없기.

1. 언덕길에 에스컬레이터 설치하기

돈이 정말 썩어나게 많으면 뭘 할 거냐고? 집앞 언덕길에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할 거다.

퇴근길_언덕을_바라보는_나의 시점.jpg

모든 일과가 끝나고 숙명처럼 올라가는 그 언덕은 내 삶을 좀먹고 있다. 버스가 2시간 간격으로 오는 길이기 때문에 높은 확률로 꼬박 10분간 오르막을 타야 하는데, 아무리 행복한 날도 그 귀가길을 끝내고 나면 결국 불행한 날이 된다. 하물며 원래 불행했던 날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가끔 찾아오는 행복한 날만큼은 좀 행복하게 집에 가고 싶다. 이젠 정말 그 저주스러운 경사면에 나의 인생을 티머니 쓰듯이 소진하며 집에 들어가기가 싫다. 이게 그렇게 하찮은 소리인가?

그 에스컬레이터는 웬만한 수풍해에도 끄떡없도록 큼직한 유리지붕을 쓸 것이며, 한 달에 한 번씩 완벽한 정기점검을 받을 것이며, 주요 갈림길마다 적절히 끊어져 있어 누구나 원하는 곳에서 내려 집으로 편안히 걸어갈 수 있게 설계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좌우에 설치된 안전바를 쥐고, 발판에 가방을 내려놓고 유유히 가다가, 뭔가 빠뜨리고 온 사람이 다급하게 뛰어 올라가는 걸 보고 정중하게 비켜서 주겠지. 마지막 지점에서 가방을 집어들고 내려서 마지막으로 집까지 가면 된다. 아,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게 우리 집 가는 길이었으면.

에스컬레이터 공장 전경. 아쉬운 대로 이런 사진을 보며 대리만족을 합니다

그러고도 돈이 남으면 뭘 할 거냐고? 정말 돈이 무한대라면, 우리 동네만큼이나 심각한 언덕바치 골목길에 에스컬레이터 보급 사업을 전개할 거다. 나중에 통행료를 걷는 한국형 맥쿼리가 될 생각이냐고? 아니. 국토교통부가 못한 기간설비 확충과 청년 일자리 창출을 혼자 해낸 성웅이 되고 싶으냐고? 아니. 그냥 그런 게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다. 그렇게 돈이 많은데 뭐 하러 개인 운전기사 같은 따분한 거나 찾고 있겠는가? 상상해 보라, 연중무휴로 여러분 집앞까지 가는 에스컬레이터! 기가 막힐 것 같지 않은가?

2. 세계의 모든 자연 경관 보존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 돈은 권력과 폭력 그 자체였다. TV 속에서 양복을 입고 싸우는 할아버지들을 가리켰을 때에도, 뒷동산의 나무들이 잘렸을 때에도 내가 “왜 저래?”라고 물으면 늘 같은 대답이 돌아왔던 것이다.

돈 때문에 그래. 돈이 있어서 그래.

아름다운 우리자연 푸르게 푸르게

초등학교에서 경제 발전과 환경오염의 관계에 대해 배웠다. 자연을 괴롭히는 자본의 논리에 대해 더욱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환경을 사랑하는 시골 꼬마는 당찬 포부를 세웠다. 돈을 아주 아주 아주 많이 벌 거야. 벌어갖고는 전세계의 산이랑 강이랑 바다를 다 살 거야. 회사를 세워서 사람들을 고용해야지. 쓰레기를 줍고 분리수거를 하고 동물을 구하고 나무를 심게 할 거야. 월급은 500만원씩 주고. 모든 건물 옥상에는 태양열 발전소를 세우고 정원을 가꾸게 해야지.

그 결심 이후 내 공책은 원대한 계획을 진행하기 위한 계획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리고, 더하고 빼는 과정을 수백 번씩 반복해도 해결되지 않는 단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그만한 예산을 내가 벌 수 있을 방법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계획은 완벽한데...

그리고 지금, 나는 지금 밥버거의 발명을 찬양하는 대학생으로 살아가고 있다. 세상의 부자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난 언젠가 세계를 구할 거라며 구시렁거리면서 말이다. 심지어 지갑이 특히 쪼들리는 월말이면 컵라면을 끓이면서 각종 정기후원을 그만둘까도 생각한다.

하지만 인생 모른다. 시작이 반이라는 진부한 말도 있지 않던가. 원대한 포부를 품었으니, 부지런히 내 할 일을 하다 보면 세계 녹림 수호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겠지. 그때가 되면 20년 넘게 준비한 장대한 계획을 자신 있게 실천할 것이다. 물론… 기회가 오면.

3. 사립 젤리 연구소 설립

가끔 꿈을 꾼다. 우리 집 앞마당에서 곡괭이질을 하던 중 마침내 유전이 터지는 꿈을. 분수처럼 흩어지는 검은 물방울들 사이로 보이는 무지개는 은혜롭고도 또 아름다울 것이다. 물론 꿈이 깬 다음은 허무하다. 하지만 예지몽이라는 것도 있다지 않던가. 조만간 석유 재벌이 될 날을 기다리며 나는 틈틈이 대부호가 된 후의 행보를 계획해 두었다.

혜화동 석유왕이 된 후 가장 먼저 할 일은, 국내외 일류 과학자들을 포섭하는 것이다.

그리고 젤리 연구소를 설립할 것이다.

안녕? 난 젤리고 지금부터 너를 살찌울 거야

다들 알다시피 젤리는 완전무결한 식품이다. 나는 지난 스무 해 동안 포도, 곰, 지렁이부터 상어에 바나나까지 동네 편의점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젤리를 시식해 보았다. 허나 아쉽게도 항상 0.2% 모자란 맛에 그칠 뿐, 아직 완벽하게 흡족한 젤리를 맛본 적은 없다.

보다 진화된, 보다 완벽한 젤리를 위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지만 무능한 기업들은 젤리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있어 개탄을 금치 못할 따름이다. 삶의 행복도 상승과 세계평화를 위해 젤리 연구소에서 내 입맛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궁극의 젤리, 최후의 젤리를 발명할 것이다. 그리고 젤리 공장 생산라인을 만들어 하루에 세 봉지씩 먹을 것이다.

더는! 안먹어! 왕꿈틀이!

이외에도 부대찌개 먹을 때 사리 전부 다 넣기, 인형 나올 때까지 인형 뽑기, 무한리필 스시집에서 한 접시만 먹고 오기, 모든 웹툰 3화씩 미리보기, 짜장면이랑 짬뽕 둘 다 시켜먹기, PC방에서 5만원 충전하기 등 어마무시한 계획들이 도사리고 있다.

나중에 이 모든 꿈이 실현되고 나면, 이 이야기를 읽고 내 꿈을 응원해 준 당신에게는 특별히 젤리 한두 봉지쯤 공짜로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럼 난 오늘 해야 할 곡괭이질 마저 끝내러 가야 해서 이만.

4. 명문 예술 대학 설립

땅을 살 것이다. 이미 부지도 정해뒀다. 장한평역 아래에 있는 서울메트로 군자 차량사업소가 그곳이다. 말이 되냐고? 말은 안 된다. 다만, 돈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그렇게 차량기지 이전을 성공적으로 완료했다. 그곳에 무엇을 하면 좋을까. 지역 사회의 숙원을 이룬 김에 국회의원에 나가볼까? 아니면 요즘 화젯거리인 하남 스타필드가 초라해질 만한 초대형 쇼핑단지를 유치해볼까? 아니다. 모두 시시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재미없다.

나는 그곳에 대학을 만들 것이다.

그냥 대학이 아니다. 4년제 예술 대학이다.

OVER THE 영국왕립예술대학을 지향합니다

취업이 안 돼서 굶어 죽는 마당에 무슨 예술이냐고? 그러니까, 돈 많은 제가 한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우선, 4년 전액 장학금이다. 학부생들은 그냥 세상 물정 모르고 도끼자루가 썩을 때까지 예술만 하시면 되겠다. 어차피 작가 활동 시작하면 평생을 열등감과 질투로 허우적거릴 텐데, 그 긴 인생에서 4년 정도는 마음대로 노셨으면 좋겠다.

다음은 최고의 인프라가 제공된다. 학부생들은 두산아트센터 규모의 극장 하나, 동숭아트홀 규모의 극장 두 개를 기본으로 각종 최신 장비 및 기술지원을 받을 것이다. 헬스장만 해도 집에서 가까워야 벤치프레스라도 하나 더 하지 않던가. 무언가 없어서 하지 못했다는 말이 절대 나오지 않도록 최선의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최고만 준비해줄 테니 너네는 그냥 만들기만 해라

물론 대가는 있다. 일단은 전원 기숙사(2인 1실) 생활. 호그와트의 기숙사 안에서 펼쳐졌던 꿈과 희망 가득한 스토리가 (구) 군자차량사업소에서 펼쳐졌으면 하는 아주 이기적인 욕심 때문이다. 추가로, 교복 착용이 진행된다. 디자인은 경성제국대학의 의복을 원전으로 삼을 것이다. 동숭동을 우울하게 거닐던 근대 지식인의 고뇌를 계승하여,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부유하는 예술인의 현실을 잊지 말라는 긍정적인 취지에서다.

이렇게 술자리에서 말하면 모두가 깔깔 웃는다. 농담이라고 생각하나 본데, 진지하다. 지면이 없어서 다 적지 못하겠지만, 입시부터 학부과정 개설 및 교수진은 물론이며 심지어 건물 디자인까지 생각해둔 것이 있다. 참고로 첫 개강은 2036년 3월 5일이다. 똑똑히 기억하시라. 세상이 깜짝 놀랄 테니.

일단 나는 그때까지… 열심히 돈을 벌겠다.

5. 독립 공간 지켜주기

혜화역 근처에 있던 <하이퍼텍나다>를 아직도 떠올린다. 방학이 되면 항상 가던 그곳. 다양한 영화들을 보며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울고 웃었던가. 특히 <하이퍼텍나다>10주년을 상영회에서 본 영화는 지금도 카톡 프로필에 걸려있을 정도로 감명 깊게 봤다. 그리고, <하이퍼텍나다>의 그 어떤 영화도 더 이상 내게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 상영이 마지막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볼 수 없는, 누군가의 소중한 추억

어른의 사정으로 인해 나의 소중한 그곳은 더 이상 지도에서 찾을 수 없었다. 하긴, 잘 나가던 프랜차이즈 커피샵도 잠깐 사이에 망해버리는 요즘이 아닌가. 대중적이지 않은 영화나 틀어주는 곳이 오래 버틸 리가 없다. 그 공간에서 누군가들이 모여 토론하고, 여럿이 의기투합해서 만든 독립잡지를 볼 수 있다는 가치는 이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그래서, 더 이상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내가 돈을 쓰고 싶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문화 공간을 구매할 것이다.

이제는 볼 수 없는 독립출판서점 '가가린'

그 과정에서 권리금 같은 행정적 이슈가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모든 공간에 담당 변호사를 고용하여 모든 이슈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것이다. 그렇게 모든 진행이 끝나면? 나도 사람인데, 땅 파먹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임대료를 받을 것이다. 단, 그것은 돈이 아니다. 각 공간의 ‘특산품’을 받고 싶다. 무슨 말인고 하니, 유리공예를 하는 곳에서는 우주를 닮은 예쁜 호리병을, 책방을 운영하는 사람에게는 발행된 시집들을 임대료 대신 받을 것이다.

애초에 내가 바란 사치는 딱 그 정도였다. 나의 노력으로 인해 누군가의 아지트가 무너지지 않는다면, 정말로 그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원문 : 20's timeline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