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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단호한 과거사 청산, 그렇지 못한 한국

  • 입력 2016.07.24 16:29
  • 수정 2016.07.24 16:30
  • 기자명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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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용우 동덕여대 교수의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역사비평사, 2008)[서평 : 뉴라이트·조중동에 프랑스를 가르칩니다]와 2009년 한국프랑스문화학회 추계학술대회에 발표된 이학수 해군사관학교 교수의 논문 <카뮈와 모리악의 그랑 데바- 대독협력자 처벌을 중심으로 ->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 휴전협정 후 히틀러와 만난 비시 정부 수반 페텡 총리(1940년 10월 24일)



1951년 7월 23일 프랑스 비시(Vichy) 정부의 수반 앙리 필립 페탱(Henri Philippe Pétain, 1856~1951)이 95살을 일기로 삶을 마감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의 무훈으로 한때 ‘프랑스의 국부’로 칭송받았던 페탱은 자택의 침실에서가 아니라 대서양 되섬(Ile d'Eu)의 요새 감옥 독방에서 눈을 감았다.

1차대전 프랑스의 영웅, 감옥에서 죽다

나치의 부역으로 프랑스 영웅에서 ‘민족 반역자’가 되었던 페탱의 죽음은 만만찮은 역사적 의미가 있다.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의 한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페탱은 1916년 제1차 세계대전 중 베르됭(Verdun) 전투로서 독일 육군을 패퇴시켜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하지만 그런 공적에도 불구하고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 재판에 회부된 페탱 원수



페탱은 베르됭 전투에서의 활약으로 1918년 프랑스 제3공화국군 원수로 승진하며 1920~30년대 프랑스의 주요 인물로 떠올랐다. 1940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였을 때 그는 부총리였다.

패전이 자명해진 상황에서 휴전 협정을 주장한 페탱은 6월 16일 신임 총리가 되어 새 내각을 구성하고 독일에 정식으로 휴전협정을 요구했다. 페탱은 독일과의 전쟁보다는 항복이 낫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6월 22일 맺어진 휴전협정은 사실상 항복조약이었다. 독일 강점기의 비시 정부가 대독 협력 체제가 된 것은 이 협정에 따른 것이었다. 협정에 따라 수도 파리를 포함해 프랑스 영토의 북부 절반은 독일군에 점령됐다. 프랑스 정부는 비점령지역의 도시 가운데 중부의 휴양도시인 비시를 수도로 선택했다. 페탱 정부를 ‘비시 정권’(1940년 6월 16일~1944년 8월 25일)이라 부르는 이유다.

이후 페탱 정부는 프랑스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주장하며 나치 독일과 협력했다.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협력정책을 수행했다. 독일이 요구한 노동력 징발에는 18~50세의 모든 남성과 만 21~35세의 모든 독신 여성을 강제 징발할 수 있도록 한 의무노동제로 화답했다.



비시 정부의 적극적 나치 협력

비시 정부의 가장 악명 높은 대독 협력은 나치 독일의 적을 체포·처벌·제거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적은 레지스탕스, 공산주의자, 프리메이슨 단원, 유대인 등이었다. 비시 정부는 기존의 법 절차와 무관하게 레지스탕스를 탄압할 수 있는 사법기구로 특별재판부를 설치했다. 또한, 레지스탕스 활동의 보복 조치로 독일군 당국이 처형할 프랑스인 인질 명단을 작성하는 일도 수행했다.

특히, 1942년 여름의 협력은 끔찍한 결과로 이어졌다. 비시의 경찰은 프랑스 주둔 독일 친위대와 협약을 맺고 대대적 유대인 검거에 나선 것이었다. 이때, 프랑스 경찰이 검거하여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간 유대인은 7만6천여 명이었다. 그중 생존자는 단 3%에 불과했다.

▲ 파리를 점령한 독일군. 뒤에 개선문이 보인다.



▲ 프랑스를 점령한 뒤 파리에 입성한 무솔리니(왼쪽)와 히틀러(가운데)



그러나 비시 정부의 적극적인 협력은 정작 국가에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연합군이 횃불 작전으로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직후인 1942년 11월 11일, 나치가 안톤 작전이란 작전명으로 프랑스 남부를 점령해 버리자 비시 정부는 모든 권력을 상실한다. 비시 프랑스는 명맥은 유지했지만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노르망디 상륙 후 연합군이 프랑스 지역을 재빠르게 탈환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프랑스 내 독일군은 고립되거나 철수를 시작했다. 모든 친독일계 경찰들도 자취를 감췄다. 1944년 8월 25일 폰 콜티츠 독일군 사령관이 항복하면서 수도 파리가 해방되자 자유 프랑스 정부의 드골(de Gaulle) 장군이 파리에 입성했다. 드골은 임시정부 대통령 자격으로 나치 협력자들을 정리하겠다고 발표했다.


▲ 1944년 8월 25일 폰 콜티츠 독일군 사령관이 항복하면서 수도 파리가 해방되었다.



▲ 1944년 8월 26일, 파리에 입성하고 있는 자유 프랑스 망명정부의 드골 장군



나치 협력자들에 대한 드골의 방침은 확고했다. 드골이 규정한 민족반역자는 프랑스의 패배를 악용한 투항주의자들, 프랑스 국민을 악의 길로 이끈 비시 정부의 고위 공직자들과 추종자들, 나치의 승리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협력한 프랑스인이었다.

국가가 애국적 국민에게는 상을 주고 민족 배반자나 범죄자에게는 벌을 주어야만 비로소 국민을 단결시킬 수 있다.
나치 협력자들은 정치적 결정, 주로 정치활동과 때로는 군사행동 그리고 행정조치 및 언론의 선정활동 등의 변화무쌍한 형태로 프랑스 민족의 굴욕과 타락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의 박해마저도 미화했다.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나치 협력자들의 엄청난 범죄와 악행을 방치하는 것은 국가 전체에 전염하는 흉악한 종양들을 그대로 두는 것과 같다.
2차대전 직후 드골은 나치 협력자에 대한 단호한 단죄에 나섰다. 대다수 프랑스 시민들은 이를 지지했다. 드골은 나치 협력자 문제는 개개인의 과오 여부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재확립, 군국주의자들과 그 공범자들 및 그 사상의 청산, 그리고 민족반역자 청산문제라고 보았다.

1944년 8월 25일 파리 해방 전후의 부역자 처벌은 재판을 통한 사법적 숙청 이전에 약식 처형과 여성 부역자들의 머리를 깎는 삭발식 등의 초법적인 형태로 시작되었다. 이어진 재판을 통한 처벌은 드골 정부의 부역자재판소, 공민재판부, 최고재판소 등의 법령·기구에 의해 계속되었다.


▲ 프랑스의 부역자 처벌은 사법적 단죄 이전에 약식 처형과 여성 부역자들의 삭발식 등으로 진행되었다.



사법 숙청은 약 35만 명의 대독 협력 혐의자 가운데 12만 명 이상을 재판에 회부시켰다. 그중 약 3만8천 명이 유무기의 징역이나 금고형을 받았다. 총 6천여 명이 부역자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정규 법정 밖에서 약식 처형된 이가 9천 명이었던 데 비해 합법적으로 처형된 사람은 약 1,500명이었다. 공민권 박탈형만 선고받은 이도 5만여 명에 이르렀다.



프랑스의 단호한 부역자 단죄

가장 극단적인 대독 협력을 벌였던 언론인과 문인에게 중형을 선고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문인과 언론인이 첫 번째 숙청 대상으로 오른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들은 국민에게 가장 증오받는 부역자들이었다. 그 결과 파리의 한 부역자재판소에서 재판 받은 작가·언론인 32명 중 12인이 사형선고를 받고 그 중 7인이 처형되었다.

숙청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비시 정부의 핵심지도자였던 국가수반 페탱과 총리 라발의 처리였다. 결국, 대독 협력의 주역이었던 라발과 레지스탕스 탄압에 앞장선 민병대 총수 다르낭은 총살되었다. 1차 세계대전의 국민 영웅이었던 페탱도 사형을 선고받았다.

프랑스 해방 뒤 1944년 9월 7일 페탱과 그의 내각은 독일 남부의 소도시인 지그마링엔(Sigmaringen)으로 피신했다. 히틀러는 비시정권이 독일에서 망명정부를 설립하기를 바랐고, 페탱의 육사 후배였던 드골은 페탱이 스위스로 망명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페탱은 귀국을 원하며 1945년에 스위스를 거쳐 프랑스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적대시하는 조국의 돌팔매질을 피할 순 없었다. "늙은 반역자를 처형하라, 페탱을 사형대로!"라고 외치는 2천여 명의 시위대와 마주쳐야 했다.


▲ 카뮈와 모리아크는 부역자 단죄에 대한 입장이 엇갈렸다.



페탱은 파리 남쪽의 몽루즈 감옥에 수용됐다. 그의 역사적 재판은 1945년 7월 23일 시작되었다. 유럽의 모든 대중매체는 페탱 재판의 모습을 전하기 위해 파리로 몰려들었다. 부역자 단죄를 두고 관용과 용서를 주장한 작가 프랑수아 모리아크(1885~1970)와 정의를 위한 단죄를 주장한 알베르 카뮈(1913~1960)의 논쟁이 재연되었다.



사형선고와 종신형 감형

모리아크는 "우리들의 일부가 이 노인의 공모자일지 모른다"며 조금도 물러서지 말자고 호소했다. 반면 카뮈는 <콩바> 지의 사설에서 그의 나이와 자만심의 술책에 현혹되는 프랑스인은 결코 없을 것이라며 엄정한 재판을 요구했다.

페탱은 재판 내내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리고 최후진술에서 ‘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읽었다.
본인은 이 재판과정에서 자의적으로 침묵을 지켰습니다. 이러한 내 태도에 관한 이유를 본인은 이미 국민에게 설명했습니다. 내가 끝까지 집착한 유일한 생각은 국민과 함께 프랑스 땅에 영원히 남아 사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국민을 보호하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무슨 일이 일어나도 프랑스 국민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베르됭을 사수했듯, 프랑스를 지켰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 본인의 의식은 내 자신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본인이 일평생 봉사한 프랑스에 마지막 인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최고재판소는 형법 75조와 87조 위반으로 페탱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국가반역죄(75조)와, 외국에 유리한 정보를 제공한 간첩죄(87조)는 모두 최고형이 선고될 수밖에 없었다. 배심원들은 반대에 13표, 찬성에 14표를 던졌고 한 표 차이로 사형이 결정되었다.

프랑스 국민이 페탱보다 더 증오했던 피에르 라발 총리의 구명운동을 폈던 모리아크는 <르 피가로>에 보낸 논평에서 “그의 찬미자이든, 반대자이든 간에 우리 모두에게 절반은 배반자이여, 나머지 절반이 희생자인 비극적 모습이 앞으로도 계속 남게 될 것이다”라고 술회했다.


▲ 페텡은 대서양 연안의 되섬의 요새감옥 독방에서 복역하다 사망했고, 거기 묻혔다.



페탱의 사형 집행의 유예가 결정되었다. 드골은 사형 결정을 보고받자마자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페탱은 1945년 11월 14일 대서양의 되섬(Ile d'Eu)의 감옥에 이송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5년 8개월 간 복역하다가 1951년 7월 23일 사망했다.

페탱은 사후에도 논쟁의 중심이었다. 1951년 ‘페탱 원수를 추억하는 조직’이 결성됐고 페탱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프랑스 내 좌우 양 진영은 충돌했다. 어찌 됐건 프랑스인들은 페탱의 비시정부가 나치에 협력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 했다. ‘비시 신드롬’이라 불릴 만큼 치유하기 어려운 트라우마였다.



청산 없는 과거, 한국의 선택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은 우리나라 국민에게 식민지 역사 청산에 대한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우리나라는 36년 가까운 식민지 시대의 역사를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겨버렸다. 심지어 일부 주류 권력층은 일본 덕에 근대화가 신속하게 이뤄졌다며 그 시대를 미화하기도 한다.

과거사 청산은 진실과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그러나 프랑스와 달리 치욕스러운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한국 현대사는 한국인에게 오로지 국가와 민족의 이해가 아니라, 일신의 안일과 행복을 위해 시대와 힘에 기꺼이 순응하라고만 가르칠 뿐이다.


▲ 이용우 저(역사비평사, 2008)



1998년에 나치 협력자로 심판대에 오른 비시 정부 당시 보르도 경찰서장 모리스 파퐁의 사례가 시사하는 진실은 아프고 무겁다.

사회당 정부의 장관까지 지낸 파퐁은 비시 정권 아래서 레지스탕스에 도움을 준 것으로 날조해 처벌을 모면했다. 하지만 공소시효가 종료됐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 있던 유대인들을 독일로 넘긴 사실이 드러나면서 법정에 서야 했다.

당시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고 있던 유대인들을 사지에 몰아넣은 행위는 중범죄였기 때문이었다. 모리스 파퐁은 90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1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무려 반세기 전에 나치에 부역한 일로 처벌을 받은 것이다.

<르몽드> 기자가 한 중학생에게 “반세기나 지났는데 그를 재판정에 세운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하고 물었다. 이 학생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인간적으론 안 된 일이지만 역사를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만약 한국이었다면 페탱이나 모리스 파퐁은 어떻게 되었을까? 여전히 기득권을 유지하며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지 않았을까?

나라를 팔아 먹고 식민지 청년에게 일제의 침략전쟁 참전을 권유한 이 나라의 지도자들을 보라. 그들은 반민족행위자로 <친일인명사전>에 올랐지만, 그 허물은 해방 이후 조국 근대화에 이바지한 공적으로 고스란히 가려졌다.

국군 고위 간부가 된 일본군이나 만주군 장교 출신의 부역자들은 어떠했는가. 간도 지역 내 항일세력 토벌을 위해 관동군이 만든 특별부대인 간도특설대 출신의 백선엽과 김백일은 지금도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기려지고 있다.

36년 피지배의 역사를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리려는 일련의 시도들이 집요하게 이어지고 있는 2016년의 한국. 해방 71년의 광복절을 가늠해 보며 서가에서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을 꺼내 뒤적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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