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강정호와 이대호는 '국가대표 메이저리거'가 아니다

  • 입력 2016.06.09 10:12
  • 수정 2016.06.09 10:13
  • 기자명 20timeline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근까지 '먹튀' 랭킹이며 난투극 랭킹에 들락날락하기는 하지만, 영웅인 건 사실이다.

"아! 자랑스럽다 대한의 건아 메이저리거들!"

김현수 멀티 히트 기록, 오승환 필승조 플레이, 이대호와 박병호와 강정호의 홈런… 작년에 나왔으면 별로 새롭게 느껴지지 않았을 소식이, 올해는 굉장히 특별하게 전해지고 있다. 이 모든 뉴스의 배경이, 메이저리그라는 세계 최고의 야구 무대이기 때문이다. 미국, 일본과 명승부를 펼치며 ‘WBC 4강 신화’를 세웠던 2006년에조차도 감히 상상치 못할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전까지 메이저리그에서 탄탄한 커리어를 꾸렸던 한국인 선수라고는 박찬호 한 명뿐이었으니까.

대다수 국민들이 IMF로 실의에 빠져 있던 90년대 중후반, 박찬호는 단지 LA 다저스의 선수가 아니었다. 그는 존재만으로도 희망을 주는 스타였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한국 축구가 주춤할 때 대한민국을 불타오르게 하는 국민 스포츠의 역할을 야구가 맡았던 것은. 독일월드컵에서 16강 탈락의 수모를 겪어야 했던 2006년에 한국 야구는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4강을 맛보았으며,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야구 종목 우승의 쾌거를 이루었다.
여기에 '그 구단', '그 감독'들이 한국 선수를 주목하고 데려가기 시작하자, 우리의 자긍심은 높아질 대로 높아졌다.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호투를 거듭하던 류현진, 김광현, 윤석민은 물론, 결정적인 순간에 병살타를 유도해내 대표팀에게 올림픽 금메달을 안긴 ‘직각갑’ 정대현도 볼티모어 오리올스(Baltimore Orioles)의 눈에 띄지 않았던가. 국민적 영웅의 탄생, 매일 들려오는 국제 대회에서의 선전, 서양 중심의 패권 파괴까지. 세계를 주름잡는 한국 야구를 자랑스럽게, 약간의 내셔널리즘을 섞어 이야기하지 않을 이유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조금 우습게 들리는 의견도 왕왕 나오는데, 예컨대 활약 잘 하는 ‘그 선수’를 ‘플래툰 시스템’ 아래 순번대로 출장시키거나, 기록 부진 핑계를 대며 ‘그 선수’를 마이너리그로 보내려고 하는 감독을 비난하는 식이다. '그 선수'가 서양권 선수였던들 이런 멸시 치욕은 없었을 것이다, 한국 기량을 억누르려는 감독들에게 화가 치민다 운운하며.

나도 메이저리그에서 선전하는 한국 출신 선수들의 활약을 즐겁게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가끔 보이는 이런 유난스러운 반응과 과대해석은 조금 우습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실제로 메이저리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그냥 그 나라에서 팀과 선수 사이에 으레 벌어지는 일일 뿐, 무슨 국가 대 국가의 스포츠 외교 대리전쟁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음, 우리는 그와 한 팀으로서 매우 원만하게 지내고 있어요"

아시아 야구를 향한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관심은 유명하다. 한국 선수로는 실패를 많이 맛봤지만.

우선 올해부터 볼티모어 오리올스(Baltimore Orioles)에서 뛰고 있는 김현수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그는 이번에 마이너리그 강등을 거부할 수 있는 소위 ‘메이저 계약’을 따냈다. 그런 그에게 벅 쇼월터(Buck Showalter) 감독과 댄 듀켓(Dan Duquette) 단장이 “마이너리그에서 좀더 준비해 올라올 것”을 요청한 것은 과연 ‘더럽고 치사한 텃세’였을까? 김현수가 시범 경기 일정 내내 썩 좋지 않은 타구 질과 메이저리거답지 않은 안타율(1할 7푼 8리)을 보여준 것은 사실인데, 단지 그것 때문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시애틀 매리너스(Seattle Mariners)에서 뛰고 있는 이대호를 생각해 보자. 지난 시즌 소프트뱅크 호크스(SoftBank Hawks) 소속으로 일본 시리즈 우승을 경험한 그는, 구단의 요청을 뿌리치고 굳이 ‘야구선수의 마지막 도전’이라 할 수 있는 메이저리그로 왔다. 그런 그에게, 경쟁에서 이겨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Do or Die’ 계약서를 내미는 게 과연 ‘외노자 후려치는 천조국 클라스’일까? 국적을 떼어놓고 생각해보면, 이제 막 메이저리그에 들어온 선수에게 갑자기 두둑한 계약금이며 메이저리그 출장 기회를 챙겨줄 이유는 딱히 없지 않은가?


그런 계약 아래서 그래도 잘한다는 점이 대단한 부분.

이런 불안함에서 시작한 두 선수가 지금은 팀 안에서 알토란 같은 활약을 이어나가고 있으니, 그마나 안심이 된다 하겠다. 이대호는 지난 3일 있었던 샌디에이고 파드리스(San Diego Padres)와의 게임에서 대타로 나와 12:2의 압도적인 패색을 뒤집는 데 크게 일조했고, 김현수 역시 지난 2일 보스턴 레드삭스(Boston Redsox)와의 게임에서 3안타며 시즌 첫 홈런, 4할 4푼 이상의 높은 출루율 등 좋은 성적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는 냉정한 프로들의 세계고, 한국 야구 팬의 눈에 보이는 크기와 상관없이 그들은 여전히 메이저리그에서 아직 많은 것을 보여주지 못한 신인 선수다. 성적이 부진하다면, 다시 벤치에 앉을 각오를 해야 한다. 단지 그뿐이다. 이대호의 상승세가 아담 린드(Adam Rind)의 부진을 보장해 주지 않고, 김현수가 조금만 못해도 기회가 조이 리카드(Joey Rickard)에게 기회가 넘어가는 건 시간 문제다.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한다, 당신의 국적은 관심 없다”

1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메이저리그는 그만큼 각 팀의 컬러와 방침이 뚜렷하다. 감독, 코칭 스태프, 프런트 모두 마찬가지다. 체계 역시 이미 성숙해 있다. 한국 프로야구는 본판인 1군과 기량이 부족한 선수들의 귀양지로 여겨지는 2군뿐이지만, 미국의 마이너리그는 AAA, AA, A 루키 리그 등등 대단히 체계적으로 세분화돼 있다. 80년대 초, 중반 군사 정권에 의해 정치적 이유로 생성된 한국 프로야구와는 차원이 다른 근간을 두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래서,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한국시리즈나 각종 국가대항전 관전 요령에 대입해서 쉽게 보면 곤란하다. 우리는 김현수가 잘하면 부들부들 떠는 감독 정도로 생각하는 벅 쇼월터지만, 그는 사실 2004년 아메리칸 리그 올해의 감독상을 받고 2010년부터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꾸준히 성장시킨 메이저리그 대표 명장 중 한 명이다. 잠깐 본 걸로 멋대로 판단하기에는, 이들의 세계엔 이미 다양한 철학과 가치관의 수많은 충돌이 있어 왔고, 그들의 경기는 쉽게 파악하지 못할 맥락 위에 있다.


지금의 메이저리그를 이분들보다 잘 아난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대중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다. 일부 사람들은 “이대호는 나갔다 하면 딱딱 잘 쳐 주는데 그놈의 플래툰과 스캇 서비스(Scott Servais) 감독 때문에 기를 못 편다” 같은 비판을 하기도 하고, 김현수가 기회 자체를 적게 부여받는 걸 불만 삼아 벅 쇼월터 감독을 비난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어떨 때 보면, 조금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구단과 감독이 아무 근거나 입장도 없이 비싼 돈을 들여 영입한 선수에게 골탕을 먹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한국의 여론은 어떤가. 그날그날의 성적에 따라 더 기용해라, 벤치에 앉혀두길 잘했다등의 반응을 손바닥 뒤집듯 쉽게 오락가락 내놓는다. 그런가 하면 예컨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St. Louis Cardinals) 계약을 핑계로 도미한 오승환의 해외 원정 도박 파문에 대해서는 제대로 꼬집지 않는다. 과정과 상황은 중요하지 않고, 그저 ‘한국을 대표해’ 좋은 성적을 내면 될 뿐이고, 메이저리그는 그들이 잘할 수 있도록 독려해 주어야만 하고. 어쩌면 한국 선수를 대하는 원칙이 가장 허술한 것은, 태평양 너머의 미국이 아니라 한국일지도 모른다.


파문이 있었지만 실제로 손해를 본 것은 임창용 정도뿐이었다.

"그들이 국가대표라는 생각을 내려놓으면 더 재밌게 볼 수 있을 겁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한국 선수가 세계 무대로 나가 잘하는 것은 퍽 신기한 일이었다. 그 선수가 자신이 응원하던 팀에 있었고 스포츠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선수들의 해외 진출에 자랑스러움을 느끼는 것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선수들이 기회를 부여받지 못하거나 제 기량 못 펴는 것을 마치 자기 자신과 한국이 무시당하고 부정당한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방식의 자렁스러움은, 혹시 ‘국뽕’에 취한 모습의 하나일 뿐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예컨대 얼마 전 가비 산체스(Gaby Sanchez)의 방출을 ‘이대호에게 호재’라고 보도한 뉴스가 그렇다. 잠깐 생각해봤는데, 시애틀의 입장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이런 식의 관점은 이대호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다. 이제 막 정든 팀원을 성적 부진으로 떠나 보내게 되었을 뿐이고, 아쉬운 마음에 가벼운 송별회를 열어줬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외국 선수와 한국 선수의 1루수 경쟁을 말하는 보도 워딩 탓에 이대호는 졸지에 그 방출을 호재로 여기고 반가워하는 꼴이 되었다. 얼마나 어이없고 부담스러울까?


"오, 우리가 그들과 경쟁한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는 팀이에요.

나도 한국의 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서 제 실력을 보여주길 바랍니다."

무언가에 관해 존중 없이 겉모양만 보고 이야기하는 것만큼 무서운 게 또 없다는 걸 알 필요가 있다. 대리전쟁을 구경하고 한두줄 관전평을 쓰기 바쁜 사람은,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들여 그 세계를 쌓아온 이들보다 훨씬 오만하고 무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김현수든 이대호든 오승환이든 그들은 그들 자신을 위해서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는 것이지 한국을 대표해 뛰고 있지 않다. 그러니, 그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국가대항전 지켜보듯 째려보며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고, 굳이 한마디 얹어 본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