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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고래가 그들을 죽였습니다

  • 입력 2016.07.13 17:40
  • 수정 2020.11.20 10:42
  • 기자명 서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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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글보글>이란 게임 알지?

<보글보글>은 TATIO 사에서 만든

오락실용 게임이야.

공룡이 나와 거품을 쏘며

적을 무찌르는 게임인데

90년대 오락실을 주름잡던

최고 인기게임 중 하나였지.

아마 많이들 해봤을 거야.

꼬꼬마 시절 나는

<보글보글>을 정말 좋아했어.

근데 이 재미난 게임에 빠져 있을 때도

참 정이 안 가는 캐릭터가 하나 있었어.

이거 기억해?

‘유령고래’(Baron von Blubba)

<보글보글>을 해본 사람들은 알 거야.

미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유령고래’를 말이야.

이 녀석이 등장할 때면

배경 음악 템포가 빨라지면서

미션 종료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렸지.

내가 미션을 제때 마치지 못하면

게임은 그대로 종료됐던 거야.

그때 내가 느낀 유령고래는

마치 죽음을 채근하는 저승사자 같았어.

이 녀석이 게임 화면에 나타나면

식은땀을 줄줄 흘리곤 했지.

이제 난 꼬꼬마도 아니고,

당연히 보글보글 게임도 하지 않아.

그런데,

요즘에도 문득 문득 현실에서

유령고래를 발견하곤 해.

지난 7월 4일 장맛비가 쏟아지던 날

경북의 현동우체국에서 집배원 일을 하던 배 씨는

평소처럼 우편배달을 하려고 거리로 나섰어.

억수 비가 내린 도로는 미끄러웠고

시야 또한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었지.

사실 집배원은

장마, 폭설 등과 같은 악천후 시

우편물 배달을 자제하는 방침을

준수해야 한다고 해.

하지만 알잖아?

그건 그저 허울일 뿐인 규정이란 걸 말이야.

집배원 노동 구조는악천후로 인한

우편물 배달 지연을

암묵적으로 허용하지 않았거든.

요즘 배 씨의 업무가 가중된 건

인력감축 때문이었어.

2014년까지 10명의 집배원이

일하던 현동우체국은

2년 새 부쩍 늘어난 할당 가구 수에도 불구하고

집배원 숫자를 7명으로 줄였지.

그러다 보니 배 씨와

다른 집배원들은 시간에 쫓기며

자기 앞에 떨어진 우편물을 처리하기 바빴어.

장마가 오나, 폭설이 오나

주저할 틈도 없이 말이야.

그들에게 유령고래가 나타난 거야

결국, 박 씨는 보이지 않는

유령고래에 쫓기다

도로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차량에 치여 목숨을 잃었어.

그렇게 지난 5년 동안 15명의 집배원이 희생됐지.

(관련 기사- 집배원들 ‘오늘도 우리는 살아남았다’ 게시물 올린 까닭)

다른 이야기도 있어.

지난 6월 27일

삼성전자 하청 에어컨 수리 기사 박 씨는

에어컨 실외기 수리를 위해

서울 강남 지역 한 아파트로 향했어.

현장에 도착한 박 씨는 수리해야 할

실외기 위치를 확인하곤 당황했지.

실외기가 놓인 베란다 밖 난간이

워낙 노후화된 데다

수리 시 그를 지탱해줄

안전벨트를 걸 자리도 없었거든.

수리 건당 수수료를 받는 박 씨는

하는 수 없이 안전벨트 없이

난간에 매달려 작업을 강행했어.

실외기 수리가 많은 여름철은

에어컨 수리 기사에게 성수기이기 때문에

박 씨에겐 단 1건의 출장비조차 아쉬웠던 거야.

이미 오전에

두 번이나 허탕을 치기도 했고 말이야.

유령고래가 박 씨를 쫓고 있었던 거지.

그가 목숨을 내걸고 작업을 해야 하게끔 말이야.

작업 시작 후 얼마 후 결국 노후화된 난간은

박 씨의 체중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어.

그렇게 그는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지.

하청업체 측은 그의 죽음을 두고

“안전벨트를 지급했으나

고인이 착용하지 않았다”며

개인과실이라 주장했어.

하지만 실외기 수리 기사들은

안전 수칙은

헛된 지침일 뿐이라고 입을 모았지.

수리 건당 수당을 받는 수리 기사들은

1분 1초가 생과의 싸움인지라

제대로 된 임금을 받으려면

안전 수칙을 준수하기 힘들다고 말이야.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유령고래가

박 씨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거야.

(관련 기사- [위험사회, 안전벨트는 있나]“시간 쫓기고 사다리차는 비용 부담, 안전수칙 지키며 에어컨 수리 못해”)

지난 6월 1일

롯데리아에서 일하던 20대 박 씨는

오토바이에 시동을 켜고 배달에 나섰어.

그리곤 아주 급하게 오토바이를 몰았지.

교통 신호도 지킬 수 없이 말이야.

해당 롯데리아 점포는

20분 배달제를 시행하고 있었거든.

주문 후 20분 내

배달을 완료해야 하는 20분 배달제는

배달원에게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제도였어.

20분 안에 주문 받은 음식을 만들고,

배달까지 마쳐야 했거든.

그래서 박 씨는 배달을 나설 때마다

20분 배달제라는 유령고래에 쫓겨야 했어.

심적 부담이 얼마나 컸는지

메신저로 친구에게 토로하기도 했지.

결국, 박 씨는 신호를 지키지 않은 택시에 치여

목숨을 잃고 말았어.

이번에도 유령고래가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거야.

(관련 기사- 슬그머니 살아난 ‘시간 내 배달제’…20대 알바의 죽음)

난 아직도 지난 5월에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로

목숨을 잃은 20대 청년 김 씨를 기억해.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죽은 청년 소식에

많은 국민이 함께 울었지.

근데, 그 사건을 보고

궁금한 게 한 가지 있었어.

김 씨는 대체 왜 그렇게 급하게

작업에 투입돼야 했을까?

수사를 맡은 광진경찰서에 따르면

사망자가 목숨을 잃지 않았다면

오후 6시 20분까지

서울 지하철 2호선 을지로4가역에

도착했어야 했다고 해.

그리고, 김 씨는 결국 5시 54분에

죽음을 맞이했지.

경찰은 그가 아무리 빨리 작업을 마쳤어도

제시간 내 다음 수리 현장에

도착하지 못했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어.

죽기 전 김 씨의 마음은 얼마나 촉박했을까.

(관련 자료-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망 사고)

그렇게 유령고래는

많은 노동자의 목숨을 빼앗았어.

유령고래는

열악한 노동 환경에 기생하며 살고 있어.

불합리한 하청 시스템 속에서 자란 유령고래는

노동자 마음속에 들어가

그를 채근하고,

조바심을 느끼게 하고,

죽음으로 내몰고 있어.

우리는 앞에서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이

왜 1분 1초를 전투하듯 업무에 임해야 했는지

왜 끼니까지 걸러가며 작업에 몰두해야 했는지

기억할 필요가 있어.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로 목숨을 잃은 김 씨의 당시 소지품

그들은 어쩔 수 없었던 거야.

위험하단 걸,

어쩌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유령고래에 쫒겨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

지금도 수많은 노동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유령고래에

쫓기며 살고 있어.

우리가 비정규직-하청 노동자들의 인권을,

목숨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유령고래는 사라지지 않을 거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사회엔

수많은 유령고래가 떠돌고 있어.

누군가의 죽음을 채근하면서 말이지.

<2016년 7월에 발행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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