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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파산 :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다

  • 입력 2016.10.07 14:30
  • 기자명 북클라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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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미생> 중 한 장면 ⓒtvn

야마모토 고헤이 리쓰메이칸대학 교수는 일본의 ‘로스트 제너레이션’과 한국의 ‘88만원 세대’를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은 나이 많은 형, 한국은 그 뒤를 쫓아가는 동생이란 느낌이 든다. 약간의 시차가 있지만 한·일 젊은이들의 상황은 상당히 닮아 있다.

‘로스트 제너레이션’이란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20대 중반부터 30대 중반을 보낸, 즉 사회 진출 시기가 일본의 버블 붕괴에 맞물려 정사원이 될 기회를 잃은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다. 이름 그대로, 이들은 가난하고 불안정한 생활을 영위하며 미래조차 불투명한 ‘잃어버린 세대’다. 이 시기 일본의 비정규직 비율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종신고용이라는 고유의 트렌드도 바뀌었다. 그리고, 한국은 딱 10년 뒤 ‘88만원 세대’를 낳았다.

2009년 한국과 일본의 청년들은 홍대의 한 카페에 모여 ’일하지 않는 사람들의 메이데이’ 행사를 개최했다. 이 행사에서는 대학 등록금과 학자금 대출 문제, 취직난 탓에 성형까지 하는 학생들의 이야기, 직장 내 성희롱 문제, 안정된 일자리의 부족 등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국적만 다를 뿐 흡사한 현실에 양국의 청년들은 크게 공감했다.

우리는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을 뿐이예요.

그로부터 7년이 지났다. 상황은 좀 달라졌을까? 안타깝게도 당시의 청년들이 중년으로 변해가고 있을 뿐 상황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나이를 먹어갈수록 일자리를 찾기는 더 어려워지고, 체력도 달리며, 비정규직 경력만 쌓일 뿐 안정적인 취업은 멀어진다. 정규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들조차 조기퇴직을 당하며 얼마 안 되는 퇴직금으로 요식업(주로 치킨집)에 뛰어들었다 막대한 손해만 보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tvn

청년들이 포기하는 것의 목록도 점점 길어져 ‘3포세대’는 어느덧 ‘5포세대’가 되고, 다시 ‘7포세대’로 진화했다. 일본도 별다르지 않다. 일본의 40대는 스스로를 ‘멸종위기종’, ‘하류중년’이라 부르며 자조한다. 최근 출간된 <98%의 미래, 중년파산>은 이러한 사례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파견직을 고용하는 회사는 파견직을 쓰는 데 법률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아요. 쉽게 고용해서 쉽게 잘라버리는 존재로밖에 보고 있지 않죠.

외국계 의료기기 제조업체에 파견된 아케미는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 않는 상사와 동료들에게 왕따를 당해 쫓겨난다. 두 번째로 파견된 게임회사에서는 본사로부터 일방적인 계약 해지 통보를 받는다. 의류제품 제조사에 파견됐을 때는 계약 내용과 다른 청소 업무와 성희롱에 시달렸다. 연일 이어지는 격무로 기억 장애 증상까지 얻는 등 온몸이 만신창이가 됐다.

이 책에는 아케미의 사례 외에도 인턴을 전전하다 니트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쇼타, 지방 출신이라 차별을 받는 미치코, 구직센터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는 노부스케, 직업 훈련이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았던 아키오 등의 에피소드가 열거된다. 패자부활전이 인정되지 않는 사회, 이들의 힘겨운 ‘각자도생’은 진한 씁쓸함을 남긴다.

하지만, 남의 일만은 아니다. 이 책의 해제를 쓴 오찬호의 말처럼, 등장인물의 이름만 빼버리면 한국과 다름이 없다.

부동산투자업에 종사하던 50대 남성 김 씨는 경기가 어려워져 자금회수 압박에 시달리자 21층 아파트에서 투신했다. 그에게는 아내와 두 자녀가 있었다. 사회안전망의 부재로 한 번 실패하면 재기가 불가능한 한국사회에서, 중년의 실패는 높은 확률로 자살까지 이어진다. OECD 국가 평균 2배에 이르는 수치로 수년간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있는 한국에서, 특히 40~50대의 자살률이 해마다 증가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같은 잿빛 중년, 그리고 파산의 바람을 극복할 방법은 없는 걸까. 이 책의 공저자 아베 아야는 생활보호제도를 보완하고 사회보장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변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더불어 중년의 행복을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은 ‘고용의 질’이 보장되고 ‘자신의 능력과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직장’이 존재하는 사회라고 설파한다.

6일 잡페어에서 연설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 ⓒ연합뉴스

우리는 그런 사회로 나아가고 있을까.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6일 코엑스에서 열린 ‘강소·벤처·스타트업, 청년매칭 2016년 잡페어’ 행사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일부 대기업과 공공부문, 금융부문 노조들은 여전히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하고 있고, 경직된 노동시장을 개혁하려는 노동개혁 법안들은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최근 성과연봉제 도입에 반대해 파업에 들어간 노동계를 비판한 것이다.

정부는 청년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성과연봉제를 도입한다고 했다. 듣기에는 합리적일지 모른다. 하지만 사회적 합의도, 명확한 기준도 없이 막무가내로 밀어부치는 ‘성과평가’는 단지 해고를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는 결국 고용 불안과 세대갈등을 더 심화시키고 중년의 파산을 야기할 뿐이다.

‘중년파산’이라 이름붙였지만 이건 비단 한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청년도 노년도, 모두가 중년을 거쳐간다. 그리고 중년은 언제나 국가 경제의 허리를 떠받친다. 그러니 중년의 파산은 모든 세대를 서서히 병들게 만들 심각한 문제다. 하지만 이 사실을 무시하고 고용시장의 불안을 청년과 중년의 세대갈등으로 비화시키는 건, 결국 모든 세대의 분노와 좌절을 부채질할 뿐 누구의 삶도 개선하지 못한다.

그들이 쥔 정규직 일자리 하나를 '기득권'이라 표현하는 대통령의 발언이 위험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국가의 책무는 국민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현실을 타개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기만이 지속된다면 곧 우리의 미래가 될 일본의 현실을 담은 책, <98%의 미래, 중년파산>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단한 거대 담론이 아니라 '이 사회라면 모두가 안심하고 평범한 삶을 유지해나갈 수 있다'는 간명한 메시지라고.

일본의 로스트 제너레이션, 그리고 한국의 88만원 세대와 절망한 중년. '평범한 삶'이 꿈이 되어버린 이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그리고 부모가 꿈꾸는 '평범한 삶'의 맛조차 보지 못한 그들의 아래 세대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이 위험은 한 세대만의 비극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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