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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강대국이 될 수 없다

  • 입력 2016.03.09 12:30
  • 기자명 김순종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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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이 되기 위한 조건
부국강병(富國强兵),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안보가 굳건한 나라를 가리키는 이 말은 국가라는 집단이 탄생한 이래 거의 모든 나라의 목표로 자리해 왔습니다. 선거철이 되면 흘러나오는 경제활성화 공약과 안보 관련 공약 등도 우리나라를 지금보다 풍요롭고 강한 나라로 만들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약속을 실천해 풍요롭고 안보가 굳건한 나라를 만들어낸 정부는 없습니다. 강한 나라가 되기 위한 의지는 있더라도 이를 현실에서 이루어내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강대국이 되기 위한 보편화된 충분조건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시대마다 강대국이 되기 위한 조건은 다를 수밖에 없고, 이를 이루어낼 방법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강대국들의 성장 과정을 뒤돌아보면 우리는 강대국이 되기 위한 충분조건은 없지만 '필요조건'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어내 강대국이 됐던 국가들, 그들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스페인 : 종교의 자유를 탄압한 결과
16세기 유럽의 최강대국은 스페인이었습니다. 스페인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최초의 제국이었습니다. 16세기 스페인은 북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아프리카 연안에도 식민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동남아시아의 섬나라 필리핀의 이름도 당시 스페인 국왕이었던 펠리페 2세의 이름을 딴 것이라는 점을 볼 때 16세기 스페인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패권국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스페인이라는 패권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두 나라가 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별 볼 일 없는 변방의 섬나라였던 영국과 우리나라 국토 면적의 5분의 2에 불과한 강소국 네덜란드입니다.




16세기 유럽에서는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1517년 루터를 시작으로 칼뱅, 크랜머 등의 종교개혁가들이 가톨릭과 교황청의 타락을 비난하며 신교를 만들었습니다. 16세기 유럽에서는 신교 진영이 점차 그 세를 넓히기 시작하며 종교전쟁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한 역사학자에 따르면 1480년부터 1700년까지 영국은 29회, 프랑스는 34회, 스페인은 36회의 전쟁을 치렀는데, 대부분 종교와 관련돼 있습니다. 이들 전쟁은 당시 가톨릭 수호자를 자처하던 스페인에 의해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스페인의 국왕이던 펠리페 2세는 "만약 나의 아들이 이교도라면 내가 직접 나무를 날라 아들을 화형에 처하겠다"라고 말하기도 할 만큼 가톨릭에 대한 믿음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때문에 그는 이슬람 종교 세력의 확장을 막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치렀고, 신앙의 자유라는 기치를 내걸고 신교를 받아들인 네덜란드 반군을 탄압했습니다. 영국 국교회를 탄압하기 위해 영국과의 일전도 불사했습니다.
스페인은 이 전쟁들에서 오스만 제국에는 승리하지만 영국과 네덜란드에는 패배합니다. 전쟁에 패배한 스페인은 점차 패권국의 지위를 잃어가게 되죠. 반면 스페인에 승리한 영국과 네덜란드는 이후 패권국과 강소국의 길을 걸어갑니다. 약소국이던 영국과 네덜란드가 패권국 스페인에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타종교에 대한 그들의 개방성과 관용성에 있었습니다.



영국 : 종교의 자유 보장 → 기술 혁신으로
1. 레이스 빌트 갈레온
영국과 스페인의 명망을 가른 칼레 해전에서 영국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동성이 강한 함선과 함선에 장착된 다수의 주철대포 때문입니다. 스페인의 함선은 튼튼하고 안정적이었지만, 빠른 기동성과 다수의 대포를 장착한 영국 함선에게 승리할 수는 없었습니다. 영국이 빠른 함선과 값싼 주철 대포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혁신적 사고와 개방성 때문이었습니다.



ⓒ EBS 다큐 프라임



영국의 기동성 있는 함선의 명칭은 레이스 빌트 갈레온입니다. 이 함선은 해적으로 이름이 높은 드레이크와 그의 사촌 형인 존 호킨스가 발명한 것입니다. 이들은 1568년 아프리카와 스페인령 서인도 제도의 상품을 교환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었는데, 신대륙의 황금을 빼돌린다는 혐의로 스페인 함대와 전투를 치르게 됩니다. 이들은 패배합니다. 이후 그들은 스페인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레이스 빌트 갈레온이라는 함선을 만듭니다.
레이스 빌트 갈레온은 혁신적인 배였습니다. 당시 유럽인들은 자연의 힘인 바람을 이용하는 범선과 인간의 근력을 이용해 노를 젓는 방식인 갤리선을 주로 타고 다녔습니다. 여기서 좀 더 진보된 것이 갈레온 선입니다. 갈레온 선은 배의 선미는 높지만 선수 부분이 낮아 배의 안정성이 높습니다. 안정성이 높은 만큼 돛도 더 많이 달 수 있어 속도 역시 빨랐습니다. 레이스 빌트 갈레온은 갈레온을 한층 더 진보시킨 함선이었습니다. 레이스 빌트 갈레온은 선수와 선미를 모두 낮추고 배를 날렵하고 길게 만들어 급회전이 가능하게 제작됐습니다. 전투를 위해 상갑판 밑에 함포들이 들어선 포열 갑판을 확장했습니다. 다른 함선보다 더 많은 포를 장착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레이스 빌트 갈레온은 기존의 어떤 함선보다 빠르고 급회전이 가능하며 화력도 강한 함선이었습니다.

2. 주철대포
빠른 기동성을 가진 함선을 개발했다고 하더라도 당시 가난한 나라였던 영국이 주철대포를 개발하지 못했다면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대포는 비싼 물품이었습니다.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청동대포는 특히 더 비쌌습니다. 청동대포의 장점은 대포 발사시의 엄청난 압력에도 쉽게 파열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생산량이 많지 않고 비싸다는 결정적 단점이 있었습니다. 청동이 거의 나지 않던 영국은 그래서 주철대포를 개발하기 시작합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아버지 헨리 8세는 프랑스의 대포 제조자들을 초대해 수년간 노력한 결과 값싼 주철로 만든 대포를 개발해 냅니다. 이를 통해 영국은 16세기 유럽 대포 시장의 70%를 차지할 만큼 큰 수확을 얻습니다.



주철대포. 국립중앙박물관



어쨌든 청동대포의 제작 비용에 견주어 4분의 1의 비용밖에 들지 않았던 주철대포는 대량생산됐고, 다량의 포를 장착할 수 있었던 레이스 빌트 갈레온에 장착됐습니다. 이 둘의 만남은 칼레 해전에서 스페인의 무적함대에 영국 해군이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가 됩니다. 한데, 영국이 이처럼 혁신을 이루어낼 때 왜 스페인은 아무런 발전이 없었던 것일까요?
사실 펠리페 2세 역시 주철대포를 생산하기 위해 여러 기술자들을 초청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스페인에 기술을 전수해주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스페인의 종교 재판 때문이었습니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비록 신교도지만 가톨릭교도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탄압한 적이 없습니다. 반면 펠리페 2세는 이교도에 대한 종교재판, 마녀사냥, 화형과 고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대포 기술자들은 종교적 차이에 따른 탄압을 두려워해 스페인에 기술을 이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스페인 땅을 밟기도 싫어했습니다.
펠리페 2세와 엘리자베스 1세, 두 국왕의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클 수 있는 차이는 바로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성과 개방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차이점은 두 나라 사이의 기술적 진보에 영향을 미치며, 결국 두 나라의 흥망성쇠를 결정지었습니다.



네덜란드 : 작은 나라가 강소국이 되기까지
네덜란드는 예나 지금이나 무척 작은 나라입니다. 우리나라 경상도만한 면적에 인구도 1600만 명에 불과합니다. 17세기에는 인구수가 지금보다 적어 150~160만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소국이 스페인에 승리하고 독립을 한 것은 역사상 전무후무하다 할 정도로 기록적인 사건입니다. 네덜란드는 강소국이라고 표현하기도 부족할 정도로 강한 나라였습니다. 17세기 중엽 전 세계의 국제 무역선 중 4분의 3이 네덜란드 선박이었고, 브라질, 남아프리카에도 네덜란드인들이 건설한 무역 거점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일본의 나가사키에 건설된 데지마라는 섬도 그들의 무역 거점이었습니다.




16세기, 지금의 벨기에와 네덜란드는 사실상 같은 나라로 부르고뉴 공국에 속해있었습니다. 이는 스페인의 카를 5세가 다스리던 지역인데, 그의 아들 펠리페 2세의 통치에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게 됩니다. 독립전쟁의 시작은 펠리페 2세의 종교적 교조주의 때문이었습니다. 영국 이야기에서도 언급했듯이 펠리페 2세는 가톨릭에 충성을 다하며, 가톨릭 이외의 종교는 모두 이교도로 명명, 철저하게 탄압했습니다. 네덜란드에서도 이는 다를 리가 없었습니다.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식민지가 아니었습니다.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의 초대 총독 오라녜 공 빌럼이 어린 시절부터 스페인 국왕의 영지에서 자랐던 점도 이를 입증합니다. 네덜란드가 독립전쟁을 치르게 된 것은 스페인에 대해 저항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스페인의 국왕이던 펠리페 2세, 더 정확히 말하면 그의 종교적 교조주의에 저항하기 위해서입니다.
펠리페 2세는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네덜란드는 프랑스의 종교개혁자 칼뱅에 의해 창시된 칼뱅주의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펠리페 2세는 이를 묵과하지 않고 칼뱅주의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네덜란드 전역의 종교 문제를 총괄할 주교직을 신설하고 각 개인의 종교생활에 간섭할 뿐 아니라, 심복이던 알바 공작을 네덜란드 총독에 임명해 신교도들을 말살합니다.
알바 공작은 신교도를 탄압하기 위해 특별 종교 법정을 세우고 이를 통해 네덜란드의 지도자들과 신교도들을 합법적으로 말살했습니다. 네덜란드인들이 피의 법정이라 부른 이 법정에서는 불과 2년 동안 네덜란드인 1만 2천 명이 재판을 받았고, 1천 명 이상이 처형됐습니다. 가톨릭교도라고 해도 신교도들에 대한 관용을 주장하면 가차 없이 처형됐습니다. 이에 처음에는 종교의 자유를 바랐던 네덜란드인들이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에 나섭니다. 독립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독립전쟁 중인 1579년 1월 29일, 네덜란드 북부 7개 주는 위트레흐트 동맹을 선포하는데 네덜란드 독립선언과 마찬가지인 위트레흐트 동맹 선언문의 창립 헌장에는 종교적 관용이 명시돼 있습니다.

"누구나 종교의 자유를 가지며, 누구도 종교를 이유로 심문을 받거나 박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이후부터 네덜란드가 독립하는 1648년까지의 역사는 놀랍습니다. 네덜란드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유럽 각지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온 이민자들로 인해 경제력과 기술력을 갖추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독립을 쟁취할 뿐 아니라 경제적 풍요에 기반을 둔 강소국이 됩니다.




네덜란드 :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며 얻은 것들
먼저 네덜란드는 이후 17세기, 바다의 마부라는 별칭을 얻습니다. 이주민들과 네덜란드인들이 함께 유입된 선박 건조기술을 활용해 파격적인 범선 '플류트선'을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플류트선은 속도가 빠르고 건조비가 저렴했습니다. 강력한 해운업 경쟁국이던 영국에서 동일 크기의 쾌속선을 만들려면 1,300파운드가 들었지만, 이들은 800파운드에 쾌속선을 만들었습니다. 이때문에 네덜란드의 화물 운송비 역시 경쟁국들에 비해 3분의 1규모로 저렴했고, 그 결과 네덜란드는 세계 해운업을 평정하게 됩니다.




이민자들의 유입과 함께 얻은 첨단 기술 덕에 설탕 산업과 다이아 산업도 번창합니다. 본래 설탕 산업은 남부의 앤트워프가 중심지였지만 종교적 자유를 찾아 이동하는 인력들과 함께 암스테르담으로 넘어오게 됩니다. 암스테르담은 브라질, 카나리아제도에서 온 원당의 집산지가 됐습니다. 다이아 산업도 번창합니다. 다이아몬드 세공 기술은 유대인이 단연 압도적이었습니다. 종교적 탄압을 피해 네덜란드로 찾아온 유대인들은 암스테르담을 유럽 다이아몬드 산업의 중심지로 만듭니다.
유대인의 주력 업종이던 금융업도 발전합니다. 그리고 금융업에 종사하던 유대인들의 아이디어로 동인도회사, 즉 세계 최초의 주식 기업이 탄생합니다. 1608년에는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가 네덜란드에 등장하며, 17세기 1,000명에 달하는 펀드 매니저가 활동하게 됩니다. 선물거래나 옵션거래 같은 금융기법도 등장합니다. 종교에 대한 개방성과 관용성은 네덜란드를 독립하게 할 뿐 아니라 경제적 부국으로 만들기도 했던 것입니다.
반면 종교적 자유를 탄압하고 불관용성과 폐쇄성으로 일관했던 스페인은 파산을 맞게 됩니다. 금융업과 상업을 담당하던 유대인과 무슬림이 빠져나가자 이들 산업이 몰락하고, 산업의 공동화라는 대가가 찾아온 이유입니다. 스페인은 외국의 금융업자들에게 돈을 빌려야 하는 처지가 됐습니다. 그럼에도 유럽 전역에서 전쟁을 치른 탓에 국가 경제는 급격히 기울게 됩니다.
스페인의 몰락과 네덜란드의 부상이라는 역사의 뒷배경에도 영국의 사례처럼 종교에 대한 개방성과 관용성, 폐쇄성과 불관용성이라는 차이가 존재했던 것입니다.




로마, 몽골, 미국도 다르지 않다
영국과 네덜란드만이 아닙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강대국, 로마와 몽골, 그리고 현재의 미국도 개방성과 관용성이라는 기치 아래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는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에게 연거푸 패배하면서도 그들을 지지해준 동맹 도시국가들에 의해 전투에선 지고 전쟁에선 승리했습니다. 로마가 그들의 이웃이었던 자들에게도 시민권을 나눠주고 심지어 최고 통치권을 부여하는 개방성을 갖고 있었기에 로마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동맹 도시국가들이 끝까지 옆자리를 지켰던 이유입니다.
몽골 역시 때론 피정복민들을 유린하기도 했지만, 저항하지 않는 피정복민들에겐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그들은 피정복민들의 전문성을 높이 평가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이용해 대제국으로 성장했으며, 그들의 수도 카라코룸에는 이질적인 민족과 종교가 한데 어우러져 살았습니다. 현재 세계의 강대국이라 할 미국도 건국 초기 다양한 문화와 전통을 가진 이민자들을 모두 수용하는 개방성을 보였습니다. 이민자들은 다른 문화와 인종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라는 국가의 이름 아래 뭉쳐 전례 없는 강대국을 만들어냈습니다.



선진국.. 될 수 있을까?
살펴본 것처럼, 한 나라의 개방성과 관용성은 강대국이 되기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더라도 필수조건임이 분명합니다. 그간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만들겠다는 약속과 다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 중 개방성과 관용성을 보여준 자들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심지어 나와 다른 이념과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상대를 종북이라고 낙인찍거나 불순세력인 양 취급한 자들도 있습니다. 공당을 해산하거나 자신과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공당의 대표를 찍어 누른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우리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기 위해 적어도 '본인만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역사를 돌아봅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부분의 국가들은 그들 국가에 살아가는 국민은 물론 타 민족에게도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그들에 대해 개방적인 자세를 유지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어떠합니까? 연일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어떠한 집단을, 특정한 개인을 비판하고 있지는 않던가요. 지금 우리의 모습은 개방성과 관용성을 보여줬던 영국과 네덜란드를 닮아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폐쇄성과 불관용성으로 일관하다 몰락을 맞이한 스페인을 닮아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우리 대한민국이 '네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 '아시아의 강소국'이 되기는 아직 힘들 듯합니다. 향후 2년간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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