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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비로소, 세월호의 목소리를 읽는다 : 모든 연구자에게

  • 입력 2016.04.16 14:20
  • 수정 2016.04.16 14:35
  • 기자명 309동12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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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2년의 시간이 흘러, ‘2016년’ 4월 16일이다. 2년 전 나는 대학의 연구실에 있었다. 모니터 한 켠에 띄워둔 뉴스 속보 창을 계속 새로고침 해 나가면서 논문을 썼다. 지금은 어린이집에 간 아이의 방에 홀로 앉아 논문 아닌 글을 쓴다. 내 연구실 자리에는 새로운 젊은 연구자가 들어와 논문을 쓰고 있을 것이다. 작년에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책을 쓰고서는 대학에서의 삶을 모두 그만두었다. 그래서 대학의 연구실이 아닌, 아이가 어질러 놓은 집의 난잡한 이곳저곳에 자리를 잡고 이런저런 글을 쓰며 산다. 지난 2년 동안 나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2008년에 인문학 석사과정에 입학하고서는 작년, 그러니까 2015년 겨울까지 나는 대학의 연구실에 줄곧 있었다. 거기에서 논문을 읽었고, 논문을 썼다. 웹툰도 보고, 영화도 보고, 가끔은 넥센을 응원하기 위해 야구 중계도 보곤 했지만, 그래도 읽고 쓰는 두 가지 일을 가장 많이 했다. ‘좋은’ 논문을 ‘많이’ 썼다고는 말 못하겠다. 박사과정 수료를 앞둔 2011년부터 1년에 한 편을 간신히 투고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딱히 피인용 지수가 높은 편도 아니었고 학계의 주목을 받은 바도 없다. 하지만 나의 논문이 관련 연구사에 ‘한 줄’을 더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그러면서 ‘좋은 연구자’는 아니어도 ‘평범한 연구자’는 될 것이라고, 스스로 믿었다.
지난주에는 ‘세월호 2년, 진실과 기억을 위한 연대’라는 포럼에 다녀왔다. 여러 발표들이 있었지만, 역사문제연구소의 젊은 연구자가 발표한 ‘세월호와 연구자의 거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임광순 선생은 세월호 유가족의 구술을 채록하는 일을 계속해 왔다고 했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세월호 참사 이후 연구자들은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지 못 했다. 글이라는 도구를 통해 실천을 하는 데 실패했다. 변호사와 문인들, 사회학자, 신학자 등 여러 주체들이 ‘집단적’ 접근을 시도했지만 인문학 연구자들은 참사의 충격을 개인으로서 마주하는 데 그쳤다. 인문학 연구자들은 지속적인 대응을 하지도 못 했고, 감정적 부채를 느끼면서도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지도 못 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읽기, 말하기, 쓰기도 중요하지만 ‘듣기’를 먼저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 연구자 집단의 정체성으로 참사를 마주하고, 또 연구자 서로를 토닥여 줄 수 있다.” (임광순, <세월호와 연구자의 거리>, 2016.4.를 요약.)
그의 발표를 들으며 나는 어떤 단어들을 두서없이 적어나갔다. 발표가 끝나고 내가 마주한 단어들은 다음과 같았다. ‘논문’, ‘학진’, ‘논문 이외의 글쓰기’, ‘좋은 연구자’, ‘나쁜 연구자’, ‘생계’
나는 언제나 ‘좋은 연구자’가 되고 싶었다. 그 방법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명확했다. 학술진흥재단의 등재지에 보다 많은 논문을 투고하고 게재 승인을 받는 것이다. 주변에서는 나에게 대학에서 살아남고 싶다면 1년에 적어도 4편 이상의 논문을 쓰고 1권 이상의 단행본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최근 3년의 연구실적을 가득 채워 두어야 어느 대학에든 이력서를 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학술진흥재단의 등재지에 게재한 논문의 개수가 그대로 나의 미래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연구실에서 무언가 ‘쓴다’라는 행위는 대개 논문으로만 귀결되었다. 내가 아는 주변의 연구자들도 가끔 쓰는 일기 같은 소소한 기록을 제외하고는 논문만 썼다. 사실 그것만 쓰기에도 벅찼다. 그러다보니 우리 사이에는 어떠한 자기검열이 생겨났다. ‘논문 이외의 글’을 쓰는 것이 연구자답지 못 한 행위, 말하자면 외도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 예컨대 평론을 쓴다든지, 연구 주제와 관계없는 포럼에서 발표하고 토론한다든지, 아니면 어떤 성명서 같은 것을 낸다든지 하는 모든 글쓰기에 벽을 쌓아나갔다. 내 주변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든, 생계가 나를 위협하는 일만 아니면 연구실에 머물렀다. 그렇게 연구를 한답시고 눈 감고 귀 막으면서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스스로 격리되는 편을 택했다.


포럼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세월호’를 받아들이는 방식 역시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성적이었다. 주변 연구자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선장을 비판하거나, 희생자를 애도하거나,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박민규가 쓴 <눈먼자들의 국가>를 읽으면서도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고민하지 않았다. 문인들은 그렇게 자신들이 가장 잘하는 방식으로 기민하게 연대했지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잠시 고민하다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고 말았다. 언젠가 작은 연구단체에서 24시간 단식을 제의해 와서 그에 응한 것이 내가 기억하는 전부다.
물론 내가 그랬다는 것이지 모든 인문학 연구자들이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가슴 아파했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했다. 크고 작은 세미나가 열렸고 다양한 지면에 여러 글들이 발표 되었다.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이기도 했고, 연대하기 위해 손을 내민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움직임은 집단화, 지속화 되어 나타나지 못 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논문을 쓰기 위해 바빴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러한 행위에 거부감이 있었다.
사실 대학의 정규직이 아닌 연구자들에게 주변을 둘러보라 말하는 것은 가혹한 일이 된다. 강의와 연구가 생계를 담보해 주지 못 하는 까닭이다. 논문을 한 편 학회에 투고한다고 해도 심사비, 게재비, 가입비, 연회비, 원고지 사용료, 이런 명목으로 내야 할 돈이 적지 않다. 반면 들어오는 돈은 전무하다. 연구하는 데 걸린 시간과 노력을 보상해 주는 것은 온전히 자기 자신의 만족감뿐이다.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다면 강의와 연구에만 시간을 쏟을 수도 없다. 생계를 위한 어떤 아르바이트를, 다른 방식의 노동을, 반드시 해야만 한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가족에게 손을 벌려야 한다. 한 명의 박사가 태어나는 데는 온 가족의 희생이 필요하다.

대학은 연구자에게 얼마나 많은 연구를 했는지 증명하라고 말한다. 대학에서 요구하는 연구 실적이란 연구 분야와 관련된 논문을 학술진흥재단의 등재지, 혹은 등재후보지에 얼마나 많이 투고했느냐 하는 것이다. 이 계량화 된 제도 안에서 연구자가 할 수 있는 ‘글쓰기’는 논문 이외에는 없다. 세월호 포럼에서 발표된 글들은 그저 자신과 주변의 기억에만 남을 것이다. 그리고 포럼의 발표에서 인용된 여러 계간지의 글들 역시, ‘실적’으로 남지 않는다. 아마 많은 이들이 참 좋은 글을 잘 썼네 근데 이 사람 자기 논문은 안 쓰나, 하고 안쓰러워할지 모른다. 제도 안에서 허락된 글쓰기만이 자신이 연구자임을 증명해 주는 시대가 되었다.
젊은 연구자들은 계속해서 대학과 학술진흥재단 간에 긴밀하게 구축된 제도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더욱 공고해져 간다. 하지만 가혹한 ‘제도’와 볼모로 잡힌 ‘생계’를 핑계로 연구실에서만 삶을 살아갈 수는 없다. 연구자 역시 세상의 일원이다. 주변의 소리를 ‘들어야’하고, 그것을 ‘말’하고, ‘써야’한다. 그러한 삶의 태도를 가질 때 비로소, ‘좋은 연구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나는 스스로를 평범한 연구자였다고 믿었지만 이제는 가장 나쁜 연구자였다고, 다시 규정한다. 나는 나쁜 연구자였다.

포럼이 끝나고 일어서려는데 옆 자리에 앳된 얼굴이 보였다. 내가 인사를 건네자 그는 자신을 대학생이라고 소개했다. 포럼에 참석한 사람은 많지 않았고 그나마 대개는 내가 얼굴을 아는 동료연구자들이었다. 사실 연구자들이 주최한 여러 형태의 행사가 대중에게 흥행하는 일은 별로 없다. 학회에 가 보아도 사회자와 발표자, 토론자, 이렇게 몇몇 사람만 앉아 있는 경우도 종종 본다. 나는 그에게 오늘 이 자리에서 가장 귀한 사람이네요 와 주어서 정말 고맙습니다, 하고 말했다. 포럼 광고를 보고 직접 발걸음까지 해 준 것이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런데 그는 나에게 굳은 얼굴로 “왜 이렇게 사람이 적은가요?”하고 물었다. 딱히 답할 말이 없었다. 연구자들조차 별로 오지 않은 자리였다. 어물어물 하다가 서로 짧은 만남을 마무리했다.
나는 이 글을 읽고 “너만 그렇게 살았어, 그러니까 일반화 하지 말아줘.”라고 불편해 할 연구자들이 많기를 바란다. 왜, 라고 묻는 젊은 학생들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연구자들이 많다면, 그것은 다행하고 감사한 일이다. 나는 ‘연구’를 핑계로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고민하지 않으며 살아왔다. 그래서 2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세월호의 목소리를 들으려 한다는 것이 더없이 부끄럽다. 비로소, 듣고 말하고 쓰려고 한다. 이제 더 이상 대학의 연구자는 아니지만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서, 그리고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세상에 귀를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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