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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도 사람이다

  • 입력 2016.02.26 13:22
  • 수정 2016.02.26 15:28
  • 기자명 물뚝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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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요즘 들어 자꾸 돌아가신 아부지 얘길 자꾸 하게 되는데.. 생각할수록 참 대단한 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내가 그 분의 사고방식에 그닥 크게 동의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이제와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나와 동시대 사람들에 비해 훨씬 더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아버지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까지 들기도 한다.
대학시절, 아버지는 시골에 계셨기 때문에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으나, 하필 그날 무슨 볼일이 있으셨는지 올라오셨던 탓에 얼굴을 보여드리게 되었는데.. 그날 따라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고 입안이 다 터져서 볼이 팅팅 부은 상태였으니 아버지께서 화들짝 놀래실 만도 했다. 도대체 그게 무슨 꼴이냐고 묻는 아버지께 작심하고 질문을 드렸다.


“사람들이 모이는 공공의 장소에서 여자가 담배를 피는 것과, 그 담배를 피는 여자를 다른 모르는 남자가 야단을 치며 뺨을 때리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큰 잘못인가?”


매우 보수적이고 고지식한 어른이었으니 내가 기대한 답변은 당연히 양쪽 모두 잘못이다, 정도였던 것 같다. 하지만 아버지의 답변은 뜻밖이었다.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자신의 평판을 나쁘게 하는 행동이지만 그건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니 벌받아야 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그런 여자를 야단치겠다고 뺨을 때리는 것은 범죄이며, 처벌받아야 하는 행동이다.”


당시는 80년대 중반이었다. 명색이 진리와 자유의 터전인 대학교 교정에서 여학생이 담배 피우는 모습이 보이면 선배라는 미명하에 남학생들이 가서 막 야단을 치고 심한 경우 뺨을 때리는 모습을 볼 수 있던 시절이었다는 얘기다. 최소한 내 아버지는 당시의 대학생들 일반보다 더 앞선 사고방식을 가지셨던 농부였다.
내 얼굴이 엉망이 된 사건의 전말은 대략 이렇다. 같은 과 선배는 아니지만 나보다 윗 학번이었던 선배 하나와 커피숍에 갈 일이 있었는데, 두어 자리 건너 여학생 둘이 있었고, 그 중의 한 명이 커피숍 안에서 (당시에는 실내금연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었던 시절이다.) 담배를 꺼내 문 것이다.




이 선배라는 작자가 다짜고짜 걸어가 그 여학생의 입에 물려 있던 담배를 빼앗아 바닥에 던져 버리고 뺨을 때려 버린 것이다. 사람들이 웅성거렸으나 아무도 나서지 않았고, 심지어 커피숍 주인까지 머뭇거리는 순간, 내가 나서서 선배를 제지했다.
그랬더니 오히려 나보고 네가 뭔데 나서서 말리느냐, 세상이 이 꼴이 되는 걸 내버려 두자는 얘기냐, 그러고도 네가 이 땅의 대학생이라 할 수 있느냐 뭐 그런 어이없는 질책이 이어졌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내가 한마디 했다.


“야, 이 개새꺄, 모르는 사람 뺨이나 때리는 게 옳은 세상에는 너나 가서 살아라, 씨발놈아.”


그리고 자연스럽게 슬로우 모션으로 난투극이 벌어지고 사람들이 말리고 내 얼굴은 엉망이 되고.. 물론!! 내 얼굴이 그럴 정도면 상대의 신체적 피해는 어느 정도인지 각자 알아서들 생각하시라. (사실은.. 거의 일방적으로 맞았다. 난 싸움 잘 못해.. 흑흑..) 무튼, 전후 사정을 다 들으시더니 아버지는 껄껄 웃으시면서,
“옳은 말을 했는데 맞은 게 좀 억울하겠구나~” 하셨다. 그래서 “저도 몇 대 때렸어요..”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얘길 했다. 요즘 같으면야 당장 경찰 출동하고 폭력행위 등 블라블라로 입건되고 쌍방 합의를 하네 마네 했겠지만 그 시절은 또 그런 거 없다. 대충 코피나 닦고 집에 가는 거지.

난 당시에도 이해가 안 갔었다.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는 정체 모를 예절도 이해가 안 가고, 여자가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는 예절은 더욱 더 이해가 안가고, 아무리 예절을 어기는 행위를 했다 하더라도 모르는 사람이 가서 뺨을 때려서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그 끔찍한 사고 방식도 이해가 안가고, 그걸 내버려 두는 사람들도 이해가 안가고..
나아가 당시 운동권 선배들의 온갖 추한 습속에 대해서는 차마 미안해서 말을 못 옮겨 그렇지, 각 잡고 이빨 풀면 삼박사일을 떠들어도 못 다할 이야기들을 다 지켜본 바 있다. 자신의 행동거지 하나 바르게 다잡지 못하면서 무슨 사회를 바꾸겠다고 나서고, 그걸 또 훈장처럼 내밀고 다니는지..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다.
이건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이 옳고 그른 문제와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다. 아무리 추해 보이는 인간이라 하더라도 옳은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아무리 훌륭해 보이는 인간이라 하더라도 뒤에서는 별 추접한 행동을 다 하더라는 경험은 나로 하여금,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을 가지게 하기도 했었다.
그때 나로 하여금 인간의 본성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들었던 사람들, 지금 여의도 정치판에 금배지 달고 다니는 사람도 있고, 금배지 하나 못 달고 정치 룸펜으로 기웃거리는 친구들도 있고, 저쪽 편으로 넘어가 큰소리 치는 인간들도 있고 온갖 떨거지들이 드글드글하다.


“성호야. 사람이란 말이다. 참 알기 힘든 것이다. 절대 함부로 사람을 믿지 말고, 절대 함부로 사람에게 침 뱉지 말아라. 네가 그 사람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그런 행동을 할 수 있겠니.”


아버지의 말씀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난 그 말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툭하면 사람을 함부로 믿고 툭하면 사람을 함부로 비난하면서 산다. 아마 아버지도 저런 말씀을 하긴 하셨지만 잘 못 지키셨을 거라고 믿고 살 뿐이다.




2부
위 글은 사실 여성이 담배 피우는 얘기에서 시작해서 아버지께서 내게 물려주신 여성관을 얘기하려던 것인데.. 쓸데없이 못난 운동권 사람들 얘기가 떠올라 글이 옆으로 새버렸다.
내가 사람들하고 대화하는 것을 즐기는 습성은 아마도 아버지에게서 제대로 물려받은 것이 거의 확실할 정도로 아버지도 이런 저런 자리만 마련되면 우리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셨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기억나는 이야기들이 있었고.. 사실은 그 시절에 이미 아버지께서도 ‘썩개’ 비슷한 드립을 많이 치셨던 기억이 난다. (이것도 유전이란 말인가!!)




하여간 내가 모르는 여성이 담배 피우는 것을 사적으로 징벌하던 선배와 싸움판을 벌릴 정도로 화를 냈던 것도 아버지 탓이다. 명확하게 기억이 나는 아버지의 여성관은 대략 이랬다.


“남자가 할 일이 있고, 여자가 할 일이 있다. 그러나 남자건 여자건 똑같은 사람이며, 남녀의 구분 이전에 사람이 할 도리를 하는 것이 우선이다.”


내가 반발한 것은 바로 그 부분, 남자가 할 일, 여자가 할 일은 도대체 누가 구분한 것이며, 그 구분은 어떻게 정당화 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남녀의 차이는 대략 근육량의 차이에서 기인한 육체적 힘의 차이 이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지적인 능력, 인내심, 창조성, 현상을 유지하고 생활을 개선하려는 의지, 중독에 저항하는 힘 등은 여자가 더 우월하다는 판단을 가지고 있다. 이건 무슨 중세의 기사들이 가지던 ‘여성 숭배’와는 완전히 다른 현실적인 판단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남녀의 역할 구분에 대한 나의 반론은 아버지의 답변에 무참히 무너지고 말았는데..


“그 구분은 남녀가 서로 상의해서 정하는 것이 맞다.”


20세기 초반(1920년대)에 태어나 일제시대를 겪고, 전쟁을 겪고, 4.19와 5.16을 겪은 한 남자 농부가 저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해가 가시는가? 내가 왜 자꾸 우리 아버지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자랑하는지, 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고추 떨어진다는 얘기가 횡행하던 시절에 내가 어려서부터 요리, 청소, 빨래 등의 가사일을 배우게 된 것도 아버지 때문이다.


“자기 한 몸 살아가면서 필요한 일을 스스로 할 줄 모르면, 그건 제대로 된 어른이라고 할 수가 없다. 누가 해 주더라도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알지 못하면서 받아 먹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어머니는 질색을 하셨지만, 내가 제대로 빨지 못해 때가 덜 빠진 옷이 나오면, 그걸 그대로 입고 나가라고 등을 떠밀던 분이 아버지다. 그걸 입고 나가서 창피한 걸 느껴봐야 다음 번에 빨래를 제대로 하게 된다는 논리였다.
대학시절 자취를 할 때,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미 난 다 해본 일인데 뭐. 새벽에 일어나 신촌시장에 가서 청어를 사다가 연탄불에 구워 아침상을 차려 먹던 자취생은 아마 흔치 않았을 것이다. 그 흐름은 그대로 이어져 음식 만드는 것에 대해 남다른 취미를 가지게 되는 걸로 발전해 온 것이다.
결국 내가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여성관은 한마디로 줄여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다.



“남자건 여자건 똑같은 사람이다.”



그런 시각을 가진 내가 대학이랍시고 들어왔는데 (그전에는 남중남고였으니 뭐..) 여자가 담배 피운다고 따귀를 때리는 미친 놈들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사회 일반의 관점에서 보면 내가 또라이였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건 약과였다. 하나하나 세상을 알아갈수록, 학교건 사회건 회사건 이건 뭐 여자들에게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조선, 아니 조선 이전의 전근대 사회였던 것이다.
도저히 난 딸을 낳아 기를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라고 할 수가 없다. 그냥 말 그대로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여성을 차별한다. 난 우리 집이 매우 보편적인 가정이었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우리 집이 이상한 거였어..
일단 여자들은 낳지를 않는다. 훨씬 뒤에 본 ‘여아 낙태’의 통계는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 이전에 이미 난 태아의 성별을 감별해서 낙태해 버리는 가정을 수도 없이 봤기 때문이다. 그리고 낳아도 가르치지를 않는다. 학비가 쪼들리는 집에서는 딸들은 언제나 남동생이나 오빠를 위해 학업을 포기해야 한다.
가르쳐도 취직이 안 된다. 여자는 비서나 스튜어디스, 아니면 문화예술이나 해야지 무슨 일을 하냐는 거다. 기회 자체를 안 주는데 무슨 일을 하나. 그걸 또 좋다고 단체미팅 상대로 제일 인기 있는 과가 이대 비서학과 아니면 무용과, 또 아니면 무슨 대학 스튜어디스과.. 이게 뭐야 도대체.




결혼을 안 하면 안 하는 대로, 뭐가 잘못되어서 결혼을 안 하냐고 욕을 하고 결혼을 하면 하는 대로 혼수 안 해 온다고 욕을 하고, 혼수 해 가면 잘난 척한다고 욕을 하고, 좋은 옷을 입으면 낭비한다고 욕을 하고, 나쁜 옷을 입으면 여자가 꾸미지도 않는다고 욕을 하고, 여자는 무슨 존재 자체가 욕이냐?
그렇게 살아온 여자들은 이제 나이가 들면 스스로 앞장서서 또 다른 여성들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고부갈등? 그게 무슨 한반도 역사 오천 년 내내 이어지던 꽃 같은 전통인 것처럼 맨날 방송에 나오지만 그게 사실상 사회 전방위적으로 벌어지던 여성차별에 기인한 거라는 핵심은 아무도 말을 안 하던 기억이 난다. 요즘도 안 하지.
학창시절 이런 저런 페미니즘 관련 서적(그땐 그리 많지도 않았다.)들을 찾아 읽어 보고, 여성 투표권이 20세기 들어서야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아 이 세상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인류의 반이며 당시 용어로 민중의 반이었던 여성들에 대한 태도는 이 사회를 뜯어 고치겠다는 운동권 진영에서 더 구리다는 것이었다.
팔구십년대 다 합쳐 여성 총학생회장이 나온 학교가 있는지 모르겠다. 여학생은 맨날 들러리야. 데모하고 돌아와 뒤풀이 자리에서 여자후배에게 술잔 돌리라는 요구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벌어지고, 그보다 더한 말 못 할 일들이 여기저기서 터진다. 학생회 일 잘하던 여자 선배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면 뒤숭숭한 소문이 들려오는데 그건 거의 대부분.. 말 안 해도 알겠지. 여자선배들에게 이런 충격을 얘기하면 돌아오는 얘기는 이렇다.


“그런 문제들(여성차별)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민중해방이 더 우선이니까 블라블라…”


그렇구나.. 그런 거였어. 우리 편의 반을 사람대접도 안 하면서 무슨 사회를 진보시키고 민중을 해방시키고 민족을 통일시키나. 뭐 여자들은 대학도 잘 안 보내니까 실질적으로는 반이 아니었지만, 당시 구로공단을 보면 여성직공들이 훨씬 더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노동 해방을 외치면서도 여성문제를 등한시 하는 것은 또 뭘로 설명할지도 모르겠고..
지들 대학생이라고 공장 여직공들 무시하면서 돈 생기면 방석집(당시에는 그런 거 있었다.)가서 젓가락 두들기며 한복 곱게 차려 입은 언니들하고 어우러지는 자들이 민중 소리는 입에 달고 살고.. 이런 사회 현실이 언제 고쳐지려는지 지켜보고 살아왔다. 이런 얘기를 주변에 꺼내 봐야, 돌아오는 것은 면박뿐이었고, 니가 아직 세상을 모르는구나, 라는 핀잔뿐이어서 언제부터인가는 아예 이런 문제는 입밖에 꺼내지도 않게 되어 버렸다.



"위험합니다! 여자분들은 뒤로 빠져 주세요!"



요즘은 많이 좋아졌다고? 당연히 좋아졌겠지. 벌써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가 말이다. 수십 년이 지났다고. 근데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른 만큼 그만큼 나아졌는가? 절대 아니잖아. 다른 거 다 떠나서 여학생들이 공부 훨씬 잘해서 성적 훨씬 좋은데 왜 그렇게 취직이 안 되는가? 뭐가 좋아진 거야?
그래서 그런거다. 난 메갈리아를 욕할 수가 없다. 그들이 당해온 것이 어떤 일인지를 그나마 관심 있던 내 눈에 너무 잘 보였기 때문에 꽤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욕먹는 미러링이라는 게 여성해방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이건 여성해방을 퇴보시키는 일이건 중요한 게 아니잖은가.
어떤 집단이 그렇게 긴 시간 동안 그렇게 억눌려 살아왔다면, 일단 필요한 것은 숨통을 틔워 주는 거고, 쌍욕이라도 하면서 화풀이라도 해서 분노를 터트리고 1그람이라도 해소할 공간이 있어야 되는 거다. 해방구가 달리 필요한가?
그래도 문제 해결이 안되면 이제 점점 더 과격한 집단이 등장할 거고, 그 과격성은 바로 그 동안 누적되어온 억압과 차별에 정비례할거라는 정도는 누구나 알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렇게 과격하게 나서면 안되지~ 하는 점잖은 충고는 좀 더 있다가 했으면 좋겠다. 그거.. 나도 신물 나게 들었다. 심지어 나도 한 적도 있어.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전두환 정권을 향해 짱돌을 던지면 돌아오는 소리가, 학생들이 배운 사람답게 민주적으로 싸워야지 왜 돌을 던져~ 이런 거였다.
저 쪽에선 최루탄이 직격으로 날아오고 사과탄이 비오듯이 쏟아지고 페퍼포그에 지랄탄이 작렬하는 중인데 보도블럭 반쪽 깨트려 한 번 던졌다고 폭력사범이 되는 건 나였다. 똑같잖아.
근데 이런 소리도 또 맘놓고 못한다. 이게 어떤 한 집단이 처절하게 차별을 당하고 억압을 당하면 그 반동으로 어떤 집단은 엄청난 이익을 보게 되어 있기 마련. 그 강고한 연대는 절대 자신들이 손해보길 원치 않으며, 그런 차별의 문제를 제기하는 자를 자신들의 이익을 넘보는 강탈자로 간주해서 합심해 저항하기 마련이다.
그 저항의 최전선에는 언제나 무시와 묵살이 자리하기 마련이다. 이 무시와 묵살의 벽을 넘는 것이 언제나 첫걸음이 되는 것이다.
하여간 이런 얘기 해 봤자 양쪽 진영 모두에게서 좋은 소리 못 들을 거 뻔한데 결국 또 오밤중에 이런 소리 또 올려 놓는다. 난 왜 맨날 이 모냥인지 모르겠다. 그냥 어느 한 편 골라서 입맛에 맞는 소리 살살 해주고 돈이나 벌고 살면 좋을 것을.. 이 모든 것이 다 아부지의 이 한마디 때문이다.


“남자건 여자건 다 똑같은 사람들이여..”


난 내 아이한테 이 얘길 조금 더 확장해서 전달해 줄 생각이다.


“남자건 여자건 흑인이건 백인이건 호남인이건 성소수자건 이주노동자건 다 똑같은 사람들이여.”


그렇다. 내 여성관은 이거다.

그들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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