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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통신, 한국정부의 형제복지원 은폐 사실을 보도하다

  • 입력 2016.04.29 12:27
  • 수정 2016.04.29 13:44
  • 기자명 뉴스페퍼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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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BS



형제복지원 : 한국 정부는 사건을 은폐하고 싶다
검은색 교복을 입은 14세 소년은 자기 발끝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서 있었다. 경찰관이 빵 한 쪽을 훔치지 않았느냐며 추궁해오자 가슴이 쿵쾅거렸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최승우 씨는 이후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할 때면 눈물을 쏟아낸다. 경찰관은 소년의 바지를 끌어내리고 성기 부근에서 라이터를 껐다 켰다 했고, 결국 소년은 짓지도 않은 죄를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곤봉을 든 두 남자가 소년을 끌고 간 곳은 산속에 위치한 형제복지원. 현대 한국의 가장 끔찍한 인권 유린 사태 가운데 하나가 벌어졌던 곳이다.
최승우 씨가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갔던 1982년의 그 밤, 숙소의 경비원은 그를 강간했고 이후 그런 일은 몇 번이고 반복됐다. 그는 강제 노역과 구타로 점철된 지옥 같은 5년을 보내면서, 맞아 죽은 남녀 원생들의 시신이 쓰레기처럼 실려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형제복지원 전경 ⓒ 연합뉴스


최승우 씨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거리에서 시설로 끌려간 수천 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당시 한국의 독재 정부는 올림픽을 국제 사회에서 근대 국가로 인정받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 때문에 ‘눈앞에서 치워버려야 할’ 이들은 노숙자, 주정뱅이들이었지만 대부분은 미성년자와 장애인이었다. AP통신이 수백 건의 기밀문서와 당시 관계자, 원생들의 인터뷰를 통해 파악한 바에 따르면, 가장 규모가 컸던 형제복지원을 비롯한 이른바 ‘부랑자 수용 시설’에서 일어났던 학대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정도가 심하고 광범위했다.
또한, 정부 최고위급 인사가 나서 문제를 덮었던 탓에 형제복지원에서 일어난 살인과 강간에 대해 지금까지 그 누구도 책임을 지거나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AP통신의 취재를 통해 드러났다. 앞서 두 차례의 조사 시도 때 이를 저지했던 고위 관료들은 이후 승승장구했고, 그중 한 사람은 여전히 집권당의 자문 역할을 맡고 있다. 당시 원생들의 노예 노동으로 만들어진 물건은 유럽과 일본 등 세계 각지로 팔려나갔고, 당시 형제복지원의 소유주였던 가족은 2년 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복지 시설을 운영하고 있었다.
한국이 2018년 두 번째 올림픽 개최를 앞둔 오늘날에도 수천 명의 원생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으며, 지금까지 보상은커녕 가해자들로부터 공개적인 시인과 사과도 받지 못했다. 피해자들 가운데 소수가 목소리를 높이며 재조사를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한국의 현 정부는 사건의 재조명을 피하고 있다. 증거가 너무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야당 국회의원의 조사 요구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안정태 행정자치부 사회통합지원과장은 하나의 인권 유린 사태에 집중하는 것이 정부에 재정적으로 부담이 되며 좋지 않은 전례를 남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2000년대 중반 한시적으로 운영되었던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문제를 제기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국전쟁 이후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개별 사례 하나하나에 대해 모두 법을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과거를 잊을 수 없다. 한 원생은 수개월 간 국회 앞에서 정의를 요구하며 1인 침묵시위를 하기도 했다. 최승우 씨는 몇 차례나 자살 시도를 했고, 지금은 매주 심리 치료를 받고 있다.


“정부는 계속해서 묻으려고만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어떻게 맞서야 하죠? 우리가 목소리를 낸들, 누가 들어줬겠습니까?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너무나 절실해서 이렇게 울부짖고 있습니다. 제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그곳은 지옥이었다
한때 고아원이었던 형제복지원은 한창때 부산에 20여 개의 공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목공품, 금속가공품, 의류, 신발 등 다양한 물건이 대부분 임금을 받지 못하고 강제로 일하던 원생들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높은 콘크리트 건물이 줄지어 올라가면서 원생들의 존재는 높은 벽 뒤로 묻혔고, 이들은 감시견을 끌고 몽둥이를 든 경비원들의 감시 속에 그곳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 벽 너머에서 일어난 끔찍한 일은 한국의 근대사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형제복지원에서 강제 노역을 하고 있는 원생들 ⓒ 한국일보


한국은 당시 40년에 가까운 가혹한 일제 통치와 뒤이어 나라 전체를 잿더미로 만든 한국전쟁의 여파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민주화 이전,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한국은 경제 성장에만 지나치게 집중한 군부 독재자들의 지배하에 있었다.
1975년, 현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경찰과 지방 관청에 거리의 부랑자 문제를 해결해 도시를 ‘정화’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경찰은 상점 주인들의 도움을 받아 걸인, 껌과 자잘한 물건들을 파는 노점상, 장애인, 미아와 학교에 다니지 않는 청소년, 반정부 전단을 갖고 있는 대학생을 포함한 반체제 인사 등을 잡아들였다.
이렇게 붙잡힌 사람들은 전국 36개 시설에 수용되었다. AP가 입수한 정부 문건에 따르면, 1986년이 되자 이렇게 수용된 인원은 1만6천 명에 달했다. 5년 전 8천6백 명보다 많이 증가한 수치였다.
형제복지원에는 4천 명에 달하는 원생들이 있었다. 하지만 90%가량이 정부가 제시한 ‘부랑자’의 조건에 맞지 않았고, 따라서 애초에 갇혀있을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게 검사 출신 김용원 변호사의 말이다. 그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담당했던 당시 복지원의 기록과 인터뷰 내용을 검토한 끝에 이런 결론에 이르렀지만, 조사는 이후 윗선의 지시로 중단되었다.
형제복지원의 내막은 책임자의 보조 노릇을 하며 사정을 좀 더 잘 알 수 있었던 원생 이채식(46) 씨의 증언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AP는 이채식 씨의 증언 내용을 정부 문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씨는 13세 때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킨 후 형제복지원으로 보내졌다. 복지원에서 처음 일을 맡았던 곳은 의료실이었다. 하루 두 차례, 이 씨와 동료 네 사람은 원생들의 상처에 소독약을 붓고 집게로 구더기를 집어내는 일을 했다. 이들 가운데 정식 의료 훈련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이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어요. 지옥 안의 지옥이었죠. 죽어가는 환자를 그냥 내버려두기도 했습니다.”


원생 중에서도 강한 사람은 약자를 강간하거나 구타했고 음식을 빼앗기도 했다고 이 씨는 말한다. 이 씨도 의료동 간수에게 강간을 당한 후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

1년 후, 이 씨는 경비 책임자 김광석의 개인 보조가 되었다. 김광석 역시 원생 출신이었지만 원장에게 충성해 권력을 얻은 인물이었다. 많은 원생은 김광석이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이었다고 기억한다. AP는 김광석을 찾으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다부진 작은 키, 그을린 피부의 김광석은 매일 같이 ‘교정실’에서 원생들을 구타했다. 종종 사람이 죽어 나가기도 했다. 이 씨는 김광석이 하루 두 번 원장에게 보고할 환자, 사망자 수를 집계할 때도 함께 했다. 사람이 하루에 너덧 명씩 사람이 죽어 나가는 날이 종종 있었다.
이 씨가 직접 묘사한 복지원의 실상은 이 시설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또 일상적으로 사악한 곳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어떤 날은 김광석이 아침 조깅을 하는 박인근 원장에게 접근해 밤새 원생 한 명이 맞아 죽었다고 보고하는 것을 듣기도 했다. 박 원장은 김광석에게 복지원 담장 밖 뒷산에 시체를 묻으라고 지시했다.



헌신적인 사회복지가로 남은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
형제복지원에서의 폭력은 강제 노동에 기반을 둔 대규모 수익 사업의 그림자 아래서 자행됐다. 복지원 내 공장은 명목상 원생들의 직업 훈련소였다. 그러나 AP가 단독 입수한 부산시청 문건에 따르면, 1986년 말에 이르자 공장 중 11곳이 수익을 내고 있었다.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


이 문건에는 형제복지원이 명시되지 않은 기간 동안 새벽부터 밤까지 일한 1천 명 이상의 원생들에게 지금 화폐 가치로 170만 달러에 달하는 임금을 지불했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김용원 변호사는 관련 문건과 인터뷰를 통해 4천여 명의 형제복지원 원생 대다수가 임금도 받지 못하고 노동력을 착취당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당시 조사는 정부의 지시로 조기에 마무리되었지만, 그때 인터뷰한 100명의 원생 중 임금을 받았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AP가 만난 원생 20명 중에서도 복지원 시절에 임금을 받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중에 조금이나마 돈을 받은 사람은 3명뿐이었다.
성인들은 복지원 안팎의 건설 공사장에서 일했다. 아이들은 흙을 나르거나 벽을 쌓는 일에 동원되기도 했지만, 주로 볼펜이나 낚시용 바늘을 만들었다.
복지원에서 만들어진 제품 가운데는 외국과 연관된 것들도 있었다. 박인근 원장의 자서전에 따르면 봉제 공장에서 만든 셔츠는 유럽으로 팔려나갔고, 1980년대 미국 등 해외 시장에 의류를 수출하던 대우의 직원들이 원생들을 교육하기도 했다고 한다. 박 원장은 대우에서 나온 직원이 복지원과 파트너십을 체결하기 전 작업장을 둘러보기도 했다고 썼지만, 대우인터내셔널 홍보팀의 김진호 씨는 당시 기록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 같은 세부사항은 확인해줄 수 없다고 말했다.
1970년대에 수감 생활을 했던 원생들은 일본 수출용으로 낚싯바늘에 낚싯줄을 연결해 일본어가 쓰인 상자에 담아 포장하느라 밤늦게까지 일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형제복지원에서 8년간 생활했던 김희곤 씨는 1970년대 초반, 이 상자들이 불량품 판정을 받고 대량 반품되어 돌아왔을 때 동료들과 함께 심하게 얻어맞았다고 했다. 1975년부터 1980년까지 수감 생활을 했던 박경보 씨는 ‘국제상사’라는 로고가 새겨진 운동화 바닥을 기억한다. 지금은 사라진 국제상사는 1970, 80년대 미국과 유럽으로 신발을 수출하던 회사였다.
이런 식의 운영이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원생들을 제외한 모두가 이익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방 공무원들은 관할 내 부랑자들을 수용해둘 시설이 필요했기 때문에 원생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고 재정적으로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점검을 해야 하는 규정이 있었음에도 매년 형제복지원과 계약을 갱신했다. 복지원은 원생 수를 기준으로 정부 보조금을 받았기 때문에 경찰에 더 많은 부랑자를 잡아들여 달라고 부추겼다는 사실도 조사에서 드러났다. 경찰관들이 잡아넣은 부랑자 수에 따라 승진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부산시청 관계자 두 사람은 복지원이 30년 전에 문을 닫았기 때문에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부산경찰청의 허귀용 대변인 역시 같은 이유로 세부 사항을 확인해줄 수 없다고 했다.
복지원의 소유주였던 박인근 원장은 사회복지 관련 표창을 두 번이나 받았고 정부 자문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1985년에는 박 원장 버전의 복지원 이야기, 즉 ‘밑바닥 인생’을 보살핀 헌신적인 영웅의 이야기가 TV 드라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박 원장은 이후 횡령을 포함한 사소한 혐의 몇 가지로 기소되어 잠깐 옥살이를 했지만, 형제복지원의 일로는 처벌받은 적이 없다. 1987년에 이르러서야 형제복지원은 수사 대상이 됐고, 당시 조사관들은 박 원장의 사무실 금고에서 오늘날 화폐 가치로 500만 달러에 이르는 미국 달러와 엔화, 예금증서를 찾아냈다.
박 원장은 자서전과 법원 심리, 관계자들과의 대화에서 모든 범법 행위 사실을 부인했으며, 그저 정부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는 태도를 고수했다. AP는 가족과 지인, 활동가들을 통해 박 원장과의 접촉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AP는 대신 형제복지원의 2인자였던 임영순과 전화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임영순은 박 원장의 처남으로 현재 호주에서 개신교 목사로 살아가고 있다. 그는 형제복지원의 비리와 폭력, 강제 노동에 대한 이야기에 발끈하면서, 박 원장이 길거리에서 말썽꾼들을 없애 부산을 발전시킨 ‘헌신적인’ 사회복지가라고 주장했다.
임 씨는 복지원 내에서 구타에 의한 사망 사건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이는 원생들 사이의 다툼에서 비롯된 일이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시설의 사망률이 높았던 이유는 이미 신체적,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사람들이 복지원에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어차피 길에서 죽었을 사람들이라고요.”




"저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박인근 원장이 복지원 운영으로 돈을 긁어모으는 동안, 사망자 수는 늘어만 갔고 원생들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다.
복지원에서의 둘째 날, 최승우 씨는 전날 밤 성폭행의 충격으로 정신이 멍한 상태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목욕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경비원이 한 여자 원생의 머리채를 잡고 끌어내 머리에서 피가 날 때까지 몽둥이로 마구 때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나뭇잎마냥 떨면서 그 자리에 서 있었어요. 그날 저녁 다시 강간을 당하면서도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했습니다.”


또 한 번은 간수 7명이 한 사람을 때려눕히는 장면도 목격했다. 이들은 소리를 지르는 남자에게 푸른색 담요를 씌우고 마구 구타했다. 담요에 피가 배어 나왔다. 담요 속에서 맞아 죽은 남자는 눈이 뒤로 돌아가 있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 한종선 씨가 그린 그림


복지원의 자체 집계에 따르면 1975년에서 1986년 사이 사망자는 513명이었으나, 실제 사망자 수는 분명히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용원 변호사가 인터뷰한 원생들은 복지원 관계자들이 도주를 우려해 사람이 거의 사망에 이를 때까지 병원에 보내주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복지원은 박 원장의 왕국이었고, 폭력은 박 원장의 지배 수단이었습니다. 사람이 매일같이 맞아 죽는 곳에 감금되어 있다 보면, 강제 노역이나 학대, 강간에 대해 불평할 여유는 없죠.”

김용원 변호사


정부 기록에 따르면, 대부분의 원생들이 복지원 입소 당시에는 비교적 건강한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나 1985년에는 최소 15명이, 1986년에는 22명이 입소 한 달만에 사망했다.

김용원 변호사가 수집한 복지원 내부 문건과 인터뷰 기록에 따르면, 1985년부터 86년 사이에 기록으로 남은 180건의 사망증명서는 모두 정명국이라는 의사 한 사람이 발급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정 씨는 사망증명서에 사인을 대부분 ‘심부전’이나 ‘쇠약’으로 적어 넣었다.
형제복지원의 하루는 해가 뜨기도 전에 시작됐다. 원생들은 새벽 5시 반 원내 교회의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지는 기도 시간에 맞춰 일어나야 했다. 기도 후, 아침 구보가 끝나면 원생들은 아침 식사를 하고 작업장이나 건설 현장으로 향했다.
시청 공무원이나 외국 선교사, 자원 봉사자들이 시설을 방문하는 날이면, 특별히 선발된 건강한 원생들이 ‘접대용’ 복지원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수 시간에 걸쳐 준비 작업을 했다. 그럴 때면 나머지 원생들은 경비원의 감시 하에 숙소에 갇힌 채, 아무 것도 모르는 외부인들이 시설을 살펴보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보았다.


“우리는 감옥에 갇힌 신세였어요. 하지만 우리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형제복지원 피해자 최승우 씨


오후 6시가 되어 숙소의 문이 잠기면 간수들은 자기 담당 구역 내 60-100명의 아이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강간도 종종 일어났다.
한때 복지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부산의 한 학교 교장은 당시 원생들이 자신의 의지에 반해 감금되어 있었음을 인정했고, 복지원을 대규모 강제 수용소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평판을 걱정해 익명을 요구하면서도, 복지원의 관행을 옹호하는 태도를 고수했다. 그는 다루기 힘든 인간들, 그것도 억지로 끌려온 수 천명의 원생들로 가득 찬 시설을 운영하려면 심한 폭력과 군대식 규율밖에는 방법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1980년, 9세의 나이로 부산 기차역에서 경찰에게 끌려 복지원에 들어온 박선이 씨는 탈출에 성공한 극소수 중 한 사람이다. 박 씨는 복지원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가장 가혹한 종류의 폭력이 탈출을 시도한 자들에게 가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복지원에서 5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는 동안 박 씨는 “내 인생이 영원히 이 상태로 이어지고 결국 복지원 안에서 죽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박 씨는 다른 여자 원생 5명과 함께 공장에서 훔쳐온 망가진 톱으로 밤마다 2층 숙소 창문의 쇠창살을 조금씩 잘라냈다. 아침이 되면 껌으로 창살을 도로 붙여두었다. 오랜 작업 결과, 마침내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올 수 있었고, 깨진 유리를 박아 넣은 담장을 넘어 뒷산으로 도망쳤다.
박 씨가 문산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의 모습을 본 아버지는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그저 죽고 싶었었습니다”
형제복지원의 몰락은 우연한 계기로 시작됐다.
울산지검으로 막 발령을 받았던 김용원 변호사는 꿩사냥을 하던 도중 가이드로부터 인근 산 속에 나무 몽둥이를 들고 대형 경비견을 끌며 죄수들을 지키고 선 경비원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김 씨가 그 장소를 찾아갔을 때, 경비원들은 부산 형제복지원 원장의 목장을 짓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즉시 ‘엄청나게 심각한 범죄’의 현장을 발견했음을 직감했다.
1987년 1월의 어느 추운 밤, 김 씨는 경찰관 10명을 이끌고 형제복지원을 급습했다. 높은 담장, 무거운 철제 대문 앞을 지키고 서있던 경비원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시설 내부의 초만원 기숙사에서는 영양 실조 상태로 얻어맞은 흔적이 역력한 원생들이 발견됐다. 원생들은 예기치 못한 손님들의 방문에 벌떡 일어나 깍듯하게 군대식 경례를 붙였다.


“여기는 복지 시설이 아니라 강제 수용소다,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요.”


지금은 검찰을 떠나 서울의 한 로펌에서 파트너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김용원 씨는 지저분한 병동에 기침하고 신음하며 누워있던 사람들이 “그저 죽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고 회상한다.
체포된 박인근 원장은 김 씨의 상사인 부산지검장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다음 날, 2014년 고인이 된 당시 김주호 당시 부산시장이 김 씨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와 박 원장을 석방해 달라고 부탁했다. 김 씨는 정중하게 거절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후로 수사의 고비고비마다 올림픽을 목전에 두고 국제적인 망신거리가 될 것을 우려한 윗선의 방해가 이어졌다. 박정희 대통령 암살 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당시 대통령 역시 민주화 시위대에 또 다른 스캔들이라는 빌미를 주고 싶어할 리 없었다.
검찰 내부 문건에는 청와대가 김용원 검사의 수사를 저지하고 처벌 수위를 낮추기 위해 수 차례 압력을 가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김 씨는 정기적으로 청와대 관계자들에게 직접 연락해 수사를 확대하지 않겠다며 윗선을 안심시켜야 했다.
이후 법무부 장관까지 지낸 박희태 당시 부산지검장은 수사 규모를 축소하기 위해 끈질기게 수사팀을 압박했다. 김용원 검사는 원생 한 명 한 명을 모두 인터뷰할 계획이었지만, 지검장이 만류했다. 현재 집권 새누리당의 상임고문인 박희태 씨는 AP의 인터뷰 요청을 거듭 거절했다. 박 씨가 수사에 대한 세부 사항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박 씨 개인 비서의 전언이다.
갖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김 검사는 박인근 원장이 1985년과 86년에만 현재 가치로 300만 달러에 해당하는 돈을 횡령했음을 입증하는 은행 기록을 입수하는 데 성공했다. 박 원장이 횡령한 돈은 정부가 원생들에게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제공하고 시설을 관리하는 데 쓰라고 지급한 보조금 1000만 달러 중 일부였다. 그러나 부산지검장의 지시에 따라 횡령 액수를 절반 이하로 적을 수 밖에 없었다. 당시 현행법 아래서 종신형을 피할 수 있는 액수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윗선에서는 또한 박 원장을 비롯한 관계자 전원에 형제복지원 전체에 만연했던 학대 혐의를 적용할 수 없도록 압력을 가했다. 김 검사가 꿩사냥 도중 우연히 발견한 건설 현장에서의 폭력으로 혐의를 제한하라는 것이었다.
김용원 검사는 박인근 원장에 대해 15년형을 구형했다. 1989년, 기나긴 법정 공방 끝에 대법원은 박 원장에게 횡령과 건설, 외환법 등의 위반에 대해 2년 6개월형을 선고했다. 학대 관련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가 선고됐다. 복지원 간수 중에서는 단 두 사람이 각각 1년 6개월형과 8개월형을 선고받았다.
수감 생활을 마친 박인근 원장은 그 후에도 복지 시설 운영과 부동산 판매를 통해 부를 쌓았다. AP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형제복지원 자리는 2001년 한 건설회사가 현재 화폐 가치로 약 2700만 달러에 매입했다. 박 씨의 딸이 운영하던 비행 청소년들을 위한 대안학교는 2013년에 문을 닫았다. 박 씨 가족은 운영하던 중증 장애인 수용 시설을 2014년에 와서야 매각했다.



“그걸 어떻게 잊겠습니까”
형제복지원의 유산은 여전히 남아 있다.
복지원은 1988년에 문을 닫았지만, 1990년대에 건설 현장의 인부들이 복지원 뒷산에서 백골이 된 시체 약 100구를 발견하기도 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인부 이진섭 씨는 유골이 담요로 덮여 있고 봉분이 없는 것으로 보아 매장이 약식으로 서둘러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당시 발견된 유해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형제복지원 ⓒ 경향신문


얼마 전 원생이었던 최승우 씨와 이채식 씨는 옛 형제복지원 자리를 찾았다. 지금은 아파트 건물이 높이 솟아있고, 옛 흔적을 알아볼 수 있는 곳이라고는 콘크리트로 덮인 저수지 자리뿐이었다. 두 사람 모두 간수들이 시체를 산 속으로 실어나르던 곳을 기억해 냈다.
이 씨가 가파른 언덕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직도 시체 수백 구가 묻혀있을 겁니다.”


형제복지원에서 나온 원생들은 노숙자가 되거나, 쉼터, 정신병원 등으로 흩어졌다. 많은 이들이 알콜 중독, 우울증, 분노, 수치심과 가난에 시달리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최 씨의 등에는 큰 문신이 새겨져 있다. 복지원에서 나온 후 조직폭력단 생활을 했던 흔적이다. 경찰관을 폭행한 죄로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 이향직 씨의 자필 편지


막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몇 안 되는 원생들이 원하는 것은 정의다. 감금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을 잡아다 가두라고 경찰을 부추긴 공무원들이 그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하길 원한다.


“얻어맞던 고통, 시체, 막노동, 공포…그 모든 나쁜 기억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죽는 날까지 벗어나지 못할 거예요.”

형제복지원 피해자 이채식 씨

원문 : AP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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