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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남성' 혹은 싸가지 없는 여자

  • 입력 2016.05.31 13:41
  • 수정 2016.05.31 17:52
  • 기자명 박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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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주>
1. 스포일러 있습니다.
2. 이 영화는 남성주류사회에서 여성이 어떠해야 하는가, 를 다루기에 영화 분석또한 그 지점에서 이뤄집니다. 남성주류사회를 만드는 사람들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 아니냐, 라는 반론이 예상됩니다. 동의합니다. 다만 이 영화에선 그 주제를 다루지 않고, 이 글에서도 남성보다는 명예남성에 대해 주로 다룰 예정입니다.
3.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듭니다. 이 영화에 남성이 등장하여 김복남 등을 모두 구제해주는 구세주 역할을 했다면 이 영화가 보기에 아름다웠을까요? 딱히 그럴 것 같지는 않습니다.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딱 제가 원하는 종류의 결말을 보여줬습니다.



여성대상 폭력에 침묵하는 여성 해원

서울에서 한 여성이 남성들에게 폭행당하는데, 그것을 본 한 여성 목격자(해원)는 이를 보고도 못 본 척 합니다. 피해자가 여성인 점, 그리고 현장에서 그녀를 돕지 않는 자가 여성이라는 점은 이 영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나중에 목격자로 경찰서에 불려가지만 거기에서도 목격자는 피해자를 위해 증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남성의 폭력을 방조합니다.


그 목격자는 이 영화의 관찰자 해원입니다. 그녀는 은행원으로, 폐지를 줍는 할머니에게 야멸차게 굴기도 합니다. 폐지를 주우며 대출을 요구하는 사람이 할아버지가 아닌 할머니란 점은 의도된 겁니다. 해원은 할머니에게 대출이 절대 불가하다는 입장을 보입니다. 그런데 얼마 뒤 후배 여성 은행원이 할머니에게 대출을 해줍니다. 거기에 화가 난 해원은 그녀에게 가서 이런 말을 합니다.

금융계통에서 여자가 엉덩이로 살아남는 데는 한계가 있어.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말에 담긴 분노의 이유를 생각해볼 수도 있고, 말 자체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겁니다. 첫째로, 말에 담긴 분노의 이유는 뭘까요? 해원은 앞서의 '방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신과 다른 여성이 피해를 입어도 나의 자존을 위해 침묵합니다. 그런 해원에게 후배 은행원의 행태는 혼자 착한 척 하는 것으로만 보여 아니꼽고 꼴사나울 뿐입니다.

둘째, 말 자체의 의미로 해원의 말을 해석해봅시다. 해원은 '서울'이란 공간을 남성권력이 지배하고 있다는 걸 부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해원은 남성권력에 굴복하고 싶어하지도 않습니다. 즉, 그녀는 '엉덩이로 살아남는 것'에 부정적입니다. 이 대사만으로도 해원이 어떤 인물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서울의 비즈니스에서 '엉덩이'를 쓰지 않던 해원은 결국 해고됩니다. 장철수 감독이 묘사하는 서울이란 그런 곳입니다. 여성이 엉덩이를 쓰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공간이죠. 그리고 남성들은 '엉덩이를 쓰지 않는 여성'을 참아주지 않습니다.


서울을 떠나 섬
으로 도피하는 해원

서울의 삶에 지친 해원은 섬으로 갑니다. 하지만 섬은 훨씬 더 남성주의적인 사회죠. 서울에서는 여성이 살아남기 위해(회사에 남아있기 위해) '엉덩이'를 쓰고 섬에서도 이는 유사합니다.


하지만 하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서울에서는 여성에게 가늘게나마 자유의지가 있다면 섬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물론 강하게 원한다면야 섬에서도 여성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는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남성주의에 찌들어버린 대다수의 여성 - 소위 명예남성- 들이 남성권력에 기생하는 시점에서 한 여성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아니,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복남이라는 괴물이 탄생할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비현실적인 공동체에서 비현실적인 존재가 탄생한다는 것은 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섬에 사는 여성들이 남성권력에 기생하지 않고,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했다면 '김복남'이라는 존재는 탄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서울의 남성과 여성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서울의 남성은 세 부류가 있습니다.
(1) 여성을 폭행하는 남성들 : 이들은 여성을 (성)폭행합니다.
(2) 기업의 오너들 : 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의 여성만을 인정합니다.
(3) 경찰 : 국가 당국을 상징합니다. 여성들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서울의 여성도 마찬가지로 세 부류로 나뉩니다.
(1) 남성에게 폭행당하는 여성
(2) '엉덩이'를 사용하는 은행원 : 남성권력에 기생하거나, 희생되는 여성
(3) 방관하는 여성 : 서정원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영화 막바지에 각성합니다.



섬의 남성, 여성


섬의 남성은 한 부류 밖에 없습니다.


(1)폭력적인 남성
그들은 부인이 집 마당에 있는데도 여성을 불러 집안에서 소리를 내며 섹스를 합니다. 발로 차기도하고, 주먹으로 머리를 때리고, 따귀를 때리기도 하죠. 섬에선 남성들의 폭력이 일상화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섬
에서의 여성은 어떨까요? 두 부류가 있습니다.
(1)남성권력에 기생하는 여성

(2)남성에 의해 피해입는 여성


(1)은 (2)를 돕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성의 입장에서 (2)를 비판합니다. "여자는 좆이나 물고 살아야한다"던지, "여자는 시집이나 가고 여행 따위는 다니지 말아야한다"고 말합니다. 한 남성이 어린 아이를 죽게 만들어도 (1)의 여성들은 남성의 잘못을 감싸주기에 바쁩니다.
이런 것들이 경악스러운 이유는 (1)의 여성들이 자신들의 인간적 권리를 전혀 모른다는 데서 오지 않나 싶습니다. 스스로 제 살을 깎아먹고 있다는 것을 보는 건 괴로운 일이죠. 하지만 그들을 연민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들도 사실상 남성 폭력에 있어서 공범이니까요. 이런 여성들을 요즘은 '명예남성'이라고 부릅니다.

백인보다 더 백인같은 흑인(왼쪽)

남성권력에 공조하는 여성들-명예남성들과 비슷한 인물은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도 나옵니다. 거기에선 흰 머리의 흑인이 백인의 흑인대상 인종차별을 돕죠. 그래서 주인공 장고는 그를 "너는 백인보다 더 백인같다 XX야"라며 죽입니다. 각성한(?) 김복남도 여성들을 죽입니다. "니들이 남자들보다 더 남자같어"라는 대사를 하지는 않지만, 아마 그녀가 이 대사를 내뱉다고 해도 별다른 위화감은 없을 겁니다.


김복남의 각성

섬은 폐쇄적입니다. 그 흔한 CCTV도 없고, 파출소도, 경찰서도 없습니다. 누가 사람을 죽여도 섬 내에서 이를 문제 삼지 않고 입을 꾹 닫으면 알려지기 힘듭니다. 고인 물이 썩듯, 폐쇄된 곳이 썩는 것도 이상할 건 없습니다. 그런 곳에서 자라 성인이 되기도 전 성폭행을 당하고, 그로 인해 임신까지 하게 된 여성이 취할 수 있는 스탠스는 세 가지 정도일 겁니다.
(1) 당하고 살거나, (2) 기생하거나, (3) 각성하거나.
물론 김복남의 각성 후 행위를 이해할지언정, 그것을 지지하고 응원하기는 힘들 겁니다. 그녀는 어쨌든 살인마가 되었으니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이라는 이 영화를 통해 최종적으로 얻어내야 할 결론은 '김복남이 되자'보다는 '김복남이 나올 수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정도로 보는 것이 현실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여성들도 여성들을 위해야겠죠. 방관하고, 남성권력에 동조하는 것은 '나도 공범이요'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당연히 남성들도 여성들의 인권향상을 위해 나서야 합니다. 술에 약 타지 말고, 강간하지 말고, 때리지 말고, 여성 혐오적 발언을 하지 말고, 어떤 남성들이 여성에게 피해를 끼치려하면 끼어들어서 막고... 사실 이건 여성 인권 향상을 위한 방안이라고 하기에는 참으로 민망할 정도로 당연한 얘기들입니다. 이 영화는 분명히 여성이 어찌해야 하는가에 관해 말하고 있지만, 여기에 미처 나오지 않은 남성들의 역할에 대해선 아래 TED영상이 도움이 될 듯 합니다.



김복남과는 조금 다른, 해원의 각성

저 새끼에요! 장철수 감독은 처음에는 남성의 폭력에 방관하던 해원을 각성시킵니다. 그녀는 더이상 남성의 폭력을 보고만 있지 않습니다. 스스로만을 지키려 하지도 않습니다. 자신만 지키려 하는 행동이 결코 스스로를 보전하지 못한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지요. 그녀는 남성들을 살해하는 대신(김복남), 고발과 법과 절차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이 부분이야말로 현상으로서의 김복남과 현상으로 인해 각성한 '남은 자' 해원이 구별되는 지점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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