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성범죄를 소비하는 언론의 보도 행태에 분노합니다”

  • 입력 2016.06.04 16:46
  • 수정 2016.06.04 17:41
  • 기자명 직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성범죄를 소비하는 언론의 행태에 분노합니다.”
오늘(4일) 오전, 언론중재위원회 및 헤럴드경제 본사 앞에서 1인 시위가 열렸다. 최근 발생한 학부모 및 주민들의 성폭행 사건에 대한 언론들의 보도 행태에 항의하기 위해서다.


헤럴드경제가 위 사건을 다룬 기사 제목. 피해자를 ‘만취한 20대 여교사’로 표현하고 집단 성폭행 피해 사실을 ‘몸 속 3명의 정액…’이라고 표현했다.


이번 시위는 페이스북 페이지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시작됐다. 시위 참여자들은 “헤럴드경제 기사 제목은 포르노 제목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며 “저런 제목을 뽑은 기자도, 기사가 올라가게 한 데스크도 저열하기 짝이 없다”고 분개했다. 이어서 “한국기자협회에 ‘성폭력 범죄 보도 세부 권고 기준’이 있지만, 대다수의 언론사들과 기자들은 이를 지키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성범죄 사건을 선정적으로 보도하고 있다”며 “이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1인 시위를 하는 것”이라고 이번 시위의 동기를 밝혔다.
시위 참여자 중 한 명인 백승호 씨(32)는 “대단한 저널리즘을 기대하진 않는다. 다만, ‘클릭장사’를 한다고 해도 최소한 상도덕은 있어야 할 것 아니냐”며 “최근 헤럴드경제를 비롯한 인터넷 언론 기사들은 공익에 기여하기는커녕 유해하기만 하다.”고 언론들의 현 보도 행태에 일침을 가했다.


1인 시위 참여자 백승호 씨.


또 다른 참여자인 양지원 씨(31)는 “언론은 말이 가진 힘으로 사실을 전달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언론이 여성 대상 범죄를 자극적이고 선정적으로 전달하는 것은 사실과 정보 전달의 목적과는 다른 의도를 가지고 클릭 수를 늘리기 위해 여성을 매개로 장사를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며 “그것은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와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언론들의 이 같은 보도 행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특히 이번에 논란이 된 헤럴드경제는 ‘나쁜 제목 뽑기’로 유명하다. 피해자가 여성일 경우 ‘OO女’를 붙여 사건 내용보다 피해자의 신상 또는 행위를 부각시키기도 하고 반대로 가해자의 행위엔 ‘대범’, ‘위대’ 등의 수식어를 붙여 범죄 행위를 옹호하는 듯한 뉘앙스를 전달하기도 한다.


의사가 환자에게 대장내시경 시술을 하던 중 성추행을 한 사건. 피해자를 ‘대장내시경女’로 강조했다.



최근 발생한 강남역 살인사건의 피해자를 ‘묻지마 강남女’로 표현하기도 했다.



‘OO女’ 라벨링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활용된다. 최근 한 학생이 심폐소생술로 한 생명을 구하는 영상을 소개한 YTN은 이 학생에게 ‘심폐소생녀’라는 이름을 붙였다.



성추행 사건을 소개할 땐 마치 피해자의 옷차림 때문에 가해자가 참지 못해 범죄를 저질렀다는 뉘앙스를 풍기기도 했다. 실제로 해당 기사엔 피해자의 옷차림이 상세히 소개돼 있다.



도촬 범죄 행위를 ‘은밀하게 위대하게’라며 긍정적인 표현으로 서술하기도 했다.


한편 자극적인 썸네일(기사 소개 사진)을 사용해 독자들의 이목을 끄는 경우도 있다. 언론들이 기사를 마치 포르노처럼 만들어 팔고 있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이유다.


여성이 화장실에 앉아 속옷을 내린 채 용변을 보는 사진을 썸네일로 사용했다.
(이미지 자체 모자이크 처리)




성범죄 사건을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이미지로 표현했다.



여성의 상반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이미지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미지 자체 모자이크 처리)


기사 내용도 문제다. 기자가 마치 가해자로 빙의해 서술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기사도 비일비재하다. 연합뉴스는 이번 성폭행 사건을 두고 ‘“챙겨주려했다”..섬마을 여교사 성폭행 주민들 ‘변명’’이라는 제목을 뽑으며 가해자의 변명을 채워 넣기도 했다. 지난 5월 매일경제의 ‘성형외과를 찾은 그 남성, 왜 성시경 얼굴 택했을까’ 기사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하면 여성을 저항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성관계를 가질 수 있는지 데이트강간 가해자의 인터뷰를 통해 친절히 그 ‘기술’을 소개했다. 매일경제는 논란이 일자 사과문을 게재한 후 해당 기사를 삭제한 바 있다. 지난 4월 연합뉴스가 게재한 ‘소라넷은 어떻게 17년을 살아남았나’ 기사 역시 같은 문제로 논란이 됐다.


문제는 이와 같은 행태가 한국 언론의 뿌리깊은 고질병이라는 점이다. 독자들의 비난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음에도 적지 않은 언론사들은 이 같은 관행을 아무 문제의식 없이 답습하고 있다. 이는 앞서 1인 시위자들이 지적한 ‘언론사들의 클릭 장사’ 문제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이게 왜 문제인지 모르는’ 기자들의 젠더 의식 부재에서 출발하는 문제다.
아이즈의 위근우 기자는 '언론의 젠더의식은 언제쯤 개선될까'라는 칼럼에서 '그동안 문제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문제삼지 않았던 것뿐'이라며 여성혐오적 보도가 쏟아지는 행태를 '브레이크 없이 발현되던 왜곡된 젠더 의식이 선을 넘어버린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이런 보도관행에 대한 언론계의 자성을 촉구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언론이 스스로 반성하기를 기다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여러 번 문제가 발생했음에도 여전히 여성혐오적 보도가 쏟아지는 것은 그렇게 해도 약간 욕만 먹을 뿐, 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항의하는 독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소수다. 대다수의 독자는 그저 인상을 찌푸리고 넘겨버리거나 별다른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 심지어 항의하는 독자들을 예민한 사람으로 몰아붙이기도 한다. 그 사이에 양산된 부당한 기사들은 천박한 관행을 강화한다.
불쾌한 제목짓기에 우리 사회가 조금 더 민감해져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언론이 스스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최소한 눈치를 보게 만들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건 더 시끄러운 목소리와 더 많은 항의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