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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마다 반복되는 10가지 패턴

  • 입력 2016.05.25 11:28
  • 수정 2016.05.25 11:56
  • 기자명 비더슈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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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한국 사회는 수많은 재앙을 겪어 왔다. 한국전쟁부터 시작해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성수대교 붕괴 사건, 그리고 최근에는 해병대 캠프 사망사건,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 세월호 참사, 강남역 살인사건도 있었다.
대형 참사는 한 사회에 있어 크나큰 비극이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졌던 생명이 우리 곁을 떠나간다는 점에서 비극적이지만, 사회 전체의 거대한 빈틈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참사가 벌어졌을 때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은 망자에게 조의를 표하고 그들은 잊지 않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참사를 만들어낸 사회 구조에 대한 분노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죽음에서 통찰을 얻지 못한다면 또 다른 죽음을 맞이할 뿐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간 우리 사회는 참사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사건 발생 이후 대한민국은 달라졌는가? 바뀐 건 없다. 당장 세월호 사건만 보더라도 해경의 소속 변경과 국민안전처의 등장 외 변한 게 무엇인가.

최근 몇 번의 참사를 목격하며 왜 참사의 결론이 이렇게나 허망했는지 그 패턴이 서서히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1. 참사가 발생한다.

참사가 발생한다. 세월호 참사일 수도 있고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 강남역 살인사건일 수도 있다. 지켜보는 사람들은 충격에 빠진다. 죽음 앞에 슬픔에 잠긴다. 여기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세월호 참사

2. 사회 문제가 지적된다.
사건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그 사건의 배경이 되는 사회적 문제를 지적하기 시작한다. 모든 참사는 사회적 배경을 안고 있으므로 문제 제기는 아주 정상적인 현상이다. 건강한 사회라면 문제 제기가 자연스럽게 이뤄져야 하고 대체 어떤 문제가 세상을 병들게 하고 있었는지 가늠하게 된다.
세월호 참사에서는 안전 문제가 대두됐다. 대체 왜 배가 침몰한다는 신고가 접수됐는데도 사람을 구하지 못했을까? 며칠 동안 생존자 구조를 위해 배 안으로 진입하지 않았을까? 노후화된 배를 허가해준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가 국민의 안전 보장에 대한 책임을 방기한 것일까?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혐오 (misogyny)’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가해자가 “여성들이 나를 무시해서 죽였다”고 밝힌 만큼 여성들의 안전, 나아가 사회적 차별 문제까지도 제기되어야 한다.
그리고 해병대 캠프 사건. 이 사건은 ‘극기’와 ‘군기’를 강요하는 현실을 지적할 수 있다. 명령에 복종하고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 인간을 단순히 ‘적응하는 원숭이’로 만들려는 교육을 문제 삼을 수 있다.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도 마찬가지. 옥시를 넘어서 소비자를 기만하고 있는 기업문화 전체를 지적해야 하고, 서울대 교수의 구속으로 상징되는 학계와 기업의 결탁 관계도 지적해야 한다. 감시 책임을 소홀히 한 정부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수많은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다. 사건과 직접 연관된 문제일 수도 있고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문제일 수도 있다. 어쨌든 참사를 계기로 다양한 문제가 떠오르고 이를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3. 문제 제기가 행동으로 분출된다.
이후 사람들은 행동하기 시작한다. 문제 제기가 해결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지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게 빈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행동에 나선다.
세월호 참사로 드러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사람들은 나서서 추모집회를 연다. 광화문에 천막을 치고 서명운동을 한다. 대통령이나 국회 앞에서 항의하기도 한다.
강남역 살인사건의 경우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강남역 10번 출구를 포스트잇으로 추모한다. 여성혐오가 만연한 사회에 대한 문제 제기도 이 단계에 오면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가습기 살균제 살인사건도 유사하다. 사람들은 옥시 불매운동을 시작하고 결국 사과를 받아내기도 한다.


강남역 10번출구 추모쪽지

4. 문제 제기로 인해 피해를 보는 세력이 등장한다.
그런데 행동에 나선다고 해서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그 문제로 이익을 보던 사람이 있기 마련이니까. 꼭 이익을 보진 않았더라도 그 문제 제기 자체를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가습기 살균제 판매 기업들은 제품 판매를 통해 상당한 이익을 얻었다. 그렇기에 문제 인정이나 배상도 웬만하면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해당 회사 관계자는 가습기 살균제에 대한 문제 제기 자체를 불편하게 생각하며 최대한 빨리 이 문제가 묻히기만을 기다릴 것이다.
세월호 참사의 경우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해 박근혜 정부가 이익을 보진 않았다. 그러나 어찌됐건 세월호 참사로 국가에 제기되는 비판은 박근혜 정부에게 불편할 수밖에 없다. 본인이 이끌던 정부가 아주 거대한 결함을 품고 있다는 의미니까.
여성혐오적 사회로 인해 이익을 보던 사람은 더욱 광범위하다. 어찌 보면 남성 전체가 그 이익을 보고 있는 셈이다. 남성들은 자신이 보던 이익을 파괴하려는 여성들의 행동이 불편하다. 자신들을 향해 제기되는 문제가 불쾌하다.


5. 이제 그들이 저항을 시작한다.
그래서 그들은 저항을 시작한다. 참사에서 비롯된 사회 문제 제기를 ‘정치 싸움’으로 몰기 시작하고 “순수한 목적으로 추모만 하자”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상황이라면 참사에서 배울 건 아무것도 없다. 다른 사람들이 무언가를 배우는 순간 자신이 누리던 권리를 잃게 되므로.
남성들은 ‘남성혐오’를 외치며 강남역 추모 공간에 나오게 된다. 보수 세력은 ‘폭력 시위’라며 세월호 추모 집회 현장을 와해하며 문제를 축소하려 애쓴다. 세월호 사건은 유병언과 청해진해운의 문제고, 강남역 살인사건은 가해자만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사회적 맥락을 묻으려 노력한다.


핑크코끼리

6. 충돌이 시작된다.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둘로 나뉜다. 그리고 두 세력은 충돌하기 시작한다. 인터넷상에서 충돌할 수도 있고, 물리적으로 발생할 수도 있다.
세월호 참사 후엔 시민들이 직접 거리로 나와 행동했다. 이에 보수 단체들은 ‘맞불 집회’를 예고하며 반발했다. 여기엔 세월호 유가족의 단식투쟁에 대응한 ‘일베’ 회원들의 ‘폭식 투쟁’도 해당한다.
강남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베’ 등 보수 시민들이 강남역 앞으로 직접 나오기 시작했다. 피케팅 시위를 하며 물리적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추모 공간에 나타난 시민이 포스트잇을 붙이지 못하게 막기도 했고, 대구에서는 흉기를 소지하고 있던 시민이 체포되기도 했다. 핑크 코끼리 탈을 쓴 사람이 추모 현장에 등장한 사건도 있었다.
이런 행동이 폭력으로 격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폭력을 반드시 부당하다고만 볼 순 없다. 특히 그 저항의 대상이 국가 권력일 때 그 책임을 질 수 있다면 폭력으로 자신의 의사를 드러낼 수도 있다. 말하자면 ‘시민 불복종’이다.
물론, 합리화될 수 없는 폭력이 등장하기도 한다. 대화로 해결할 수 있음에도 가해지는 폭력은 분명 문제가 있다.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런 문제가 등장하기도 한다.

7. 언론이 충돌을 부각한다.
여기서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언론은 “사람들이 대체 왜 충돌하는가?”, “사람들은 어떤 문제를 제기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오늘은 얼마나 자극적인 충돌이 발생했는가?” 혹은 “누가 어떻게 상대방을 괴롭히고 있는가?”를 묻는다. 클릭 수를 높일 수 있는 자극적인 제목만을 뽑아낸다.
세월호 추모 집회 현장에서 벌어진 폭력에 대해서만 논한다. 유가족의 울분과 경청하지 않는 정부에 관해선 얘기하지 않는다. 강남역에서 벌어진 물리적 충돌만을 논한다. 여성혐오적 사회와 성적 불평등 사회에 대해서는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폭력은 안 된다”는 원론적인 입장만을 반복한다. 기계적 중립의 함정에 빠진다. 과격해진 현장에 관해서만 이야기가 나온다. 이때부터 일부의 비이성이 모두를 대변하기 시작한다. 단편적 사례는 전체로 일반화된다. 세월호에 슬퍼하면 폭력 집단이 되고, 강남역 살인사건을 추모하면 파시스트가 된다.
직접 현장에 나올 수 없는 사람들은 뉴스만 보고 상황을 판단한다. 기사 한 줄이 시민 수만 명의 행동을 대변한다. 그렇게 혼란만이 부각된다.


강남역 살인사건 중앙일보 보도

8. 사건과 사회 문제의 본질이 사라진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참사와 그로 인해 제기된 사회 문제를 망각하기 시작한다. 폭력과 혼란만이 머리에 남는다.
‘세월호’로 목숨을 잃은 이들에게 슬픔을 표하는 사람들은 점차 사라진다. 집회에서의 충돌, 차 벽, 물대포가 머릿속에 남는다. 사회의 안전 문제를 생각하는 대중도 줄어든다. 이제 세월호는 일상이 된다. 사람들의 관심은 세월호 유가족이 얼마나 많은 배상금을 받을지 집중한다.
강남역 살인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살해당한 여성을 안타까워하는 대중은 사라진다. 언론에 의해 재단된 ‘남혐’과 ‘여혐’의 프레임만 머릿속에 남는다.


9. 지겹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흐른다. 꽤 긴 시간을 하나의 이슈가 독점한다. 사람들은 이제 무뎌진다. 슬픔을 느끼던 시민들도 이제는 덤덤해진다.
‘지겹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언제까지 이 이슈에 천착할 거냐는 주장이 나온다. 이제 과거는 잊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어느 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울분만 남기고 가자는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한다.
이 단계가 되면 논쟁과 대립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대립이 심화할수록 논쟁에 참여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줄어든다. 관심 자체를 거둔다. 언론도 조용해지기 시작한다. 더는 참사에 관심을 보내는 사람조차 남지 않는다.


세월호 지겹다 ⓒ JTBC

10. 모든 것이 조용해진다.
이제 사건은 사실상 끝을 맺는다. 세상이 조용해진다. 더는 싸울 동력과 의지를 얻지 못한다. 피해자의 울분은 쌓이지만, 누구도 이를 해결해 주려 하지 않는다.
사회 문제의 해결 따위는 더는 논하지 않는다. 적폐는 더 쌓여가고 부당하게 이익을 취하던 이들은 삶은 변하지 않는다. 세상은 전처럼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참사의 가능성은 이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세상은 그렇게 조금씩 무너져간다. 참사는 그렇게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세상은 성장의 동력을 잃는다. 아주 뻔한 패턴이다. 이슈를 점령하고 대중의 관심을 먼 데로 돌려버리는 전형적인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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