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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은 개, 돼지" 나향욱은 실언하지 않았다.

  • 입력 2016.07.22 10:51
  • 기자명 비더슈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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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인사혁신처 중앙징계위원회는 교육부 나향욱 전 정책기획관에 대한 파면 처분을 의결했다. “민중은 개, 돼지로 취급하면 된다.” 영화 <내부자들>에 나왔던 이 대사는, 정작 영화가 아니라 이 고위 공직자의 입을 통해 온 국민이 아는 클리셰가 되었다.

교육부 나향욱 정책기획관. 36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교육부 장관 비서관, 청와대 행정관 등을 거친 이 고위 공무원은 이 발언 하나로 공직자로서의 삶을 끝마치게 되었다. 별다른 재심 청구가 들어가지 않으면, 나향욱 전 기획관은 공직자로서의 신분을 잃는다. 5년 동안은 공직에 취직할 수 없으며, 연금은 절반 수준으로 삭감된다.

하지만 어느 고위 공직자가, 왜곡된 가치관과 그것이 듬뿍 배어있는 발언 때문에 국회에 불려나가고 직장까지 잃어버린 상황에서, 우리는 그 발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민중은 개, 돼지로 취급하면 된다.

나는 신분제를 공고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다 평등할 수는 없으니,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구의역에서 죽은 아이가 어떻게 내 아이처럼 생각되나. 그렇게 말한다면 위선이다.

상하 간의 격차가 존재하는 사회가 합리적인 사회다.

발언이 있었던 날 나향욱 정책기획관이 기자들 앞에서 쏟아냈던 말들이다.

비난의 여론이 들끓었다. 누군가는 분노했고, 누군가는 조롱했으며, 누군가는 조소했고, 누군가는 슬퍼했다. 다양한 감정이 버무려져 여론은 ‘나향욱’이라는, 꽤나 오랜만에 만들어진 공공의 적을 향한 비판을 쏟아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이 발언을 듣고 별로 놀라지 않았다.

생각해 보자. 300명 넘는 국민을 배 안에 놔두고, 그 배가 며칠에 걸쳐 서서히 가라앉는 것을, 그 사람들이 서서히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그 중 단 한 명도 구하지 못한 국가다. 그리고 그 유족의 진상 규명 요구를 ‘시체팔이’라 매도한 국가다. 이 국가가 국민을 어떻게 본다고 생각했는가.

학생과 교사와 민간 역사학자들은 제대로 된 역사를 분별할 수 있는 자질이 없으며, 그 ‘불온한’ 역사관을 타파하기 위해 국가가 직접 역사교과서를 쓰겠다고 나선 국가다. 이 국가가 국민을 어떤 수준으로 본다고 생각했는가.

갓 스물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컵라면 한 그릇 채 비우지 못하고, 달려오는 지하철에 치여 죽어야 하는 국가다. “줄 돈이 없어 보상금을 줄 수 없다”는 사주를 마주해야 하는 현실이다. 이 사회가 우리를 어떻게 취급한다고 생각했는가.

개혁과 변화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온 10만의 군중을 차벽과 물대포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정부다. 복면을 쓰고 시위에 나오면 IS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는 대통령이다. 물대포에 맞고 쓰러져 몇 개월을 중태에 빠져 누워 있는 농민 앞에 고개 한 번 숙이지 못하는 국가다. 이 땅 위에서 무엇을 기대했는가.

세월호 유가족의 살려달라는 외침에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국회에 입장할 수 있는 대통령. 국민적 합의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반대 세력은 ‘종북’과 ‘이기주의’로 몰아세우는 정부. 주민들의 반대 시위에 반사적으로 ‘외부 세력 개입’을 외치는 경찰. 우리가 이 사회에서 사람으로 취급받기를 기대했는가.

민중은 개, 돼지로 취급하면 된다.

나는 이것이 결코 실언이 아니라고 믿는다. 아주 자연스러운 발언이다. 이제까지 국가가 국민을 대할 때 적용되던 아주 당연한 원리다.

'세월호는 단순한 교통사고'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눈에, '유가족이 벼슬이냐'고 소리치는 사람들의 눈에, '미개한 국민'을 말하는 사람들의 눈에 우리가 인간이기를 기대했는가? 적어도 나는 그런 기대를 버린 지 오래다.

물론 나향욱 전 기획관의 파면을 부정적으로 보는 건 아니다. 국가가 국민을 어떻게 취급하는지와 별개로, 이런 발언이 공직자의 입에서 명시적으로 등장했다는 것은 지탄받아야 마땅하다.

우리 사회가 약자를 무시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약자는 무시해도 된다'는 직접적인 발언으로 이어지는 것은 다른 문제다. 정당한 절차를 통해 그에 대한 징계가 결정되었다면 가타부타 말할 여지는 없다.

다만 그에 대한 징계로 모든 것이 끝났으리라는 섣부른 희망은 품지 않는 게 좋겠다는 얘기다.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뿐 이 정부는 “민중은 개, 돼지로 취급해도 좋다”고, 몇 번이나 그 행동을 통해 역설하고 있지 않았던가.

"전국이 강남만 같으면 선거도 필요 없다.”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의 말이다.

“민주주의는 천민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민주주의가 지탱되려면 귀족이 필요하다.” 강원대학교 신중섭 교수의 말이다.


“우리 학교는 명문가 자제들만 들어올 수 있는 명문이 되어야 한다.” 모 로스쿨 교수의 말이다.

“아인슈타인도 한 표, 벙어리 삼룡이도 한 표다. 이게 정상인가. 민주주의는 멍청한 짓이다.” 숭실대학교 남정욱 교수의 말이다.

“여성은 자발적으로 투표를 포기하는 것이 좋다.” <미래한국> 한정석 편집위원의 말이다.

“1인 1표제는 말도 안 된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100표쯤 줘야 한다.” 새누리당 정종섭 의원의 말이다.

이 수많은 망언의 향연을 보면서, 정부가 국민을, 1%가 99%를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기대는 가지기 힘들다.

어쨌든 나향욱 전 기획관에 대한 파면은 의결되었다. 이건 우리 최후의 양심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사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더라도, 여기까지 넘어선 안 된다는 일종의 마지노선 같은. 사회가 약자를 차별하고 민중을 무시하더라도, 최소한 그것이 국가 공무원의 발언을 통해 명시적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는 사회 구성원 전체의 선언이다.

하지만 이 선언이 언제 파기될 지는 알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이 민주주의 최소한의 원칙에 공감하는, 그래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가치를 최소한의 합의점으로 두고 출발하는 시대가 언제 종말을 맞을지는 알 수 없다.

이 사건은 어쩌면 좋은 신호다. 모든 사람이 평등할 수 없다는 발언에 사회 전체가 분노할 수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틀에 많은 사람들이 합의하고 있다는 신호다. 하지만 동시에, 이 사건은 어쩌면 나쁜 신호다. 모두가 평등하다는 규율을 하나둘 명시적으로 부정하기 시작했다는,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을 파기하고 있다는 신호다. 후퇴와 퇴보의 신호다.

우리는 안다. 이 파면으로 모든 것이 끝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앞으로도 이 마지노선을 침범하려는 시도가 계속되리라는 것을. 하지만 우리는 모른다. 우리가 얼마나 오래 이 선을 지켜낼 수 있을지를. 우리 최후의 양심은 마지노선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 선이 누구도 넘어설 수 없는 우리 ‘최후의 양심’일지, 아니면 마지막으로 한 차례 힘을 발휘하고 점차 사라져갈 ‘최종의 양심’일지. 아직은 모른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 선을 지켜낼 수 있을까. 그리고 언제쯤 중세의 구태와 폐습을 뛰어넘고 도약할 수 있을까. 그것도 아직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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