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강남역 살인사건은 묻지마 범죄가 아니다

  • 입력 2016.05.19 11:26
  • 수정 2016.05.19 11:27
  • 기자명 물뚝심송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희생자를 애도하고 있는 사람들 ⓒ민중의소리

강남역 살인사건은 묻지마 범죄가 아니다.
묻지마 범죄는 보통의 범죄와 다르게 특정인을 상대로 한 범죄가 아니라 범죄자 자신의 내면에 쌓여 있는 스트레스를 불특정한 상대에게 행동으로 표출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기존의 각종 범죄와 다르게 매우 위험하다.
가장 위험한 것은 이런 범죄를 일으키는 자들은 불특정 다수를 임의로 고른다는 것이다. 그런 특성상 예방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사형제도 등 강력한 처벌도 이들에게는 거의 효과가 없다. 이런 범죄를 일으키는 자들은 증거를 인멸하거나 도주할 생각도 거의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어차피 생을 포기한 마당에 뭐가 문제겠냐는 ‘자포자기’에 가까운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강남역에서, 그것도 사람들이 애용하는 환경 괜찮은 서비스 업소의 화장실에서 벌어진 사건은 묻지마 범죄와는 또 다른 양상을 보인다.
범죄자는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우발적으로 자신의 스트레스를 표출한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약자로 간주되는 ‘여성’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른 것이며 꽤 긴 시간 동안 화장실에서 범죄 대상을 기다릴 정도로 집착을 보였다.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고 있던 것은 확실하지만 그 사고의 바탕에 일반적인 묻지마 범죄와 또 다른 약자에 대한 차별, 그 중에서도 요즘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고 있는 ‘여성혐오(misogyny)’가 깔린 범죄인 것이다.
거기다가 더 심각한 점은 이런 범죄는 평소 생활 속에서 수도 없이 성차별을 겪고 살아오던 모든 여성들에게 매우 깊은 정서적 충격을 안겨준다는 것이다.
그 충격의 강도는 여성들 사이에도 격차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평소 성차별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여성들에게는 그저 우연히 마주칠 수 있는 위험이 하나 더 늘어 불안감이 커진 수준이지만,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차별에서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진작에 깨닫고 있던 여성들에게는 급기야 성차별, 즉 ‘여성혐오’가 현실세계에서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까지 확장되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 같다.


ⓒ민중의소리

즉 이 사건은 우리 사회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에게 심각한 생존의 위협으로 받아들여지며,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여성의 안전한 생존을 보장할 방법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이 주는 충격과 공포의 폭은 대단히 크다. 그리고 그 충격과 공포는 더 이상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각성을 불러 일으킬 것이며, 그 각성은 집단 행동으로 표출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그렇게 집단행동이 표출될 경우, 우리 사회는 그걸 또 억압하고 짓누르려고 반응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다수의 남성이 이 사회에 성차별, 즉 여성혐오가 그리 많이 존재하지 않으며, 여성혐오를 이야기하는 여성들은 뭔가 다른 것을 주장하고 있는 중이고, 오히려 이 사회에서는 남성들이 차별을 당한다고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들이 성차별을 반대하는 집단행동에 나서게 될 때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이 집단행동에 반대하는 집단행동이 유발될 수도 있으며, 공권력 또한 누구의 편을 들게 될지 대충 짐작이 간다. 결국 양측의 의견 대립으로 쓸모없는 논쟁만 벌어지고 오히려 사회적 수준은 퇴보하면서 마무리 될 공산도 커 보인다.
하지만 지레 겁먹고 주저앉을 이유는 없다. 모두가 그래왔다면 역사는 단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래의 입장을 정했고, 공개적으로 발표한다.

1. 나는 이 사건을 통해 여성들이 겪게 된 충격과 공포에 적극 공감하며,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2. 이 사건으로 인해 집단 행동이 발발한다면, 그 집단 행동을 지지할 것이다.
3. 이 집단 행동에 반대하는 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 반대할 것이며, 그들이 무의미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설득할 예정이다.
4. 아무쪼록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발생하는 모든 사회적인 현상을 통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성차별적 인식과 행동들이 조금이라도 감소하길 기원한다.
5. 이 사회가 이 모양이 되도록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만연해온 성차별에 대해 별다른 목소리도 내지 못하던 과거를 반성하고 참회한다. 앞으론 그러지 않을 생각이다.

그리고 모든 전후관계를 떠나 불시에 찾아온 사건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떠난 피해자 분의 죽음에 가슴 깊은 슬픔을 느끼며, 조의를 빈다.

또한, 그 분의 죽음을 통해 충격과 공포를 느꼈을 내가 아는, 또 알지 못하는 수많은 여성들의 심정에 공감하며, 작으나마 위로를 전하고 싶다.
끝으로 이 사건을 통해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마무리 하겠다.
세상이 이래선 안 되는 거다. 이런 세상에서는 살아가고 싶지 않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