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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식이밴드는 여혐밴드인가?

  • 입력 2016.04.04 15:42
  • 기자명 물뚝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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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식이 밴드 ⓒ Mnet




중식이 밴드는 여혐 밴드인가?
이 질문은 그리 쉬운 질문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나 명확해서 논란의 여지도 없는 문제로 보이기도 하겠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고민 자체를 하기 싫은 의미 없는 주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따져볼 가치는 있다.
애석한 것은 이 논란에서 그렇다 아니다로 갈려 확신에 차 서로 싸우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서로 똑같이 이 문제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거기다가 선거가 겹치고 공당의 문제가 끼게 되니, 얘기는 자꾸 다른 쪽으로 흘러가버리기 일쑤고.. 좀 답답한 일이기도 하다.
해서 따져보기로 하자. 과연 결론은 어떻게 나오게 될까?




사실관계
중식이 밴드는 이번 선거에서 정의당의 총선 테마송 관련 협약을 맺은 인디밴드다. 정중식, 김민호, 박진용, 장범근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중 정중식이 보컬, 작사, 작곡을 맡는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던 중, 특히 ‘야동을 보다가’라는 곡과 ‘Sunday Seoul’ 등의 가사가 문제가 되어 여혐밴드 논란이 제기 되었고, 작사/작곡을 담당하는 정중식의 사과문이 올라왔다.

중식이 밴드 – 나무위키 (각 곡의 가사를 확인할 수 있다.)

중식이 밴드 사과문 링크

(가사와 사과문 모두 필독을 권한다.)

뒤이어 정의당 게시판에서는 이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벌어지게 된다. 정의당 여성위원회의 반응까지 나가게 되면 문제가 너무 복잡해지므로 일단 여기까지의 사건을 놓고 과연 이 논란의 핵심은 무엇이고 답은 무엇인가를 따져보기로 하자.




여혐이란?
여혐은 여성혐오의 준말이기는 하지만, 단순이 누군가 어떤 여성을 혐오한다는 의미와는 매우 다른 말이다. 문제를 제기한 측의 정의는 대략,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지 못하는 사고방식과 그 사고방식이 표출되는 말과 행동’ 정도인 것 같다.
내 인식체계에 따르자면 이 정의는 여혐보다는 오히려 ‘성차별, 성차별적 인식, 성차별적 행동’이라는 말이 더 정확할 것 같은데, 하지만 요즘에는 여혐이라는 단어가 더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중식이 밴드 사과문 中


이 정의에 따르면 정중식의 사과문에서 “저는 아마도 여자를 혐오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라는 진술은 문제의 핵심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된다. 여성혐오라는 단어가 지닌 현재의 뜻이 아니라,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의미만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단어의 뜻을 비틀어 개그를 치려고 한 것이 아니라면, 정중식은 문제를 제기한 측이 사용하는 ‘여혐’이라는 단어의 뜻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중식이 밴드의 노래(앞서 언급한 두 곡을 중심으로), 혹은 정중식 본인, 아니면 중식이 밴드 전체가 여혐인가 하는 것이 남는다. 중식이 밴드의 곡이 여성혐오적 창작물이라면, 그 곡을 쓴 정중식이나 밴드 전체가 여혐으로 비난받을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앞에 언급된 두 곡이 과연 여혐, 즉 성차별적 창작물인가 하는 점을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창작물의 문제
오해하기 쉬운 게 하나 있다. ‘야동을 보다가’라는 노래에는 ‘리벤지 포르노’가 소재로 등장한다. ‘Sunday Seoul’에는 빚내서 성형하고 빚 갚으려고 몸을 파는 소녀들이 등장한다.
참고로 리벤지 포르노는 연인 사이에서 찍어둔 섹스 관련 동영상을 헤어진 다음에 복수 차원에서 유포해 버리는 것, 그렇게 유포된 영상을 말한다. 이는 명백하게 불법적인 행동이며, 그 영상은 불법적인 행동의 결과물이다. 그것은 아무 관계없는 제3자의 입장에서도 보는 것 자체가 문제적 행동이 되는 일이다. (애석한 일이지만 이런 용어도 모르는 사람이 꽤 많다. 그게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가사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성욕을 달래고자 불법 동영상을 다운 받아 봤는데 하필 그게 전 여자친구가 나와 헤어진 다음에 다른 남자를 만나서 찍은 영상이었고, 그게 불법으로 유출되어 내 앞에 나타난 상황인 것이다. 그걸 보면서 슬프기도 하고 화도 나지만 결국 난 외롭다는 내용이다.
이런 소재가 사용된다고 해서 이 작품이 ‘여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소재나 문장, 혹은 어휘를 사용한다고 해서 여혐이 되지는 않는다. 살인을 소재로 사용한 예술작품이 인명을 경시하는 작품이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만약 이렇게 소재나 문장, 어휘를 통제하려고 든다면 그것은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할 소지가 있다. 극단적으로 표현해서 리벤지 포르노를 비판하는 글조차 못 쓰게 될 수도 있다. 그게 무슨 꼴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창작물이 여혐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기는 좀 이르다. 저 가사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정중식 본인은 아니다. 자전적 기법으로 쓰이긴 했지만, 창작물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작가 자신과 동치시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러니 캐릭터와 실존인물 정중식을 나눠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작품의 주인공은 불법 동영상을 다운받아 보고 있다. 그게 리벤지 포르노라는 사실조차 별다른 인식이 없이 수용한다. 하필 거기에 자신의 옛 여자친구가 나왔기 때문에 더욱 슬퍼질 뿐이다. 그런 와중에도 저렇게 리벤지 포르노의 주인공이 되어 세상에 노출된 자신의 옛 여친의 안위에는 별 관심이 가지 않는다. 단지 자신의 성기가 영상 속의 남자보다도 크다고 안심을 한다. 그러면서 최종적으로 나는 그냥 외로워서 이런 거나 보고 있는 찌질한 놈이라고 자괴감을 느끼고 있다.
이 캐릭터는 우리 사회의 현실 속에서 무수히 많이 존재하는 찌질한 남성의 캐릭터이다. 여혐이라는 단어 자체를 모르고 리벤지 포르노의 해악도 모르고 있다. 이게 여성에게 어떤 가해를 하게 되는 일인지에도 관심이 없고, 심지어 그게 자신의 옛 여친임에도 그러하다. 영상 속의 남성, 아마도 영상 유출이라는 불법 행위를 주도한 범죄자일 그 남성에 대해서도, 그런 범죄행위에 대한 인식보다는 자신은 해보지도 못한 체위를 구사하는 ‘죤놔작은 변태 섹’이라는 인식뿐이다.
이 캐릭터에게 여성은 그런 존재인 것이다. 재수없어 나같이 찌질한 놈 만났다가 나버리고 떠나서도 나보다 죤놔 작은 변태 섹을 만나 이런 영상이나 찍히는 그런 인생 말이다.
여성혐오라는 관점을 논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저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여혐 남성이다. 더 쉽게 평하자면, 여성을 혐오하는 남성이라는 뜻이 아니라, 여혐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성평등에 대한 개념이 없는 남성이라는 뜻이다. 모르는 것이다. 그런 게 뭔지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여혐종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여혐종자를 작품 속에 등장시킨 정중식은 어떤가? 물론 내가 어떤 콘텐츠를 만드는 데 살인범을 등장시켰다고 해서 내가 살인을 미화한다는 결론을 낼 수는 없다. 여혐종자를 주인공으로 가사를 썼다고 해서 정중식이 여혐작사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어떤 캐릭터를 등장시키거나 관계없이 작품이 어떤 서사의 구조를 가지게 되냐는 것이다. 영화 ‘악마를 보았다’에는 잔인한 연쇄 살인범이 등장하지만 그 서사의 구조는 그런 행위가 얼마나 인간성을 파괴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감독은 살인이 얼마나 끔찍한 범죄인가를 잘 알고 서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중식은 자신이 만들어낸 주인공이 여혐이라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걸로 보인다. 즉 작가가 이 캐릭터는 찌질함과 동시에 여성을 차별하고, 여성을 대상화하고, 심지어 리벤지 포르노가 범죄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그런 인간임을 인식하고 설정한 뒤 그를 통해 서사를 제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 사회에 흔한 찌질한 남성, 작가 자신과 아주 닮은 남성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어떤 외로움을 겪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자괴감을 겪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의 존재는 그저 작은 소품일 뿐이다.
그런 사실은 그가 쓴 반성문에서도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이 잘못했던 지점으로 언급한 문장,

“사회적 갈등을 가지고 있는 여성의 예로는 성노동자만을 선택해 가사를 만든 점”

이 그 증거가 되는데, 여성 성노동자만을 선택해서 가사로 만드는 것은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소재만을 택해서도 얼마든지 서사 구조를 통해 제어할 수 있지만, 그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는 얘기이다.
결론을 내리자면 작사가 정중식은 ‘여성을 혐오하는 사람’이 아니라, 또한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그런 게 왜 문제가 되는지를 모르는 사람일 뿐이다. 만약 그에게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존재입니까? 라고 물으면 당연히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는 그에 반하는 행동을, 아무런 문제점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수히 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살인이 얼마나 흉악한 범죄인지 모르는 작가가, 자신이 처한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인을 저질러야 하는 상황을 그리면서, 살인을 보지 말고, 저 사람이 처한 고통을 봐달라고, 그걸 그리고 싶었다고 얘기하는 상황과 유사한 것이다.
결국 정중식은 자신이 잘 모르는 민감한 소재들을 자신의 서사에 등장시켜 전혀 다른 목적(자신을 비롯한 이 땅의 젊은 남성들이 겪는 고통과 외로움과 자괴감)을 위해 서사 구조를 만들어낸 그런 작가인 것이다.
‘Sunday seoul’의 가사도 마찬가지다. 힘없는 노동자의 자식이며 빚까지 내서 대학을 나온 남자는 피씨방 알바를 한다.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가난한 부모 밑에서 힘들게 학교를 나온 여성들 역시 비정규직에 시달린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우리 사회의 일반 관습은 몸 파는 여성들을 떠올린다. 반대로 남성들도 빚내서 몸 만들고 호빠에서 몸을 판다. 그러나 그건 특수한 일부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해 버린다. 이게 바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혐, 즉 성차별적 인식인 것이다.



Un Women에서 제작한 광고 이미지. 우리 사회에 성차별적 인식이 얼마나 만연한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즉 저 가사의 전개는 남자는 가난해도 열심히 일하지만, 여자는 힘들면 성형하고 몸 팔러 다닌다는 성차별적인 관습적 사고방식의 결과인 것이다. 이걸 요즘에는 여혐이라고 부르는 것뿐이다. 이건 옳지 않다. 다만 우리 사회에 너무 일반적으로 너무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사고방식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게 문제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게 현실이고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다. 뭔가 나쁜 짓을 하고 있다기보다는 그게 나쁘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가사의 주인공 역시 그러하고, 그런 주인공을 등장시킨 정중식 역시 그걸 모르고 있다.
그 모름이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그 모름은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아주 광범위하게, 수많은 남성들 사이에 퍼져 있다.




감성의 문제
많은 경우, 이 곡들이 여혐 콘텐츠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이유가, 그 가사를 보면서 여성들이 겪게 될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인 경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맞는 말이긴 한데 부족한 표현이다. 어떤 작품을 보면서 내가 고통을 느끼는 것이 그 작품의 문제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작가가 의도한 것일 수도 있고, 또는 나만의 개인적인 경험 때문일 수도 있다.
리벤지 포르노가 언급되면 수많은 여성들이 고통과 공포를 느낄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어떤 여성이라도 그런 범죄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소재가 사용되었다고 해서 당장 그 작품을 여혐 콘텐츠로 낙인 찍을 수는 없다.
반대로 중식이 밴드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의견에서, 당신 여성들이 그런 감성적인 고통을 호소하는 것은 알겠지만 그게 이성적인 이유를 구성하지 못하니 감성 같은 소리 그만두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걸 가지고 또 남성과 여성은 사고방식이 다르고 고통을 느끼는 지점이 다르고, 이런 차이로 귀결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그렇게 지엽말단적인 소재와 문구, 어휘 가지고 고통을 느끼는 것이야 별거 아니겠지만, 서사 구조 자체에 문제가 생기면 이건 심각한 상황이다. 그 가사를 보면서, 저런 문제적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그리면서도 그 문제에 대한 자각이 없는 밴드의 작사가가 존재하고, 그런 밴드가 티비에도 출연을 하고 나아가 공당, 그것도 진보를 자처하는 정당의 선거 테마송 협약을 맺게 되는 과정.
그런 모든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 사회에 여혐이, 즉 성차별적인 요소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고, 그런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야 하는 내 입장이 얼마나 난감한 것인가를 깨닫는 고통이라면 어떻게 될까?
이건 감성의 문제가 아니다. 현실에서 부딪히게 되는 생존의 고통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다수의 여성들은 지금도 그런 고통을 매일 매일의 현실 속에서 직접 대면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잣대의 문제
그렇게 세밀한 기준으로 따지면 이 사회에 여혐 아닌 콘텐츠가 어디 있겠냐는 항변도 가능하다.
맞다. 우리 사회에는 매우 긴 시간 동안 여성을 차별적으로 대우하는 관습이 널리 퍼져 있었고, 그렇게 사회적으로 성차별이 만연되면 우리들의 일상생활 구석구석에 성차별적인 언행이 스며들어 있게 된다. 그리고 현실을 묘사하는 대부분의 작품들에도 그 성차별적인 관행들이 녹아 들어간다. 그런 성차별적인 관행들을 최신 트렌드에 맞게 여혐이라는 어휘로 표현하자면 우리사회의 절대 다수의 콘텐츠들은 여혐의 성향을 내포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왜 중식이 밴드만 가지고 그러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것도 맞다. 흔히 말하는 트로트 가요들, 인기 아이돌의 노래에 나오는 상황, 드라마, 영화, 곳곳에 무의식적으로 여혐적 묘사가 산재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당신이라면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왜 중식이 밴드만 가지고 뭐라 하느냐고 묻기 이전에 우리 사회의 콘텐츠들이 거의 대부분 여혐이라면 어떻게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지, 상대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중식이 밴드가 슈스케에 나오고 홍대에서 공연을 하고 뭐 이런 것은 괜찮다. 그러나 자칭 진보정당 정의당의 테마송 협약을 맺게 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이 상황에서는 문제가 중식이 밴드에서 정의당으로 옮겨 가게 된다.




이것은 잣대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여혐을 걱정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정의당에 대해서 더 호의적으로 더 높은 기준을 적용해 준 것뿐이다. 쉽게 말해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반응이 나온 것이다. 적어도 당신들이라면 이런 문제에 대해 좀더 나은, 좀더 진보된 태도를 견지해 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호소에 가깝다.




태도의 문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성차별 문제, 그러니까 여혐의 문제를 제기하는 쪽의 태도가 좋지 않다는 얘길 한다. 이 점, 일정부분 동의한다. 메갈리아 문제에서부터 사람들은 그런 지적을 많이 했었다. ‘미러링’이라는 방식의 문제, 혐오에 혐오로 대응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지적, 폭력적인 언어의 사용, 이런 것들 말이다.
문제가 없다고 하지는 못하겠다. 무례한 태도, 특히 SNS 상에서 보이는 태도들은 불쾌감을 유발한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시라. 기존의 관행에 문제가 있을 때 사람들은 그걸 비판하고 관련자들을 비난하며 제도나 인력을 교체해서 사회를 바꾸자고 주장한다. 그게 작게 보면 개혁이고 크게 보면 진보다.
이렇게 진보적인 목소리가 높아질 때, 사회에서는 어떤 반응이 나왔었는가? 한 때 언론을 도배했던 ‘개혁에 대한 피로감’이 만연해진다. 다 좋은데, 당신들이 하는 얘기 다 맞는데, 너무 시끄럽고 불편하고 어색하다, 좀 천천히 하면 안 되나? 좀 더 예의 바르게 하면 안되나? 이런 반론 말이다.
거기에 더해, 우리 사회에 문제가 있는 부분이 어디 이거 한 곳이냐, 왜 하필 이 문제만 가지고 그렇게 목청을 높이고 사람들을 모욕하고 그러는가 하는 점잖은 반론도 많았다. 그게 발전하면 당신들 폭도 아니냐는 얘기로 가게 된다.
문제의 핵심은 옳고 그름이다. 우리 사회에는 성차별, 즉 여혐이 만연해 있고, 그건 틀린 것이며 고쳐야 할 일이다. 이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그걸 고치는 방식,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은 그 다음의 문제다. 그 방식과 태도가 폭력적이고 불쾌감을 유발하니 자제하라는 얘기는 고치기 싫다는 잠재심리가 유발하는 표면적인 반론일 뿐이다.
정치에 있어서 새누리당이 기득권이었다면 성차별 문제에 있어서는 남성들이 기득권이다. 자신을 진보로 자리매김하고 기득권에 저항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기득권인 분야에서는 개혁과 진보에 저항하는 자체 모순을 유발하고 있는 거 아니냐는 지적이 가능하다.
뭔가를 고치려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폭력적으로 지적하지 않는다. 말이 안 통하고 못 알아듣고 딴 소리 하고 변화에 저항하면서 대화가 단절되기 시작하면 말이 폭력이 되고, 개인적인 제안은 집단적인 저항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최소한 성차별의 문제, 여혐의 문제에 있어서는 지금 중식이 밴드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기득권의 입장에서 변화에 저항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 모순된 태도를 보이는 중이라면 조금은 폭력적인 언어로 비판 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우리는 다수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 성차별은, 여혐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통일 문제가 그럴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 지역차별 문제가 그럴 수도 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상황이 있고, 자신의 문제가 제일 시급하다고 느끼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입장은 정리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만약 불합리한 구조로 인해 피해를 보는 약자라면, 그래서 이 사회의 불합리한 구조를 고쳐보고 싶어 노력을 하고 있다면, 최소한의 연대 의식은 가질 필요가 있다.




내가 직면한 문제 말고 다른 문제로, 나와 비슷한 고민에 빠져 나와 비슷한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연대를 생각해야 한다. 연대는 서로 간의 이해에서 시작된다. 내 문제를 설명하는 것만큼 상대의 문제를 들어볼 줄 알아야 한다.
정의당을 지지해서 약자들의 처우를 개선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라면, 똑같이 여성들이 직면한 성차별, 여성혐오 문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연대는 이렇게 상호간의 이해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지금 당장의 선거가 급해서 일방적으로 당신들이 조금 더 참으라고,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폭력이다. 상대의 문제가 내 문제보다 작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정의당의 경우 테마송 협약을 맺은 밴드를 교체하는 데 있어서 실무적인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 것까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번 사안처럼, 분명히 성차별이나 여혐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작가를 선택했다는 최소한의 책임이 있는 사안이라면, 즉각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고, 사정을 설명하고 가능한 최선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태도 정도는 가져 주는 것이 좋다. 그 정도 인식은 되는 정당이 아니던가?
물론 이러한, 상호간의 이해를 위한 노력을 할 의무는 성차별 문제를 제기하는 쪽에도 똑같이 부과된다. 그 문제가 현대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 중 거의 선두그룹에 포함된 문제는 맞지만, 모든 사람들이 달라붙어 그 문제만 해결할 수는 없는 법이다. 사회 전 분야가 조금씩 조금씩 상호 보완적으로 발전해야 하는 거라는 세계관에 동의한다면, 여성문제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다른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상호 연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유가 있는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당신들은 다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다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회를 움직이는 진짜 다수집단은 이런 문제에 관심도 없다는 거.. 다들 알고 있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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