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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덕후의 위태로운 덕질

  • 입력 2016.06.15 10:04
  • 수정 2016.06.15 10:57
  • 기자명 고함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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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덕’에 이르는 방법은 다양하다. 애정을 쏟을 새로운 대상을 찾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학업이나 일과 같은 현실이 덕질을 방해해서일 수도 있다. 모든 탈덕은 아쉽고 슬프지만 그 가운데 가장 안타까운 것은 단연 오랫동안 믿어왔던 ‘내 연예인’에 실망하며 등 돌리는 것일 테다. 대개 연예인의 잘못된 언행(마약, 음주운전, 문제적 발언 등)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며 충격을 받고 떠나는 식으로 진행된다.


덕후가 ATM기와 다른 건 감정도 있고 이성도 있다는 점!


내 연예인을 향한 마음이 아주 크다면 그깟(?) 사건‧사고쯤 아무것도 아닌 일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꽤 많은 순간에 팬들의 ‘합리적 이성’은 연예인을 향한 ‘맹목적 사랑’을 이긴다. 그리고 나의 경우, 합리적 이성의 대부분은 페미니즘에서 기인했다. 고백하건대, 페미니즘을 알게 된 이후 나의 덕질은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듯 위태로워졌다.
페미니즘을 배우게 된 내 마음에 가장 직관적으로 걸렸던 건 남자 아이돌이었다. 많은 경우, 남자 아이돌이 부르는 가사 속 여성들은 ‘꽃’으로 묘사되는 수동적인 대상이었다. 가사와 안무와 의상이 모조리 밑도 끝도 없는 남성성을 과시하는 경우도 많았다. “걔네가 노래를 직접 만든 것도 아니고”라며 합리화하기엔 꽤 많은 아이돌이 ‘셀프 프로듀싱’을 하고 있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내 아이돌이 일상생활에서 자기도 모르게 ‘여성혐오적’ 발언을 내뱉는 평범한 한국 남성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갖게 하기 충분했다. 예뻐라 하는 남자아이돌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나는 ‘얘가 은연중에 이상한 소리를 하면 어쩌나’ 걱정해야 했다. ‘얘가 이상한 소리를 하면 (덕후인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는 걱정이기도 했다.


방탄소년단 공식 트위터 캡처


여자 아이돌을 좋아하면 되지 않느냐고? “여자가 쉽게 맘을 주면 안 돼”라는 여성혐오적 가사의 노래를 부른 건 여자 아이돌이었고, 역시나 같은 노래에서 귀엽다는 이유로 화제가 된 “샤샤샤”의 기저엔 한국사회 특유의 애교 문화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나 여자 좋아해”라는 말이 발화자의 페미니즘적 인식을 담보하지 않는 것처럼, 여자 아이돌 역시 가부장적 사회를 살아오며 여성혐오를 답습했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여자 아이돌을 좋아하는 일은 남자 아이돌을 좋아하는 일 못지않게 나를 조마조마하게 했다.


‘열무콘서트’의 한 장면. Youtube 캡쳐.


비단 ‘아이돌을 좋아하는’ 페미니스트만 마주치는 딜레마는 아니다. 며칠 전 10cm의 권정열이 마마무의 휘인을 향해 “(치마를 가리는 것은) 남성분들한텐 실례가 될 수도 있다”는 성희롱 발언을 한 것처럼, 아이돌 외의 가수, 배우, 모델 모두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가상의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드라마를 좋아하는 친구는 ‘또 오해영’의 남자주인공 박도경(에릭)이 차창에 주먹질하거나, 화난 오해영(서현진)이 돌팔매질로 유리창을 깨트리는 걸 보며 드라마를 포기해야 했다. 페미니스트에게 세상은 영화, 웹툰 등 장르를 불문하고 덕질 대상으로 적합하지 않은 콘텐츠가 곳곳에 널려있는 지뢰밭 같다.
이런 상황에 놓인 페미니스트 덕후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몇 없다. 탈덕하거나, 참고 덕질을 이어나가거나. 그 어느 쪽도 쉽지 않다. 칼같이 탈덕해 버리기에 ‘내 오빠’(혹은 ‘내 새끼’)는 너무 예쁘고, 시작해버린 드라마의 결말도 너무나 궁금하다. 차마 놓을 수 없어 덕질을 이어나간다면 계속 조마조마하고 불편해야 한다. 가장 바람직한 선택지는 안심하고 덕질할 수 있는 대상을 찾는 것이겠지만, 글쎄, 어디 ‘입덕’이 마음대로 되는 것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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