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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는 지휘관의 ‘따까리’가 아니다

  • 입력 2016.10.13 11:30
  • 수정 2016.11.28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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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대장 부인에게 '아줌마'라고 불렀다는 이유로 영창에 수감됐다. 김제동 사태를 지켜본 A(47) 씨는 자신의 옛 군 생활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1990년대 초 전방 모 사단 통신대대에 복무했던 A 씨는 부대 내에서 속칭 '따까리'로 불렸다. 따까리란 당시 대대장(중령) 관사 당번병을 지칭하는 군대 은어였다.

커피 등 차(茶) 봉사, 군화 닦기, 심지어 빨래까지 챙겨야 하는 데다 대대장 관사까지 수시로 오가는 '가정부' 역할이었다. 대대장 부인을 '사모님'으로 불렀고 사모님의 집안일, 잔심부름까지 챙겼다.

이리저리 살피며 살살 잘 빠져나가는 '눈치'는 당번병을 잘 수행할 수 있는 '덕목' 중 하나였다.

A 씨는 "복무 당시만 해도 성격이 고약한 부대장을 만나면 각종 허드렛일에 병사들이 동원되는 등 상식선에서 이해 못 할 일이 많았다"며 군 생활을 떠올렸다.

A 씨가 맡았던 당번병은 지휘관 일정을 관리하고, 행정업무를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주로 지휘관실 옆의 조그만 방에서 책상 앞에 앉아 대기한다.

혹한기나 유격 훈련 등 각종 훈련에서도 제외되고, 작업병을 찾아다니는 행정보급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데다 혼자 있는 시간도 많아 동료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한다.

12일 국방부에 따르면 현재는 '당번병' 또는 'CP병'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고 '지휘 근무병'으로 부른다. 장성급 지휘관은 정식 편제가 돼 있으나 연대장급 이하 지휘관은 그렇지 않다.

예전에는 명확한 선발기준이 없었기에 학력 높은 병사나 지휘관이 선택한 병사를 뽑는 사례가 잦았다. 하지만 지난해 3월부터 전산 분류로 선발하기 때문에 이권 개입이 없다고 한다.

연대장급 이하 지휘관은 정식 편제가 없어 통신병들이 지휘 근무병 역할까지 한다. 평시에는 지휘 근무병 역할을 수행하고, 전시에는 통신병 역할을 하는 방식이다.

지휘관 차량 운전을 담당하는 '1호차 운전병'도 장성급은 편제돼있으나 연대장급 이하는 편제가 없어 지휘 근무병이 운전병 역할까지 겸임하기도 한다.

일부 지휘관은 도움·배려 병사를 보호하고자 지휘 근무병으로 두기도 한다.

임태훈 군 인권센터 소장은 "연대장급 이하 지휘관도 정식 편제해주는 게 논란의 소지를 줄일 수 있지만, 비편제를 불법으로 보면 부대운영 자체가 안 되기 때문에 불법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지휘 근무병은 지휘관이 자신의 역할 좀 더 충실할 수 있도록 돕지만, 부대에 따라 업무 강도가 천차만별인 탓에 일각에서는 지나친 사역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게다가 일부 부대에서는 여전히 지휘관이 지휘 근무병 등 병사들을 소모품처럼 다루는 악습이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때문에 장병들의 인권이 더 개선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강원도의 한 부대에서 1호차 운전병으로 근무하다 최근 전역한 B(22) 씨는 "매사에 실수하면 안 된다는 커다란 중압감에 시달렸고 혼자 있다 보니 오히려 작업이나 훈련을 여럿이 함께하는 일반 보직 병사들이 부러웠다"고 밝혔다.

전방 부대에서 근무했던 C(27) 씨도 "지휘 근무병이 지휘관의 이삿짐을 나르거나 자녀에게 과외수업을 해주는 등 개인적인 일까지 끌려가는 것을 종종 목격했다"고 말했다.

임 소장은 군화 닦기, 이삿짐 나르기, 자녀 과외, 라면 끓이기 등은 업무 외 지시사항이기 때문에 명확한 불법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군대에서는 불법과 부당한 것을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부당한 것은 업무 범위 내의 얘기이고, 지휘관의 지위를 이용한 업무 외 지시는 모두 불법이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지휘관이 "참호 10개를 파라"고 했을 때 그럴 필요가 없다고 판단된다면 부당한 명령이지만, 라면 끓이기나 구두 닦기는 업무 연관성이 전혀 없으므로 불법이라는 것이다.

임 소장은 "청탁금지법이 시행되면서 '업무 연관성' 얘기를 많이 하는데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된다. 업무 연관성이 없으면 모두 불법이다"고 설명했다.

그런데도 지휘 근무병은 마냥 편한 꿀 보직, 땡보(편한 보직 또는 땡잡은 보직)라는 인식이 팽배하지만, 직접 경험한 이들은 잡무에 스트레스가 많아 마냥 편하지만은 않다고 말한다.

최근까지 전방의 한 포병부대에서 지휘 근무병으로 근무했던 D(23) 씨는 "간부들 지시 따르고 복잡한 행정업무를 밤늦게까지 처리하는 일만 해도 정신적 스트레스가 상당해 항상 편하지만은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부대 행정처리나 간부들 수발은 기본이고 교육훈련에 나가서도 행정담당 간부와 함께 부대장이나 중대장의 숙소(야전 텐트)와 식사를 준비하거나, 야간 훈련 시 라면을 끓이는 일 등은 당연했다"고 덧붙였다.

일선 부대 역시 예전처럼 '지휘 근무병은 군 생활이 편하다'는 인식은 많이 줄었다는 반응이다.

일과 시간이 끝나면 개인정비시간이 확실히 보장되는 소총수 등 평범한 병사가 오히려 좋다는 인식이 병사들 사이에 퍼져 있다는 것이다.

지휘 근무병은 늘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일하는 데다 근무 시간이 다소 불규칙적이어서 기피 대상이라고 한다.

한 향토사단 참모는 "요즘 세대 군인들은 일과가 끝나고 자기 시간을 보내는 게 중요해져서 지휘 근무병이나 1호차 운전병을 아주 싫어하는 분위기"라며 달라진 분위기를 전했다.

모 부대 관계자 역시 "이젠 단순히 '편한 군 생활'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휘관실 근무를 제대로 할 수 있는 병사를 중심으로 근무병을 선발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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