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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뉴욕 트라이앵글 공장, 그리고 구의역 스크린도어

  • 입력 2016.06.23 15:41
  • 수정 2016.06.23 15:47
  • 기자명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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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잘 알겠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뉴욕은 수많은 이민자들이 미국이라는 용광로에 두렵고 설레는 첫 발걸음을 내딛던 항구였어. 영화 <타이타닉>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여주인공이 마침내 도착한 항구가 뉴욕이고, 영화 <대부>에서 마피아에게 가족을 모두 잃은 이탈리아 꼬마 비토 콜레오네도 뉴욕을 통해 미국에 입성하지. 뉴욕 중심가의 마천루부터 뒷골목의 쓰레기장까지, 각양각색의 부자와 가난뱅이가 뒤섞인 대도시 뉴욕의 맨 밑바닥에는 당연히 미국에 갓 건너온 초보 이민자들이 있었단다. ‘자유의 땅’에서 자유로워지고 ‘기회의 땅’에서 기회를 얻기 위해 몸을 던져 일해야 했던 사람들.
1911년 3월25일은 토요일이었어. 뉴욕 맨해튼의 트라이앵글 셔츠웨이스트 공장에서는 대부분 이민자였던 10대 초반부터 20대 중반의 여성들이 그나마 즐거운 마음으로 작업을 하고 있었지. 그날은 오후 5시면 일이 끝나고, 일요일에는 쉴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작업 종료 시간을 20분쯤 남기고 갑자기 8층의 천 조각 더미에서 연기가 솟아올랐어. 연기는 곧 사람 키를 넘어 날름거리는 불길로 변했지. 이 불을 보고 가장 신속하게 반응한 이들은 회사 공동사장 두 명이었어. 그들은 불길을 보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져나가서 긁힌 상처 하나 없이 얌전히 지상으로 내려왔어.
화재가 처음 발생한 8층 사람들은 그럭저럭 대피했고, 10층 작업자들에게도 곧바로 인터폰으로 화재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졌지. 그러나 9층에서 일하고 있던 여성들은 불이 번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제대로 전달받지 못했어. 그들은 뒤늦게 화재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곧이어 불길 이상의 공포와 맞닥뜨리고 말았어. 출입구가 잠겨 있었던 거야. ‘손버릇 나쁜’ 노동자들을 단속한답시고 기업주가 문을 잠가놓은 거지.
불길이 호랑이처럼 덮쳐오는데 ‘No way out(출구는 없다)’이라는 외침보다 무서운 절규가 또 있을까. 설상가상으로 당시 소방차의 소방 호스 역시 6층 이상은 닿지 못했어. 20세기의 가장 번화한 도시 중 하나인 뉴욕 시민들은 창문 밖으로 안타까운 비명을 지르다가 불길을 피해 몸을 던지는 여성 노동자들을 멍하니 지켜봐야 했지. 가까스로 탈출한 사람들도 제대로 걷지 못하고 주저앉았어. 익히 아는 얼굴들이 외마디비명과 함께 자기 옆으로 툭툭 떨어져내렸으니까.


시민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불길에 휩싸인 공장을 지켜볼 뿐이었어. 그러던 중 사람들의 눈에 열서너 살이나 됐을까 싶은 두 소녀가 포착됐다. 그 둘은 손을 꼭 잡고 기도를 올렸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그 기도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들을 수 있었을 거야.

30분도 안 되는 시간에 146명이 목숨을 잃었어. 폴란드, 이탈리아, 그리고 유대계의 이민자가 대부분이었지. 뉴욕 시라는 거대한 피라미드의 맨 아랫돌 밑에 낀 이끼 같은 사람들.
이 사고로 사망한 상당수의 노동자들은 신원조차 밝혀지지 않았다고 해. 요즘 같은 DNA 감식 기술도 없었으니 시커멓게 타버린 사람들의 면면을 어찌 가릴 수 있었겠니. <미국의 소리(VOA)> 방송(2000년 3월30일)에 나온, 어느 희생자의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증언하는 사람은 희생된 여성의 손자야.

할머니는 그린우드 공동묘지에 묻힌 신원미상자들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일터로 향하기 전 매일 아침 신원 불명의 시신들의 유품이 있던 선창에 가셨는데, 그곳의 신발 상자 안에 각 희생자의 옷 조각과 반지 등이 놓여 있었습니다. 사고 후 거의 1년쯤 지난 다음에야, 마침내 할아버지는 한 상자를 가리키며 이 물건들이 할머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밝게 웃으며 일터로 떠난 아내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 길을 떠났고 그 유품조차 확인할 수 없었을 남편의 심경을 상상해봐. 그는 아무리 슬퍼도 배고픈 아이들을 그냥 방치할 수 없었기에 매일 아침 일터로 향해야 했지. 그러나 일터에 가기 전 어떻게든 선창에 들러서 유품 상자들을 눈 부릅뜨고 훑어 아내의 흔적을 찾아내려고 했던 거야. 아내의 마지막 출근 날에 대한 기억을 쥐어짜서 머리핀 하나, 단추 색깔 하나, 옷 조각 하나를 꿰어 맞추며 아내가 세상에 남긴 자취를 찾아 헤맸던, 남편의 소리 없는 흐느낌을 떠올려보렴.
그런데 며칠 전, 아빠는 100년 전 그 남편의 심경을 1만 분의 1이나마 실감할 수 있는 사진 하나에 가슴이 미어졌어. 혼자서 지하철 스크린도어 공사를 하다가 그만 전동차에 치여 숨지고 만 청년 노동자의 유품 사진이었지.


각종 공구와 가위, 장갑, 매직펜과 필기구, 충전기 등을 보면서 아빠는 얼굴도 모르는 그 분이 얼마나 바쁘고 힘겹게 일하고 있었는지를 그린 듯이 떠올릴 수 있었어. 특히 뜯지도 않은 채 젓가락과 함께 들어 있던 컵라면 한 개가 유독 마음에 걸렸단다. 작업을 끝내고 먹으려 했던 걸까. 지하철역 한구석에 서서, 면발 익혀 후루룩 먹어치우고 다른 현장으로 발걸음을 옮길 계획이었을까. 생판 모르는 사람인 아빠의 머릿속도 이렇게 어지러운데 그 가족과 친구들의 심경은 대체 어떠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구나.
그런 부모 앞에서 서울메트로 관계자는 '작업자 본인 과실'을 들먹였다고 하지. 산술적으로도 계산이 나오지 않는 규정이니 매뉴얼 같은 것들을 들이대면서 말이야. 정말 사람이 어디까지 무책임해질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그러고 보면 트라이앵글 화재 사건 때 ‘절도 방지’를 위해 문을 걸어 잠가 146명을 죽였던 기업주 두 명은 무죄판결을 받았지.
더 화나는 사실 하나. 트라이앵글 공장 참사 발생 2년 전인 1909년, 뉴욕에서 여성 노동자 수만 명이 봉제공장 총파업에 나선 일이 있었어. 물론 트라이앵글 셔츠웨이스트 노동자들도 참여했지. 무려 13주간 투쟁이 이어졌고, 봉제공장 400여 개 가운데 339개에서 노조 결성과 작업 조건 개선이 이뤄졌어. 하지만 트라이앵글 셔츠웨이스트는 완강하게 타협을 거부한 회사 중 하나였지. 회사 측의 이런 고집이 결국 146명의 노동자들을 살해한 거야.


이번에 구의역에서 사고를 당한 젊은 노동자도 메트로 본사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고 해. 그는 서울메트로에 정식 직원으로 채용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는구나. 하지만 용역직원을 정식 채용하는 대신 서울메트로 자회사의 퇴직자를 고용하려는 계획이 담긴 회사의 문건이 나왔고, 그는 이에 항의해서 피켓을 들었어. 트라이앵글 노동자들과 한 세기 후 한국의 한 청년은 모두
더 나은 삶을 위해 용기 있게 나서서 싸울 줄 아는 이들이었지만,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

여기까지는 같다고 치자. 그 후는 어땠을까. 트라이앵글 공장 화재는 미국 역사에서 하나의 전기가 됐어. 불행한 노동자들의 장례식에 시민 10만명이 운집했지. 고용주들이 노동자들의 위험에 책임을 지고 적절한 작업환경을 갖춰야 한다는 공감대도 인파를 따라 확산됐고. 당시 화재 현장을 지켜봤던 여성운동가이자 후일 최초의 미국 여성 각료가 되는 프랜시스 퍼킨스는 이렇게 말했지.

그날이야말로 뉴딜(New Deal:실업자 구제와 노동조합 활동 보장 등 미국 사회를 바꾼 거대한 개혁정책,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주도했음)의 시작이었다.

트라이앵글의 슬픈 희생은 그렇게 역사를 바꾸었어. 그런데 과연 우리는? ‘뉴딜’을 시작할 수 있을까? 가슴 아픈 청년의 희생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둘째 아이는 절대로 책임감 있는 아이로 기르지 않겠다. 내 아들은 책임감이 강해서, 시키는 대로 하다가 죽었다”라고 절규하는 희생자의 어머니에게 무슨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 뉴딜은커녕 ‘뉴킬(New Kill)’이라도 막아야 할 텐데. 너희들이 조금이나마 행복한 삶을 살게 만들려면 어른들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될 텐데. 아빠는 참 많은 생각이 드는구나.


* 이 글은 <시사IN>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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