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정치인 중 무하마드 엘바라데이라는 사람이 있다. 법학자이자 외교관이기도 했던 그는 1997년부터 2009년까지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을 세 번 연임했다. 핵 확산 방지를 통해 세계평화에 기여했다는 공로로 2005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한 국제적 인사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 임기가 끝난 이듬해인 2010년부터 그는 이집트 정치판에 야권 지도자로 뛰어들었다.
2011년 초, 아랍 민주화 운동이 벌어졌고 그 연쇄효과로 30년간 이집트를 철권통치했던 독재자 무바라크가 실각했다. 그러자 엘바라데이는 IAEA 사무총장 출신이라는 화려한 스펙 덕분에 주요 차기 대선 후보로 순식간에 떠올랐다.
그러나 무바라크가 실각한 뒤에도 이집트에서는 여전히 군부가 권력의 실세로 군림하고 있었고, 엘바라데이는 그런 구체제 하에서는 어떠한 공직에도 참여할 수 없다는 이유로 대선 출마를 포기했다. 엘바라데이가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후 민주화를 열망하던 이집트 민중의 바람과 달리 그 이듬해 대선에서는 이슬람 원리주의를 내세운 무슬림 형제단의 무르시 후보가 당선되었다. 무바라크의 군부 권위주의 정권이 물러나자, 숨 막히는 이슬람 신정 체제가 등장한 셈이다.
세속자유주의 세력을 대표하던 엘바라데이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원한 이집트 대중의 기대와 달리 무기력했으며 정치적 기반도 부족했다. 2013년 7월 무르시 정권의 실정에 등을 돌린 민심을 핑계로 압둘 파타흐 시시가 중심이 되어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집트의 절차적 민주주의는 또 한 번 훼손되었다. 엘바라데이는 비민주적 쿠데타를 비난하기는커녕 오히려 민주주의를 위해 군부의 개입이 불가피했다고 옹호했다. 급기야 쿠데타가 성공한 그 해에 시시 군부 내각의 부통령을 맡았다.

그 후 이집트에서는 무르시를 지지하는 진영과 시시 군부를 지지하는 진영 사이의 충돌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시시 정권은 친 무르시 지지자들을 무자비하게 유혈 진압했고,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실상 시시 군부 정권의 ‘얼굴마담’이었던 엘바라데이는 유혈사태의 책임을 지겠다는 말만 남긴 채, 부통령직을 사임하고 유럽으로 떠났다.
그리고 (군부의 영향력이 깊이 개입됐다고 의심받았던) 2014년 대선에서 시시는 이집트 대통령이 되었다. 2011년 민주화를 위해 들고 일어났던 이집트 국민들은 무르시가 주도하는 이슬람식 구체제를 겪었고, 재작년부터는 한때 무바라크의 측근들이었던 장군들이 주도하고 있는 권위주의 체제를 견뎌내고 있다.
이집트 국민의 민주화를 향한 열망이 다양한 형태의 권위주의에 의해 유린당하는 동안 엘바라데이가 보여준 지도력은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IAEA의 수장으로서 때때로 보여줬던 강단 있는 리더십과 달리 이집트의 혼란스런 정치판에서 그는 유약했고, 지나치게 정치 공학적이었으며, 심지어는 군부 쿠데타 세력과 야합하기도 했다.
요새 언론에서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2017년 대선 출마 예측에 대해 앞다투어 보도하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 사무총장이었던 엘바라데이가 한때 이집트 국민들의 막연한 기대를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도 유엔사무총장이라는 타이틀 하나만으로 경쟁력 있는 대선주자로 떠오르고 있다. 언론의 대선 출마설 제기에 대해 자신은 단지 경주에서 열리는 유엔 NGO 컨퍼런스에 유엔사무총장의 자격으로 참여하러 방한한 것일 뿐, 과도한 정치적 해석을 삼가달라는 그의 변명은 어딘가 어설퍼 보인다.
영국의 <텔레그래프>와 프랑스의 를 비롯한 해외 언론은 임기가 아직 남아있는 반 총장의 마음이 이미 한국 대권 도전에 가있다고 꼬집었다. 그가 정말 공식적인 유엔 업무상, 유엔총장의 자격으로 방한했다면 오래전에 은퇴한 정치원로이자 충청 정치권의 영수인 김종필 씨는 굳이 왜 만났는가? 또한 TK 정치권의 전통적 성지인 안동을 몸소 방문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의 요란한 정치 행보와 달리 차분한 그의 답변은 외교관 특유의 완곡어법을 고려하여 진의를 파악해야 한다. 여러 정황을 종합해보건대 여당에서 대권 참여를 공식적으로 요청한다면 굳이 마다하지 않겠다는 표현으로 보인다.
유념해야 할 사실은 한 나라의 지도자를 선택하는 기준에 있어서 인물의 ‘대외적 인지도’에만 천착하는 것은 후진적 선거 문화의 전형에 가깝다는 점이다. 국제기구의 수장 출신, 다국적 기업의 임원 출신, 심지어 유명 스포츠 선수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국의 유력 정치인으로 부상하거나 본인들 스스로 자신의 (정치적 능력과 무관한) 대외적인 경력을 내세워 정계에 진출하는 사례를 우리는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의 정치권에서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 아랍의 봄이 일어나기 전에는 이집트 대중의 마음을 흔들만한 정치적 어록조차 전무했던 정치 신인 엘바라데이가 국제원자력 기구의 수장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대선 후보로 급부상했던 사례와 흡사하다.
그렇다면 국제기구의 수장으로 역임했던 경력 하나로 일국의 정치 지도자로서 필요한 역량을 충분히 갖췄다고 간주할 수 있는가? 엘바라데이와 반기문이 국제기구의 수장을 꽤 오랜 기간 동안 무난하게 수행했다는 것을 바꿔 말하면, 조직의 획기적인 변화를 이끌 만큼 능동적 리더십이 있었다기보다는, 대세를 파악하고 현상 유지에 집중함으로써 국제정치의 권력 관계상 강대국의 이익에 반하지 않게 비교적 잘 처신했다는 의미로 파악할 수 있다.
특히 다섯 개의 상임이사국 중 한 나라라도 거부권(veto)을 행사하면 선출될 수 없는 유엔 사무총장의 선출 방식 상, 반기문 사무총장은 개인의 정치적 역량보다는 대륙별 순환에 의한 선출 구조와 강대국 입장에서 딱히 반대할 이유 없이 상대적으로 다루기 쉬운 인물이었기 때문에 연임에 성공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어느 조직에나 개선해야 할 나쁜 관행이 있기 마련이다. 정의롭고 투명해야 할 정책 결정 방식이 비공식적이고 부당한 방식으로 점철되는 경우도 있다. 더욱이 한국 정치집단 문화의 비합리적 관행은 열거하기 힘들 정도이다. 반기문의 유엔총장 임기 중 행보를 복기해보면 그가 과연 정치 지도자로서 한국의 후진적 정치 문화와 구조적 관행을 개선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 의문이다.
물론 유엔은 거부권을 가진 5개 상임이사국의 힘겨루기가 벌어지는 동시에 그들만의 밀실협상으로 운영되는 측면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사무총장은 (모든 국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을지언정) 이해 당사국 간의 표면적 합의를 이끌어냄으로써 국제 사회의 여론을 환기하고 새로운 레짐(Régime - 체제)을 형성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다. 또한 일시적으로나마 사태를 원만하게 수습하고 국가 간 분쟁을 중재할 권한이 공인된 규범적 존재다.

설령 이런 일련의 합의 과정이 비구속적 선언에 그친다 할지라도 국제 규범을 강행하려는 유엔의 의지를 표명할 수 있다. 분쟁 지역에서는 유엔사무총장의 판단과 말 한마디가 개인의 생명과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한다.

그가 대선 후보로 각광받고 있는 이유는 국민 입장에서는 국제적 인지도도 있는 데다가 딱히 거부감이 들지 않는 무난한 캐릭터이기 때문이고, 여당의 입장에서는 행동이 예측 가능한 얌전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2012년 초의 안철수처럼 반기문도 기성 정치인에 대한 국민적 회의감 확산에 따른 반사 이익을 누리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반기문 총장은 국제 분쟁 중재에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유엔사무총장 본연의 임무를 여러 차례 방기했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 파견된 유엔 평화유지군이 현지인들을 상대로 2014년 이후 42건에 달하는 성범죄를 저질렀음에도 이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았다(파견된 평화유지군의 수장이 상임이사국 중 하나인 프랑스 출신이었다).

2009년 스리랑카 정부군과 타밀족 반군간의 유혈 충돌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태에 대해 스리랑카에 대한 정치적 이해관계를 가진 이웃나라 인도 출신의 조사관을 파견하며 외교에 관한 현실 감각에 문제를 보이기도 했다. 사무총장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리더십조차 발휘하지 않은 인물이다.
이런 면에서 반기문 사무총장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사무총장으로서 미국 부시 정부가 주장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보유 의혹을 정면으로 반박한 엘바라데이보다 더 유약한 리더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처럼 반 사무총장은 현상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는 유능하지만 남다른 비전으로 한국 정치 문화의 구조적 병폐를 청산하고 체질을 개선시킬 수 있는 개혁적 지도자는 아님이 분명해 보인다.
엘바라데이의 정계 입문이 실패로 끝난 이유 중 하나는 이집트 내에서의 취약한 정치적 기반 때문이었다. 오랜 기간 외국에서 활동한 엘바라데이는 이집트의 제도권 정치인들에게는 그저 좀 유명한 외지인에 불과했고 야권의 공식적 단일 지도자로 인정받지도 못했다. 유력한 야권 세력이었지만 이슬람 원리주의에 가까운 정치 강령을 지닌 무슬림형제단은 당연히 서구식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엘바라데이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이집트의 척박하고 분열된 야권에서 고전한 엘바라데이와 달리 반기문의 정치적 전망은 상대적으로 양호해 보인다. 당장 자신을 뒷받침해줄 정치 세력의 토대가 미비한 점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리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만약 새누리당이 내년 대선에서 정권을 재창출하기 위해 진심으로 반기문 사무총장을 영입하길 원한다면, 새누리당은 당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서 그를 새누리당의 대선 주자로 세우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집권 여당의 대선 후보 자리를 거머쥐기 위해선 반기문 사무총장도 치열한 당내 경선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민족적 열망과 인물의 대외적 인지도에만 집착하는 한국 특유의 신민형 정치문화가 맞물린다면, 그의 대선 도전 과정은 의외로 무난하게 진행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기문 총장이 대한민국에 진정으로 필요한 지도자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강한 의문이 든다. 절차적 민주주의와 제왕적 대통령제에 치중한 나머지 실질적인 삼권분립과 당내 민주화가 아직 요원한 ‘87년 체제’에서 진일보하기 위해선, 다음 대통령은 현상유지형 리더십이 아니라 개혁적 리더십을 지닌 인물이어야 한다. 사회 구조적, 정치 문화적 개혁을 위한 정치 철학을 제시하는 리더십이 필요다.

하지만 근래에 보여준 반기문 사무총장의 정치적 행보를 보면, 그는 정확히 그 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공적인 자리를 이용해 국내에서 정치적 기반을 닦고 토호 정치인들의 도움으로 충청과 TK연대를 조장하는 진부한 지역주의 감정에 호소하며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상투적인 언변을 구사해 정치 혐오에 빠진 부동층을 손쉽게 공략하려는 편의주의적 전략을 취하고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가 직면한 구조적 문제에 대한 공감과 깊이 있는 담론은 찾아보기 힘들다.
반기문 사무총장을 차기 대선 주자라고 가정했을 때, 그가 여권 정치인들이나 상당수 국민들로부터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가 특별히 모난 정치적 언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성 정치인에 대한 국민적 회의감이 확산되며 생긴 반사이익도 얻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불통 리더십 탓에 차기 대권을 장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새누리당 입장에서는 정치적 기반이 약한 반기문 씨가 비교적 예측가능하며 제어하기 쉬운 ‘바지사장 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하기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가 상임이사국의 거부권 행사 없이 유엔사무총장 연임에 무난하게 성공했던 이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반기문 사무총장의 국제적 인지도를 이용한 새누리당의 대외 이미지 개선과 재집권 시 외국과의 협상력 향상에 도움이 될 거라는 이점도 고려했을 것이다.
2013년 7월, 무르시 정부를 전복한 군부가 엘바라데이를 부통령에 임명한 것은 그의 대외적 인지도를 이용해 서방과 합법 정부 승인 협상을 체결하기 위한 정략적 판단이었다. 반기문 사무총장이 정말 대선 출마에 뜻이 있다면 현재 자신을 향한 여권의 정치적 구애와 국민의 높은 지지율이 결코 본인의 정치 지도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에 앞서 우선 본인의 현재 직무에 충실할 것을 당부 드린다. 또한 개인의 정치적 야심을 위해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직위를 이용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만 매끄럽게 수행하는 것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능동적으로 파악하고 부당한 외압과 관행에 맞서 소신 있게 대응하는 것은 그 의미가 다르다. 테크노크라트(기술자 출신의 고급 공무원)로서의 기술적 능력 외에 소통이나 분배에 대한 탈권위주의적 공감 능력과 더불어 개혁을 위한 굳센 정치적 결단력이 반기문 씨에게 있을지 잘 모르겠다.
끝으로 필자가 고2때 벌어진 ‘김선일 씨 피랍 사건’에서 외교통상부 장관으로서 보여준 그의 무능하고 영혼 없는 수습능력은 12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밑도 끝도 없는 ‘반기문 대세론’을 경계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