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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협상, 한국 정부는 왜 자꾸 후퇴하는가?

  • 입력 2016.08.03 14:55
  • 수정 2016.08.03 14:56
  • 기자명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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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고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 8월 자신이 위안부였다고 밝힘으로써 세상에 드러났다. ⓒ 뉴스타파

1993년 8월 4일 일본 자유민주당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의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은 ‘위안부 관계 조사결과 발표에 관한 담화’(이하 ‘고노 담화’)를 발표한다. 그는 전시 운용된 일본군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으로 설치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관리 및 위안부 이송에 관해 구 일본군이 관여하였다고 발표한다. 동시에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사과도 빼놓지 않았다. 일본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군의 강제성을 자백한 사건이었다.

고노 담화, 위안부 문제에 군의 강제성 인정

고노 담화는 일본군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강제성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가해 주체를 정부가 아닌 군으로 한정했지만, 담화의 기본 인식은 일정 부분 진전된 것이었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운용의 강제성을 인정한 것은 고 김학순(1924~1997) 할머니가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밝힌(1991년 8월) 지 꼭 2년 만이었다. 고노 담화는 김학순 할머니가 진실을 밝힌 뒤, 1992년 1월 일본 총리 미야자와 기이치가 한국을 방문하여 사죄 의사를 표명하고 7월에 가토 고이치 관방장관이 1차 정부조사 결과를 발표한 데 이은 후속 조치였다.

이듬해 1994년 8월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 총리대신은 담화를 통해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민간 기금을 설립하여 위문금을 지급하는 구상을 발표한다. 이는 한일기본조약으로 대일 청구권이 소멸한 뒤라 일본 정부의 이름 대신 재단을 설립한 뒤 기부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1년 뒤인 1995년 7월 일본 총리부와 외무성은 ‘재단법인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이하 ‘국민기금’)을 설립한다. 기금 설립에 참여했던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전제로, 법적 책임론이 아니라 도의적 책임론에 기초한 국민적 보상의 길”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자 운동에 앞장서 온 한국의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국민기금에 강하게 반발했다. 국민기금이 일본 정부 차원의 보상이 아니라 위로금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위안부 피해자도 이에 동의했다. 대신 정대협은 1996년 10월부터 범국민 모금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생계를 지원하려 했다.

그러나 1997년 1월 일본 정부는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 7명에게 의료지원금 포함 1인당 500만 엔(약 7250만 원)의 위로금 전달을 강행했다. 이후 정대협은 1998년 5월부터 자신들의 모금액과 정부 예산을 합쳐 위안부 피해자 1인당 4300만 원의 생활안정 지원금을 지급했다. 문제는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국민기금을 받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게 한 것이었다. 그 결과 국민기금을 받은 할머니들은 정부 지원 대상에서 제외가 되었다.

국민기금, 당사자 반대에도 위로금 전달 강행

국민기금 수령 여부에 대한 논란으로 위안부 피해자 사이에선 분열이 생긴다. 그 상처로 일부 할머니들은 정대협을 불신하게 되었고, 일본에는 한일협정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노력했다는 면죄부를 쥐여 주었다.

국민기금은 계획된 보상 사업이 종료되는 2007년 3월에 해산되었다. ‘태평양 전쟁 중 일본에 의하여 강제로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되어 피해를 당한 여성들에 대한 보상 사업과 여성의 명예와 존엄 등에 관련된 현재의 문제 해결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지만, 적어도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에게 보상, 명예, 존엄 대신 상처만을 남겼다.

고노 담화는 그 내용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최소한의 책임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인식을 보여줬다. 일본의 보수, 극우 세력으로부터 부정당하기도 했지만, 아베 정부의 검증 논란이 시작될 때까지는 이는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었다.

▲ 야스쿠니신사 참배와 평화헌법 수정, 위안부 문제 탈출은 아베가 추구하는 역사수정주의의 일부다.

고노 담화는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언급되는 이른바 ‘무라야마 담화’와 짝을 이루면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인식의 진전된 일면을 드러내고 있었다. 무라야마 담화는 1995년 8월 15일 내각회의의 결정에 근거하여 총리대신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발표한 것이었다.

무라야마 담화와 아베의 역사수정주의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이 태평양 전쟁과 전쟁 이전에 행한 침략이나 식민지 지배’에 대해 공식적인 사죄를 표명했다. 또한, 일본에서 줄곧 논란이 돼 온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도 없는 역사적 사실’이라 지적하고 있다.

담화는 침략 전쟁을 직접 사죄하는 대신 어디까지나 전쟁 중에 돌발적으로 일어난 침략 행위에 한정된다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그런데도 무라야마 담화는 이후의 정권에도 계승되어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역사적인 견해로 인용되곤 했다.

국민기금이 해산될 무렵, 아베 신조 1차 내각은 고노 담화와 관련한 각의(국무회의)의 결정을 발표했다. 그것은 “정부가 찾은 자료 가운데 군이나 관헌에 의한, 이른바 강제 연행을 직접 나타내는 기술은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고노 담화는 일본 정부에 의해 부정되기 시작한다.

이어 2012년 8월 아베 당시 자민당 총재는 <산케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재집권하면 고노 담화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천명한다. 2년 뒤인 2014년 2월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고노 담화 검증 방침을 밝힌다.

그러나 한 달 뒤 아베는 “고노 담화 수정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말을 바꾼다. 아베가 공개석상에서 담화 수정 의지가 없다고 밝힌 것은 취임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는 역사 인식과 관련해 갈등을 빚고 있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 개선이 긴요하다는 미국의 요구를 고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베 정부는 6월 20일 고노 담화 검증 결과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 보고하는 형태로 공개했다. 보고서의 요지는 담화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한일 정부 간의 문안 조정이 있었다’는 것과 양국 정부가 문안 조정 사실을 공표하지 않기로 협의했다는 점 등이었다.

이는 고노 담화의 내용이 사실에 근거라는 대신 외교협상의 결과물이라 시사하며 담화의 의미를 깎아내리자는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사실관계가 정확하지 않은 내용을 서둘러 발표한 것은 또 다른 역사 왜곡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일 위안부 협상 타결,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

고노 담화 검증은 아베 정권이 추진하는 역사 수정주의 작업의 일환이었다. 아베가 일관되게 천착해 온 것은 ‘일본의 패전으로 형성된 질서를 부인하는 것’이었다. 도쿄 전범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처벌받은 14명의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평화헌법 수정, 위안부 문제로부터의 탈출은 따로 분리될 수 없었다. (<한겨레(2014.6.20.)> 사설)

▲ 박근혜 정부는 일본과의 협상을 통해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을 확인'했다.

아베의 고노 담화 검증 1년 6개월 후인 2015년 12월 28일 박근혜 정부는 일본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협상을 타결한다. 우리나라 정부는 이 문제를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2016년 8월 현재 이 합의는 ‘피해자가 빠진 일방적이고 불완전한 합의’로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불가역적 해결’이라고 규정했지만, 문제의 종결은커녕 새로운 불씨에 가까운 것이었다. 지난 7월 28일 정부는 당사자들과 시민단체, 대학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화해·치유재단’의 출범을 강행했다.

위안부 할머니들과 시민단체 등은 이에 맞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으로 맞섰다. 화해와 치유를 위해서라도 정의를 세우고 그것을 기억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 정의기억재단의 입장이다.

‘화해·치유 재단’은 1995년 설립했다 실패한 일본의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보다 여러모로 후퇴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국민기금이 위안부 문제를 역사에 남기는 자료 발굴 작업 등도 진행한 데 반해 화해·치유 재단은 10억 엔을 의료비·위로금 등으로 직접 나눠주는 ‘피해자 직접 수혜 사업’에 집중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 보기)

일본이 출연하는 10억 엔을 위안부 피해 사실을 신고한 238명(생존자 40명)에게 일괄 분배하면 1인당 4,277만 원꼴이다. 이는 국민기금 당시에 정부가 특별지원금으로 지급한 4,300만 원보다 적은 액수다. 피해자 할머니들이 요구해 온 기념관을 세울 돈도 없는 상태고 재단의 운영비용도 우리 정부가 대야 할 판이다.

▲ 지난 7월 27일 열린 제1241차 정기수요시위 현장에는 1천 명이 모여 '위안부 합의 폐기'를 요구했다.

재단 설립에 맞추어 일본의 10억 엔 출연이 이어지겠지만, 일본의 ‘평화의 소녀상’ 철거 요구도 커질 것이다. 그러나 오는 8월 9일 경기도 군포시에 서른 번째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질 예정이니 이미 평화의 소녀상은 기억 투쟁의 상징물이 된 셈이다. 당사자를 빼고 진행된 졸속 한일합의의 덫에 빠진 정부는 이제 일본이 아니라 피해 당사자와 여론을 상대로 싸우게 되었다.

해방 48년 만에 불완전하나마 진전된 식민지 인식을 표명했던 고노 담화는 2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정의를 위한 기억 일부가 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위안부 문제로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 정부와도 싸우게 됐다. 해방 71년 한 분 두 분 유명을 달리하고 있는 피해자 할머니들 앞에서 우리가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일본의 진보 일간지 <아사히>는 1991년부터 종군 위안부 문제 연재 캠페인을 전개했다. <아사히>는 과거 제주도에서 많은 여성을 강제로 끌고 갔다는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그러나 요시다 증언을 허위라고 판단한 <아사히>는 2014년 요시다 증언에 관한 모든 기사를 취소했다. 연말에는 요시다 증언이나 종군위안부 보도를 둘러싼 일련의 허위 날조 보도의 책임을 지고 사장이 사임했다.

이에 대해 보수·우익 세력은 고노 담화의 근간이 무너졌다며 <아사히>를 공격했다. 하지만 <아사히>는 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즉, 강제적인 성 노예가 인신매매의 형태로 존재했다는 핵심적 사실이 아직 유효하며 거짓 증언의 확인으로 오해될 수 없다는 견해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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