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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의 분노로 일으키는 전쟁은 반드시 패배한다

  • 입력 2016.02.22 12:20
  • 수정 2016.02.22 12:25
  • 기자명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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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서 만주 지역을 한 번 찾고, 거기서 ‘푸순’이라는 곳을 또 한 번 찾아 보자. 요령성 성도인 선양에서 조금 위쪽의 도시고 석탄 등 지하자원이 풍부하기로 유명한 이곳은, 삼국 시대 요하 동쪽에 늘어선 고구려의 요새 가운데 하나인 신성(新城)으로 비정되기도 했다.
우리는 645년 당 태종이 이번에야말로 고구려를 무너뜨리겠다는 결의로 수십만 대군을 동원해서 쳐들어왔을 때 이 당나라군을 격퇴한 안시성 전투를 흔히 기억하지만, 가장 먼저 당나라 대군과 격돌하고 수 차례 공격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버텨내 안시성의 배후 노릇을 하면서 당군의 기세를 꺾은 신성 전투도 꽤 의미가 있다.
신성 전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지만, 4월 초 처음 신성을 공격한 부대는 당태종의 조카 이도종이 지휘했으니 어쨌든 당의 정예 병력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들은 열흘 동안이나 신성에 매달리고도 이 성을 점령하지 못했다. 후에 요동성, 개모성, 백암성 등을 다 깨뜨리고 마지막 후환을 없애겠다는 심산으로 다시 한 번 신성을 두들겼음에도 끝내 신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당나라군은 이 신성 전투를 645년 전쟁의 3대 전투로 회고한다. 그로부터 12년 뒤 또 당나라가 쳐들어왔을 때는 내부 배신자가 내통을 하는 바람에 당나라의 수중에 떨어지긴 했지만, 이 성은 고구려 멸망 후 다시 고구려 부흥의 기치를 쳐들었던 13개 성 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
요동을 두고 벌어진 당나라와 고구려의 혈투는 요동 지역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웠다. 한나라가 고조선을 침략한 이래 요동은 내내 전란이 그치지 않는 지역이었다. 다른 민족으로서는 요동만 차고 앉으면 대륙으로의 발판을 마련한 셈이 되었고, 그러니 중국으로서는 변방이지만 결코 변방일 수 없는 곳이었다. 하다못해 칭기즈칸도 금나라 공격에 실패한 후 돌아가는 길에 가장 믿음직한 장군 제베를 보내 요동을 확보하도록 했고 고려도 요동 지역만은 어떻게 지켜보겠다고 군대를 출동시켰다. 물론 이성계만 좋은 일을 시켰지만.
1618년, 푸순 지역은 또 한 번 전쟁의 구름에 휩싸이게 되었다. 당시 대륙을 지배하던 명나라에 맞서서 여진족의 칸 누르하치가 마침내 타도의 깃발을 치켜든 것이다. 그 첫 전장은 바로 1618년 음력 4월 15일의 푸순이었다. 그로부터 이틀 전 누르하치는 유명한 ‘7대 한(恨)’ 을 발표했다. 누르하치라는 이름은 멧돼지 가죽이라는 뜻의 여진어다. 이 7대 한을 들여다보면 누르하치가 얼마나 돼지 가죽처럼 질기게 참고 또 참으며 살아왔는지를 알 수 있다.
첫째는 "내 조부와 아버지를 죽였다.”는 거다. 억울하게 죽은 게 맞다. 명나라에 충성을 바치던 그들은 명나라에 반기를 든 손녀 사위이자 조카 사위에게 항복을 권하러 들어갔다가 (또는 조카딸을 빼돌리러 갔다가) 억류된 상태였는데, 오랑캐 두 놈 쯤의 목숨은 별로 신경쓰지 않던 명나라 군대가 화공을 퍼붓는 통에 불에 타 죽었다. 청조실록에는 “나의 조부가 무슨 이유로 해를 입었는가. 너희 명나라는 이제 나와 하늘을 함께 하지 못할 원수가 되었다.”고 분노했다고 나온다. 그런데 그 뒤 그의 행동은 그다지 분노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미안해 하는 명나라 사람들로부터 실속을 챙기는 한편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우리가 조선과 국경도 붙어 있으니, 당장 출동해서 일본군을 쓸어버리겠다!”고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되려 조선쪽에서 기겁을 해서 거부하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됐지만, 어쩄든 그는 명나라로부터 또 한 번 충성심을 인정받았다. 이름도 그럴싸한 ‘용호장군’(龍虎將軍) 칭호까지 받았다.


청나라 팔기군

둘째는 '건주여진을 학대하고 다른 부족을 편애한 것'이다. 누르하치는 명나라와의 무역을 독점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그리고 명나라가 임진왜란 파병으로 힘이 빠진 뒤 무력으로 기타 여진족을 위압했다. 원래는 양순한 고양이로 알던 누르하치가 점점 살쾡이가 되고 표범이 돼 가는 모습을 보면서 명나라는 그에게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에는 누르하치에게 사사건건 반항하던 부잔타이 문제도 있었는데, 부잔타이는 여러 번의 항복과 반항을 거부하다 결국 건주위의 라이벌 부족 예허에게 투항했다. 누르하치는 예허 부족장에게 부진타이의 송환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하고, 마침내 예허 공격에 나선다.
본디는 명나라에 가장 반항적이었던 부족이 예허다. 그러나 국제 정세란 게 항상 그렇듯, 영원한 적이란 없다. 예허는 명나라에 매달리는 동시에 그들을 은근히 협박했다. “누르하치를 그냥 두면 요동을 다 뺏길 거다”. 이 말을 들은 명나라는 원래 가장 고분고분했던 건주위의 수장 누르하치에게 경고를 던졌다. 그러니 누르하치로서는 분통이 터질 수 밖에 없는 일이다. 그래도 누르하치는 여기에 대한 답서를 직접 들고 푸순성까지 가서 공손히 전하는 성의를 보였다. 하지만 그 때, 명나라는 이미 누르하치를 최대의 적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가을, 누르하치가 공들여 경작한 땅에 나타난 명나라 군대는 갑자기 모든 만주인을 그 땅에서 추방하겠다고 선언했다. 땀흘려 지은 농사의 가을걷이를 앞두었을 때였다. 누르하치의 부하들은 흥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명나라를 치자고 들고 일어났지만, 누르하치는 그들을 만류했다.

명을 치려면 하늘이 우리를 인정하여 도울 때를 기다려야 한다.

새롭게 부임한 명나라 관리가 얼토당토 않은 핑계로 축하 사절단을 인질로 잡고 죽이니 살리니 하는 일까지 벌어져도 누르하치는 참고 또 참았다. 하지만 그는 명나라에게 경고 한 마디는 남겼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가 될 수 있고 작은 나라도 큰 나라가 될 수 있는 게 하늘의 이치요.

이 사건은 이후 7대 한의 세 번째 항목이 되었다. '영토 협상을 부인하고 쳐들어와 살인을 저질렀다'


청나라의 옛 수도 심양(선양)

1618년 음력 4월 마침내 누르하치는 명나라를 공격할 수 밖에 없는 '7대 한'을 하늘에 고한 뒤 바로 명나라 정벌군을 일으켰다. 벼르고 벼른 칼을 빼든 것이다. 2만 명의 대군이 일제히 달려나가 푸순을 포위한 게 4월 15일. 푸순은 이내 항복했다. 만주인들에게서 수확을 앞둔 땅을 빼앗았던 장군 장승음은 누르하치의 군대에게 목숨을 잃었다. 그의 말마따나 '작은 나라가 큰 나라가 되고 큰 나라가 작은 나라가 되는' 역사적 격동의 시작이었다.
흔히들 이성계의 <사불가론> 중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한 대목을 들어 이성계를 사대주의라고 비난하고 누르하치는 그 반도 안되는 인구로 대륙을 삼키지 않았느냐는 얘기를 하는데 난이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누르하치가 군사를 일으키기 전까지 얼마나 오래 참았으며 얼마나 많은 것을 삼키고 얼마나 긴 준비를 해 왔는지 그 과정을 안다면 단순히 나라의 규모로 치환해 생각하지 못할 거다.
누르하치가 내실을 다지는 한편 몽골과의 혼인 동맹까지 맺으면서 치밀하게 준비한 것과는 달리 고려는 평양까지 와서도 여자 사냥에 나서고 사람 죽이기를 쉽게 하던 우왕이 좌정한 가운데 최고 사령관 최영은 출전하지 않는 묘한 원정군을 출동시켰으니, 이성계의 이소역대(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 불가론을 마냥 사대주의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와 동시에 누르하치는 전쟁이란 것을 어떻게 준비하고, 또 언제 시작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기분에, 성깔에, 속에 뭣이 부글부글 끓어서 시작하는 게 전쟁이 아니며, 돼지 가죽같이 두껍기도 질기기도 뻔뻔하기도 한 얼굴로 속내를 가려야 한다는 것. 대놓고 성난 얼굴을 하고 으름장 놓고 부산을 떨어 봐야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는 싸늘한 비아냥을 받기 십상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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