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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행 리뷰 : “Girls do not need a prince”

  • 입력 2016.07.25 15:41
  • 수정 2016.07.25 18:42
  • 기자명 정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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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 이 기사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재미있다
. 좀비매니아로서 보건데 부산행은 어지간한 외국 좀비물과 비교해도 빠지지 않을 긴장감과 호러 액션을 보여준다. 화끈한 킬링타임용 액션에 한국인이 사랑하는 신파까지 버무려진, 잘 만든 한국형 신파 좀비극이다. 이렇게 만들고 천만을 못 넘기는 건 이상한 일이다.

온갖 서구 좀비물의 클리셰로 범벅된 장면들은 그럭저럭 참을만하다. 2016년에 참신한 좀비물이란 있을 수 없으니까. 그것보다 많은 사람들의 짜증을 자아낸 것은 엉성하게 삽입된 신파들이었다. 차라리 '나는 전설이다'에서 좀비끼리 보여준 신파가 더 슬펐다는 것 정도로..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실패한 신파보다 더 큰
문제는 그 신파를 풀어내는 방식이다. 부산행의 신파는 아주 간단한 성별역할 공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자가 여자를 보호하고, 여자는 남자의 보호를 받는. 그런데, 좀비대란이라는 극한 설정을 감안하더라도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성별 역할은 좀 많이 구리고 억지스럽다.

내가 본 한국영화 최악의 신파는 '화려한 휴가'에서 남주(김상경)가 여주(이요원)를 벌판에 내려 놓고 혼자 도청으로 향하는 장면이다. 함께 계엄군과 싸우러 가는 줄 알았던 이요원은 알 수 없는 벌판에 강제로 하차당한 채 사태가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서 엉엉 울기만 했다.


화려한 휴가 스틸컷

우리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순간에서 조차 여성의 역할을 구경꾼으로 격하시킨 이 장면은 정말 구역질이 날 정도로 두고두고 역겨웠다. 한국 영화가 (헐리웃이라고 많이 다르지는 않지만) 여성을 대하는 태도는 대개 이런 식이다.

그만큼은 아니지만, '부산행'의 신파도 봐주기 힘들 정도로 구리고 억지스러웠다.


너는 대체 왜 나온 거니?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자 캐릭터들은 그야말로 울고 짜는데 특화된 민폐녀들이다. 특히 역대급 발연기를 선보인 소희의 캐릭터는 의존적이고 수동적이며, 감정적이고 멍청하기까지 한, 그간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했던 온갖 민폐녀의 특성을 고루 갖추고 있다. 등장 자체가 의문인 이 캐릭터는 좀비로 변하기까지 짤순이 처럼 눈물 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좀 더 빨리 물렸다면 좋았을 뻔 했다.)

마동석의 와이프 정유미 역시 한없이 무기력한 민폐녀의 전형이다. 영화의 마지막 생존자인 그녀의 생명력은 마동석과 공유, 그리고 노숙자의 순차적인 보호(희생)를 통해 이어진다. 정유미는 종종 마동석에게 왜 이제 왔어 새끼야라며 거친 말을 내뱉지만, 볼일 볼 때조차 마동석의 호위를 필요로 하는 그녀의 막말은 그저 귀여운 투정일 뿐이다.



영화 속 1등 가부장으로 분한 주인공들. 공유, 마동석

반면 영화의 남주 마동석과 공유, 최우식(야구부)은 남성 특유의 피지컬과 책임감으로 부녀자들을 보호한다. 그들이 우글거리는 좀비들을 뚫고 화장실에 갇힌 여자와 아이를 구하는 씬은 이 영화에서 가장 스펙타클한 장면이다.
좀비들과 맞짱을 뜨던 도중 남자들끼리 모인 화장실에서 마동석은 남자의 역할과 희생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다. 남자는 원래 그런 거야. 왜 말이 좀 멋있냐?”며 너스레를 떨며 끝내는 마동석의 이 연설은 너무도 숭고하고 매력적이어서 누구라도 흠뻑 취하게 만든다. 바로 이것이 영화가 가부장제이데올로기에 부역하는 방식이다.

부계 사회에서 자녀의 이름을 짓는 건 가부장의 고유 권력이다. 영화 초반부 정유미는 마동석을 향해 “(애 아빠가) 아직 애 이름도 못지었어요라고 비아냥대며 제 뱃속에 있는 아이의 이름을 지을 권한이 스스로에게 없음을 고백한다. 이는 마동석이 가부장의 역할을 잘 수행하지 못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질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마동석은 좀비에게 물려 변신하기 직전 마지막 순간 우리 딸 이름은 oo을 외치며 가부장의 역할을 극적으로 완수한다. 목숨을 걸고 부녀자를 지킨 뒤 마지막 책임을 완수하고 떠나는 가부장의 모습. 부계 세계관에서 이보다 아름다운 판타지는 없다.


세상을 구하는 여전사로 분한 밀라 요보비치. 레지던트 이블3 스틸컷

이 영화는 남성의 완력이 빛을 발하는 극한의 상황을 설정하고 거부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를 설파한다. “거봐. 결국 세상을 구하고 여자를 지키는 건 남자들이라고으스대듯. 그러나, '레지던트 이블'의 밀라 요보비치와 '부산행'의 소희가 다르듯, 같은 좀비 세상을 그려도 화자의 세계관에 따라 남녀의 역할은 다르게 설계된다. 영화 속 상상은 현실을 떠나 존재하지 않으며, 상상이라는 건 누군가의 생각에 녹아든 이데올로기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남녀의 역할은 시종일관 전형적이다
. 심지어 영화 내내 여자 주인공과 함께 민폐 케릭터로 그려지던 노숙자조차 결정적 순간 제몸을 던져 여자와 아이를 구하고 잠재돼있던 남성성을 발현한다. 남성들의 보호(희생)에 의해 살아남은 여자와 아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에게 총구를 겨누던 남자 군인들의 손에 의해 생사여탈이 결정된다.

혼자서는 울고 불며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 힘없는
노숙자에게까지 보호받아야만 견뎌낼 수 있는 나약하고 의존적인 존재, 그게 이 영화에서 그려진 여성관이다. 2016년 좀비영화에서 이수일과 심순애 시절 신파 케릭터를 만나는 건 좀 많이 민망하다.

부산행 한줄평: 영화가 가부장제에 부역하는 방식을 잘 보여준 영화.
연상호 감독에게 해주고 싶은 말:
“Girls do not need a pri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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