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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아재개그가 그리운 이유

  • 입력 2016.08.30 10:55
  • 기자명 북클라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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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잘하는 것과 말재주는 다른 것이다. 국가 지도자의 말은 말재주 수준이 아니고 사상의 표현이고 철학의 표현이다. 가치와 전략, 철학이 담긴 말을 쓸 줄 알아야 지도자가 되는 법이다.” –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에 노무현 대통령을 그림자처럼 수행했던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이 최근 펴낸 <대통령의 말하기>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2002년 대통령선거가 한창 진행 중일 때의 일화다.

노무현 후보가 유세하는 도중 어떤 유권자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이마 주름이 TV에서 본 것보다 적네요.”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가 대답했다.

“네, 아침에 다리미로 좀 펴고 나왔습니다.”

이 에피소드를 읽고 나니 요즘 유행하는 ‘아재개그’가 원래는 노무현 대통령의 아이템이구나 싶었다. 미국 토크쇼의 전설인 래리 킹은 특유의 유머를 활용해 ‘대화의 신’의 자리에 우뚝 섰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방송인 김제동도 촌철살인의 위트로 대한민국을 위무하고 있다. 이처럼 말 잘하는 사람의 공통점으로 ‘유머’를 꼽을 수 있다. 하물며 말로 밥 먹고 사는 정치인이라면 오죽하랴.

지난 5월 1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 출입기자단 연례만찬 연설에서 유머감각을 뽐냈다. 트럼프를 둘러싼 공화당의 내분을 꼬집으며 말문을 연 그는, 힐러리를 향해 “이제 막 페이스북 계정을 만든 이모를 보는 느낌”이라며 그녀의 나이를 우회적으로 풍자했고, 트럼프를 겨냥해서는 “트럼프가 외교정책 경험이 없다고 하는데 그는 숱한 세계 지도자들을 만났다. 미스 스웨덴, 미스 아르헨티나…”라며 트럼프가 미스유니버스 조직회를 인수해 운영해 온 것을 조롱했다.

대중강연에 익숙한 강사들은 청중을 사로잡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유머를 강조한다. 강연 도중 5분에 한 번씩은 사람들을 웃기라는 것인데,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좋은 콘텐츠라도 꼰대처럼 고리타분한 말투로 이야기한다면 청중들은 십중팔구 졸기 십상이다. 하지만 소름 끼칠 것 같은 긴장이 있거나, 가슴 찡한 사연이 있거나, 빵빵 터질 만큼 재미있는 내용이 연속될 때 사람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경청한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최고의 달변가가 아닐까.

2004년 5월, 탄핵으로 인한 직무정지가 끝나고 업무에 복귀한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 녹지원에서 주한외교단과 다과를 나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센스 돋는 유머를 날린다.

“여러분의 한국에서의 생활이 즐거우리라 생각합니다. 문화·기후·자연 등의 다양성에 대해 높게 평가할 것입니다. 한국에는 다른 나라에 주재하면서 볼 수 없는 또 다른 구경거리도 있었습니다. 부활은 예수님만 하시는 건데 한국 대통령도 죽었다 살아나는 부활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셀프디스도 서슴지 않았다. 2004년 5월 연세대에서 열린 리더십 특강에서는 대학생들을 상대로 이렇게 말했다.

“그 다음에 뭐했냐? 사랑하고, 아이 낳고… 지금은요, 손녀가 참 귀엽고 이쁩니다. 뻔하지요. 아무리 이뻐봤자 고 물씨(색깔을 내는 데 바탕이 되는 물질)가 있습니다. 한계가 있지요. 저를 보고 상상을 하십시오. 제 희망은 저보다 예뻤으면 좋겠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구사하는 유머의 원천은 무엇일까? 우선, 위의 사례에서 보듯이 주저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는 모습이다. 때로는 망가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낮은 사람’으로서, ‘친구 같은 대통령’이 되어 스스로를 낮췄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으로부터 명예교수 위촉장을 받을 때는 “교수가 위촉장을 읽지 못해 큰일”이라고 좌중을 웃기기도 했고, 미국 방문 당시 코리아 소사이어티 초청 연설에서는 “한국에서는 보통 키인데 여기 와서 작아졌다”는 애드리브도 시전했다.

사실 정치인 노무현은 설화(舌禍)를 많이 겪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대중적 언어의 활용이 큰 몫을 했다. ‘현장의 용어’를 중시한 그는 다소 거친 표현을 예로 드는 경우가 있었는데, 2003년 7월 민원제도개선 담당공무원과의 오찬 자리에서의 그가 한 말을 살펴보자.

“민원인들이 ‘개새끼들! 절반은 잘라야 한다’는 얘기도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이 말은 다음날 맥락이 없어진 채 부분만 확대되어 일간지 1면을 도배했다. 이에 그는 다음과 같이 섭섭함을 토로했다.

“사전 배경설명 잘하고 적극적으로 접촉한다 해도 이런저런 질문을 유도하고, 꼬투리 달린 질문을 통해 거꾸로 이야기되고 보도된다. 1시간 동안 열나게 강의를 했는데 인용한 게 더 크게 보도된다. 예를 들면 ‘개새끼’ 같은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지론은 ‘독재자는 힘으로 통치하고 민주주의 지도자는 말로써 통치한다’였다. 말 그대로 민주주의 시대의 대통령은 독재자처럼 밀실에서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열린 마당에서의 대화와 토론으로 국정을 이끌어간다. 결국 말은 대통령의 통치수단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낸 이가 경찰청장이 되고, 비리로 점철된 자는 여론의 사퇴요구에도 요지부동이다. 대화와 토론은 커녕 아버지의 구태를 답습하는 지경이다.

이에 반해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듣기 쉬운 표현, 이해하기 좋은 비유를 써서 국민들의 공감을 사려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배려는 이제 더 이상 들을 수가 없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7년, 대한민국은 헬조선이 되었고 국민들은 ‘혼이 비정상’이며 ‘개돼지’ 취급을 받고 있다. 2007년 1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을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일컬었었는데, 누가 더 나쁜 대통령일까. 노무현의 아재개그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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