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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통의 시대: 제발 질문 좀 받읍시다

  • 입력 2016.05.04 14:08
  • 기자명 비더슈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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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머리가 좋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기억을 하지, 머리 나쁘면 기억도 못 해요.”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월 13일에 있었던 신년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질의응답 시간에 기자들이 여러 개의 질문을 한꺼번에 하자 던진 농담이었다. 회견장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막상 이 기자회견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질문을 기억한 것은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라, ‘질문이 사전에 정해져 있어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자회견 도중 국민TV는 뉴스K 페이스북을 통해 기자들의 질문 순서와 그 질문 내용을 모두 공개했다. 유출된 문건과 기자회견의 순서는 정확히 일치했다. 이 순서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기자회견은 춘추관이라는 무대에서 펼쳐지는 일종의 연극에 불과했다.
일단 공식적으로 청와대는 질문 내용을 미리 받아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출입기자들과 협의해 질문을 10개 남짓으로 한정했고, 질문의 순서와 내용은 기자들끼리 알아서 정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2014년 1월 기자회견 당시에도 비슷한 논란이 있었다. 청와대가 기자들에게 미리 질문을 받은 뒤, 홍보수석실이 상세하게 답변을 넣어 일종의 대본을 만들었다는 논란이었다.
기자들과 대통령은 철저하게 이 각본에 따라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당시 기자회견 직후 이 대본이 외부로 유출되었고 기자들의 질문 내용, 질문의 순서, 대통령의 답변이 정확하게 일치해 ‘기자회견 연출’ 논란이 일었다.
더 심각한 문제도 있다. 이번 정권 들어 기자회견의 횟수 자체가 지나치게 줄어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2월 취임한 이후 1년 가까이 기자회견을 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첫 기자회견은 2014년 1월에 있었다.
어느새 국무회의가 기자회견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국무회의 본연의 목적인 대통령과 각 장관 사이의 의견 충돌, 조율, 합의의 과정 따위는 없다. 대통령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이게 기사로 나가고, 장관들은 열심히 받아 적고 대답만 하다 돌아오는 게 전부다.



박근혜 정부 3년, 소통과 합의는 없다
꼭 기자회견의 문제만은 아니다. 국정 운영 전반에 소통이 없고 꽉 막혀 있다는 신호는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얼마 전 더불어민주당으로 자리를 옮겨 5선에 성공한 진영 의원의 사례를 보자. 진영 의원은 박근혜 정부에서 보건복지부장관을 했었는데, 정부의 기초연금 공약 파기에 반발하다 결국 사임까지 하게 됐다.


진영 장관은 박근혜 대통령의 기초연금 공약을 직접 설계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 공약을 파기하는 중대한 사안에 대해, 설계자인 주무 장관과 대통령이 제대로 대화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 해석해도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청와대 ‘문고리 권력’ 이야기도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법에 의해 제대로 선임된 장관이나 총리가 아닌 다른 인물들이 실질적으로 국정을 장악하고 있으며, 이들이 대통령과 소통하는 유일한 인물들이라는 점이 결국 문고리 권력 파동의 핵심 아니었던가.
‘진실한 사람’ 논란도 마찬가지다. 대통령 입맛에 맞는 사람만 옆에 두겠다는 이야기다. 유승민 의원은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다”라는 말 한 마디 때문에 원내대표에서 쫓겨났다. 자신의 소신에 따라 직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정부에 얼마나 남았는가.



그밖에도 지난 3년, 수많은 장면들이 머릿속에 스친다. 국회에서 “살려달라”고 외치던 세월호 유가족에게 대통령은 시선 한 번 돌리지 않았다. 시청광장에 모인 시민 앞에 놓인 것은 차벽과 물대포와 캡사이신이었다. 메르스 사태는 “살려야 한다”라는 불후의 글귀 하나만을 남긴 채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소통과 합의의 정치는 없었다. 명령과 복종만이 남은 ‘공주의 정치’가 박근혜 정권 3년을 상징하고 있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본인의 정치 스타일에 대한 이야기다.



야당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대통령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 시대 전체가 불통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집권여당의 거의 유일한 대권주자로 꼽히는 김무성 의원을 보자.
어린 기자들뿐 아니라 동료 의원에게까지도 마구 반말을 던지는 그다. 새누리당 출입기자가 질문을 하자 “너는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라고 답한 사실은 유명하다. “왜 회의를 공개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내 마음입니다”라고 대답한 적도 있었다.



김재원 의원이 ‘NLL 대화록 사전 입수 발언’을 유출했다는 소문이 돌자, 김무성 대표에게 “형님, 맹세코 저는 아닙니다”라는 문자를 보냈다는 사실이 공개돼 ‘조폭 정치’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김무성 의원의 뒤엔 ‘킹무성’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킹. ‘불통의 정치’를 상징하는 수식어다.
제1야당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다. 김종인 대표의 행보를 보자. 그는 정청래 의원 컷오프에 반발하는 사람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당사를 빠져나갔다. 이해찬 의원 컷오프에 대해서는 “정무적 판단에 다른 이유가 뭐가 필요하냐”며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답했다. 본인의 비례 2번 공천에 대해서는 “그게 할 말이 뭐가 있냐”며 역정을 내기까지 했다.


비례 공천 논란은 비대위원들이 직접 자택에 찾아가고, 문재인 대표가 상경해 해명한 이후에야 해결됐다. 반말로 던지는 대답, 소통하지 않는 정치. 김종인 대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김종인 대표 역시 ‘짜르’라는 권위주의적인 별명을 얻지 않았던가.
다른 정당은 어떤가?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의 스리슬쩍 넘어가는 선문답이 있다. 무색무취의 정치인, 그는 무엇 하나 제대로 답한 적이 없다. 대답을 하는 척 하지만 그것 역시 불통이다.
‘중식이밴드 논란’을 대처하는 정의당의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당 게시판이 온갖 논란으로 들끓는 동안, 공식적으로 당 차원에서는 한 마디도 답변이 나오지 않았다.
꼭 정치인들만의 문제일까? 특정 정치인을 광신도처럼 지지하는 수많은 사람들 역시 이 시대 흐름에 있어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빠’와 ‘까’로 상징되는 이들이 넘쳐나는 시대 아닌가.



바야흐로 짜르와 킹, 공주의 시대다
일본에는 ‘부라사가리(ぶらさがり) 회견’이라는 게 있다. 총리가 관저를 오가는 사이 하루 두 번, 기자들과 짧게 만나는 것을 ‘부라사가리 회견’이라고 한다. 일본 총리들은 몸이 많이 아프거나, 절대로 외부에 말해선 안 되는 사안이 있는 때를 제외하고는 이렇게 하루 두 번, 반드시 기자들과 만난다.
정책을 홍보하기 위해 오토바이까지 타고 다니며 여러 방송에 출연한다는 유럽 장관들의 이야기도 있었다. 106개의 질문을 한 자리에서 5시간 동안 소화하며 최장 기자회견 기록을 세웠다는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이야기도 들은 바 있다.
얼마 전 어버이연합 기자회견이 논란이 되었다. 추선희 사무총장이 질문을 받지 않고 기자회견장을 떠나자, JTBC 기자들이 분통을 터트린 것이다. 현장 기자들 사이에선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기자회견을 한다고 불렀으면 질문을 받아야 할 거 아니야!"



질의응답을 거부한 추선희 어버이연합 사무총장에 항의하는 JTBC 기자. ⓒ 미디어몽구


이 장면을 보며, 비슷한 장면이 하나 떠올랐다. 올해 초, 유일호 경제부총리가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할 때였다. 15분간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한 유 부총리는 질의응답을 받지 않고 회견장을 나섰다. 그때 기자들 사이에서 비슷한 말이 터져 나왔었다.


"질의응답이 없으면 어떡해요. 질의응답을 받으세요."


설득과 합의는 언제나 길고 복잡한 과정이다. 서로 다른 입장에 서서, 서로 다른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들끼리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기가 쉬운 일이겠는가. 그래서 때로 민주주의는 ‘귀찮은 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 ‘귀찮음’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단순히 하루에 한 번 날 잡고 투표할 수 있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아니다. 진정한 민주주의의 핵심은 ‘질문할 수 있는 권리’다. 민주사회는 어떤 질문이든 던질 수 있는 국민과, 어떤 질문이든 대답할 수 있는 정치인의 합작품이다.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기초연금이나 메르스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본인의 자유다. 김무성 의원이나 김종인 대표를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다. NLL 대화록이나 컷오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 역시 본인의 자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어떤 방법으로 정책이 입안되고, 법이 만들어지고, 국가를 운영하는지 그 ‘방법’이다. 어떻게 의견을 듣고 그 의견을 어떻게 국정에 반영하는지, 민주주의는 그 ‘과정의 예술’이 아닌가.
국민은 정치인에게 설명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하고, 정치인은 국민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정치인’에게는 어떠한 설명도 요구하지 않는 국민과, 질문을 “쓸데없는 소리”로 치부하는 정치인들. 그 사이에 민주주의가 피어날 현실적 틈은 존재할 수 없다.
짜르와 킹, 공주로 상징되는 시대.
독선과 불통, 오만의 시대.


"질의응답이 없으면 어떻게 해요. 질의응답을 받으세요."


어쩌면, 이 시대에 던지는 항변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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