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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 입력 2016.04.04 10:30
  • 수정 2016.04.04 10:48
  • 기자명 이선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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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22일 오후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에서 열린 총력결의대회 모습 ⓒ민중의소리

이 글은 나의 반성으로 시작해야겠다. 나는 2011년 한 매체에 글을 썼다. 파업과 장기투쟁 과정에서 노동자와 가족들이 죽어가는데 막을 방법을 몰랐다. 손을 놓고 있을 수 없어서 몇 년 동안 만난 노동자들의 심리 상태를 중심으로 글을 썼다. 취재 기록을 들춰보니 분노, 우울, 상처, 죽음 같은 공통점이 잡혔다. 보강취재를 통해 이들이 겪는 고통은 자세하게 묘사했는데, 그걸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지는 막막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글을 썼다. 죽고 나서야 그들의 삶을 돌아보지 말고 삶을 지켜 죽음을 막자고 호소했다.
글의 주제가 그러다보니 노동자들의 가장 고통스러운 상태를 끄집어내서 썼다. 한 노동자는 파업과 해고 이후 우울증과 심리적인 공황상태를 겪으면서 가족, 특히 아이에게 폭력적인 행동을 한 자신을 원망했다. 아이에게 상처로 남을까봐 걱정하면서 그걸 극복하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증언했다. 나는 그걸 받아썼고, 그의 행동을 글로 묘사했다.
2012년 또 다른 매체에 비슷한 글을 썼다. 대량 해고를 당한 후 공장 점거 파업을 벌인 노동자들의 그 후를 취재했다. 파업과 장기투쟁은 노동자들의 삶에 여러 상처를 남긴다. 심리적인 장애를 겪고, 가족이 해체되고, 극단적으로 자살을 하기도 한다. 그 때도 나는 노동자와 가족들의 증언을 가감 없이 실었다. 아내한테 폭력적으로 대하고, 짜증을 내다가 아이들을 때리고 했다는 증언들. 제 잘못 없이 초래된 상황으로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고, 자괴감과 자책 속에 살고 있는 그들을 돕고 싶었다.

노동자들이 계속 죽어가니까 트라우마를 겪은 노동자를 치유하기 위한 사회적 움직임이 일어났다. 노동자의 건강권을 지키는 의사들과 사회학자, 운동가들은 장기파업 노동자의 상태가 매우 위험하다고 진단했다. 그들이 조사한 결과에는 내가 쓴 글과 비슷한 증언들이 근거로 등장했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약자의 편에서 그들을 보호하고 사회정의를 위해 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열심히 그들의 증언을 기록했고, 가능한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싶었다. 아픔에 공감하는 사람이 제법 있었고 칭찬도 많이 들었다. 내 글을 읽고 후원을 했다는 사람도 있었고, 함께 울었다는 독자도 있었다. 고백하자면 조금 으쓱했다.
그리고 몇 년 후 나는 그 때의 글을 후회하는 반성으로 이 글을 시작하고 있다. 지난 해 과거 노동조합 활동을 했던 한 남성이 데이트폭력의 가해자로 지목되었다. 옛 연인의 SNS 폭로로 시작된 이 사건은 결국 폭로자와 가해자로 지목된 자 사이의 소송전으로 번졌다. 그 둘 뿐 아니라 폭로여성의 편에서 가해 지목자를 비난한 이들 일부도 고소를 당했다.

이 남성은 8년 전 해고를 끝으로 노동조합 활동을 접었고 생활인으로 사는 중이었다. 그러나 폭로 당시 그는 노동운동가, 진보남성, 노조활동가라는 수식어가 붙으며 여론전에서 가중처벌을 받았다. 폭로 여성은 상대방이 데이트폭력을 저질렀다는 근거 중 하나로 아이들에 대한 폭력을 예로 들었다. 아이들이 아빠로 인해 정상적인 건강 상태가 아니라는 서술을 자세하게 했는데 이 때문에 그는 데이트폭력 가해자에 아동학대범이라는 비난까지 받게 되었다.
폭로 사태가 일어난 후 그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보다 아이들에 대한 묘사가 퍼지는 걸 막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폭로자의 증언이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사건을 보도한 언론사, 인터넷 커뮤니티, SNS, 웹사이트마다 아이들의 병력을 잘못 묘사한 대목만이라도 지워달라고 호소했다. 실명으로 폭로된 사건이라 아이들이 노출되었고 이로 인해 받을 상처를 생각하니 끔찍하다고 했다.
하지만 SNS에 그런 관용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과거 그의 상황을 보도한 글들이 폭로자의 증언을 확인하는 근거로 등장했다. 어떤 이는 옛날 기사를 링크하며 그가 폭력의 가해자라는 증거이므로 비난은 정당하다고 했다. 수년 전 자신의 기사가 사실대로 보도되었는지 하나하나 확인하지 못했던 가해 지목자는 예전 글들을 다시 보게 됐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나는 그에 대한 기사가 났던 그 해를 또렷이 기억한다. 우리 사회는 노동자들의 장기 파업에 관심이 없었고 그들이 어떤 고통을 겪는지 알지 못했다. 문제의식을 느낀 전문가들이 조사와 진단을 한 끝에 처음으로 구체적인 숫자가 그들의 고통을 증명했다. 정상인보다 몇 배나 위험한 고위험군의 환자라고 했다. 우울지수가 수치로 표현됐고, 그들이 겪는 일상의 문제를 자세하게 증언하는 자리가 열렸다. 거기에 가해 지목자도 있었다.



노동자들은 처음으로 주목받게 된 자리인 만큼 아픈 상처를 가감 없이 증언하려 노력했고, 운동가들도 최대한 심각하게 고통을 묘사했다. 언론도 마찬가지, 감상적이고 어찌 보면 선정적일 수도 있는 증언들을 고스란히 담아 이들의 고통에 주목하도록 노력했다. 그 보도는 나 같은 사람이 장기투쟁 노동자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적어도 내 주변의 많은 운동권과 활동가들, 약자의 편에 서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고통에 공명했다. 어느 누구도 그들의 증언을 들으며 가정폭력 가해자, 아동학대범이라 비난하지 않았다. 그 때 그들은 피해자였다. 그것도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삶을 파괴당한 가여운 피해자였다.
그들의 사례는 실제 구조적인 가해자인 ‘권력과 자본’에게 책임을 묻는 근거가 되었고, 노동문제에 관심 없는, 혹은 이기적이라 비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세우는 일에 활용되었다. 진보 언론은 약자의 편에 서서 이들의 고통을 보도했다. 여기 이렇게 아픈 사람들이 있다고, 이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고, 해고는 살인이라고. 누구도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똑같은 글을 가리키며 그를 폭력의 가해자라 지목한다. 잘못된 사회구조의 피해자라 했던 사람들 중 누구도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똑같은 행위가 지금 문제라면 그 때는 왜 문제가 아니었을까. 그 때는 피해자성만 보였고, 지금은 가해자성을 발견한 것인가? 그렇다면 둘 중 하나는 필요하다.
인권과 사회적 약자의 보호를 말하면서 가해자를 피해자로 만들만큼 인권감수성이 부족한 그 때의 자신들을 반성하거나, 여전히 이들은 피해자이며 비난이 아닌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하거나. 물론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지금도 그런 기사는 여전하다. 최근까지도 노동자의 정신건강이 위험하다는 기사에는 아이들에게 욕을 하고, 해고의 상처로 가정폭력을 저지르고, 아이를 때리고 있다는 증언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런 기사에 데이트폭력이나 가정폭력, 아동학대 가해자라는 비난은 없다. 연대와 연민을 끌어내려 쓴 기사이고 당연히 피해자로서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반응들이 전부다. 하지만 여기에서 해고자, 장기투쟁이라는 조건만 제거하면 고스란히 범죄이자 가해의 기록이 된다.(그래서 링크는 하지 않는다) 몇 년 후 그들의 아내, 연인, 아이들이 폭력의 가해자라 폭로한다면? 지금의 기사가 그 증거로 활용된다면? 또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게 될 것인가?


나는 그 때 쓴 글들을 후회한다. 사회적 약자이자 피해자인 사람을 돕고자 쓴 글이 가해의 증거로 쓰이는 일을 경험했다. 분명 나도 책임이 있는데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한 무기력함이 남아 있다. 필요할 땐 사람의 고통을 가져다 전시하고, 필요가 없을 땐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상황. 익숙한 광경이다.

그 때 그들의 증언을 우리가 옳다고 믿는 진보적인 세상, 인권감수성 높은 세상을 위한 동력으로 썼던 사람들은 이 사태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노동운동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고, 노조활동이 정당하다는 홍보의 수단으로 이용한 사람들은? 이용이라는 단어가 거슬리는가? 다른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하겠다. 사적인 이익을 위해 악용했다는 말이 아니다. 진심으로 피해자의 곁에서 그들을 위하려는 행동이었고 대의를 위한 노력이었다는 걸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때 모두가 정당하다고 믿었던 일이 지금 부정의의 증거가 되어 있다. 그 때는 구조의 문제이던 것이 지금은 개인의 윤리문제로 남겨졌다. 이 상황에 대해 진보언론, 운동권 모두 침묵한다. 오히려 개인의 윤리를 단죄하는 쪽에 서 있다. 누군가는 그 때의 우리에 책임을 느껴야 하는데 책임지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몇 년 전 해고자의 증언을 두고 그저 폭력일 뿐이라고 비난하는 말에 나는 뭐라고 말할 것인가? 지금 진행되고 있는 똑같은 ‘폭력’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때의 우리는 무엇에 공명했고, 무엇 때문에 아팠던 것일까. 그냥 진보의 동력으로 그들의 고통을 이용하고 치워버린 것인가? 그 때의 우리에 대해 돌아보지 않는 한 운동권이든, 진보언론이든 결국 그런 존재로 남을 것이다. 여전히 진행형인 또 다른 고통들을 위해서라도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이 사태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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