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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했던 13년 전 그날의 대구

  • 입력 2016.02.18 10:51
  • 수정 2016.02.18 10:52
  • 기자명 거다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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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 이 글은 2010년에 작성된 글입니다.


그 날은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인 2003년 2월 18일 오전이었습니다. 처음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큰 사고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연이어 날아든 소식은 우리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그때까지도 재미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묘한 흥분이 몰려 왔습니다." 류호정씨는 지니고 있던 디지털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 1080호의 3호차에 있던 승객들은 밖으로 나가야할 이유도, 앞으로 닥쳐올 대참사도 전혀 예견하지 못했다.

참사 1주기 추모 사진집 중에서

화재는 한 남성의 방화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탑승했던 승객들은 이 참사의 시작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처음엔 주변 사람들이 이 남성의 방화 시도를 제지했습니다. 그러나 실랑이 끝에, 결국 지하철엔 불이 붙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9시 53분 시작된 불은 57분경 중앙로역에 진입한 1080호 열차로 옮겨붙었고, 지하 역사는 순식간에 불길과 연기에 뒤덮였습니다. 나중에 cctv로 확인한 결과, 불이 난 직후인 54분 즈음 역 안은 짙은 연기로 가득 차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매뉴얼대로의 탈출은 불가능했습니다.


화재가 발생한 지 10분이 채 지나지 않은 10시 1분경, 구조대원들이 현장에 도착했지만 이들도 심한 연기와 유독가스 때문에 지하 역사에는 진입할 수 없었습니다. 역내 구조활동은 역이 모두 전소된 3시간 후인 오후 1시가 넘어서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 날 사고로 이날 무려 192명이 지하철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희생당했습니다. 대구지하철 화재참사는 세계 2대 지하철 참사로 기록되었습니다.



이후 사고를 파악하면서 나온 사고내용들도 충격의 연속이었습니다. 방화범은 신병을 비관한 50대의 지체장애인이었습니다. 그는 우울증을 오래 앓아 왔고 자살을 몇 차례 시도한 전력도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이 시도한, 불특정 다수에 대한 공격이 이 사회에 얼마나 큰 치명타를 줄 수 있는지를 직접 본 국민들은 경악했습니다.
처음 화재가 발생한 1079호 전동차보다 맞은편으로 들어오다 불이 옮겨붙은 1080호 전동차에서 대부분의 희생자가 나왔다는 것도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역 관제실이 사고 열차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점도 이해할 수 없었고, 사고에 대한 대응을 기관사 1인의 판단에 의존해야 했다는 점도 믿기 어려웠습니다. 그 때문에 사고에 대한 상황 판단도, 제대로 된 대응도 하지 못했던 겁니다.


통곡의 문으로 불렸던 방화셔터가 승객들의 탈출을 막은 것은 그야말로 참혹한 사고를 만들어냈습니다. 평소 지하철 이용자 대다수가 입출구로 이용하는 곳을 방화셔터로 막아 놓은 탓에 그 쪽으로 대피해온 많은 승객들이 나가지 못하고 길을 되돌아가다 질식사했습니다. 방화셔터 앞에서 문을 손톱으로 긁다 숨진 희생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우리를 가장 경악케 한 것은 불쏘시개처럼 탔던 지하철의 내장재였습니다. 지하철에 불이 급속히 확산된 것은 당연히 방염 처리가 되어 있어야 할 내장재가 그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기는 커녕 오히려 유독가스를 배출하는 주 원인이 되었습니다. 사고 후 원인을 조사해 본 결과, 내장재 공급업체에서 규정을 어긴 불량자재를 쓴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유럽·홍콩·미국 등에선 전동차 소재를 불연재(타지 않는 소재) 혹은 최상급 난연재를 쓰도록 규정되어 있는데 반해 우리나라는 사고 전까지 내장재 규격에 대한 규정이 없었던 겁니다. 1년 뒤 홍콩에서 비슷한 방화사건이 있었지만, 불연 소재를 쓴 덕에 덕분에 부상자만 14명 발생하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전동차 제작 업체인 로템 관계자의 증언에 의하면 대구지하철에 납품된 한진중공업 차량의 내장재는 허용규격 내에 있더라도 그 가연성 정도가 허용규격 중 가장 낮은 '자기소화성 단계였다고 합니다. 규격 내의 부품을 썼더라도 화재를 제대로 막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대구지하철참사를 조사하러 온 일본소방청의 한 관계자는 “일본 지하철 의자는 잘 타지 않는데, 대구지하철은 형체까지 없어진 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수출용 전동차와 국내용 전동차가 따로 제작되고 있다는 언론의 보도도 국민을 분노케 하였습니다. (주)로템이 홍콩과 인도에 수출하는 전동차 차량은 국내보다 성능이 월등한 불연재와 난연재를 사용하여 납품하고 있었습니다. 성능의 차이는 가격의 차이로 나타났는데 외국 수출용 전동차 차량 가격이 1량당 17억이었던 반면 대구지하철에 납품한 차량의 가격은 세배나 더 낮은 5억2천만원이었습니다. 대구지하철 차량 가격으로는 승객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내장재를 사용하는 게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사고 열차에 승무원이 기관사 한 명뿐이었다는 것도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만약 1079호 전동차에 승무원이 한 명만 더 있었다면 기관사는 불을 끄고 뒤쪽 승무원은 역 측에 연락을 취해 1080호의 진입을 막았을 겁니다. 또, 1080호 전동차에도 뒤 쪽에 승무원이 한 명 더 탑승하고 있었다면 기관사가 내린 후에도 출입문의 개폐를 확인할 수 있어 더 많은 이들을 살릴 수 있었을 겁니다.

이처럼 수많은 무책임이 불러온 사고는 참혹했습니다. 그 안에서 희생자들이 보낸 마지막 메시지들은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어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지금 어떻게 된 건가요? 제 옆사람 지금 숨넘어 갔어요. 빨리 좀 ….(기침소리) 빨리!
불이 났습니다. (구토하는 소리가 들린 후) 앞이 안 보입니다. (주변 승객들의 기침, 비명소리)
(한동안 말을 못 하다가)...아악! 흑흑흑 …(59분43초·마지막 신고전화)

엄마, 숨을 못쉬겠어.(…) 엄마, 사랑해 ….
아빠, 구해주세요. 문이 안 열려요.

대구에 출장 온 예비신랑은 사고 7분 전 예비신부에게 이런 문자를 남겼습니다. '잘 잤어요? 여긴 날씨 맑음^^, 오늘 하루 보고 싶어도 쬐금만 참아요'


대구지하철참사와 이 수많은 희생은 우리에게 한 가지 확신을 남겼습니다. 누구든 이런 끔찍한 일에 희생될 수 있으며, 우리의 안전에 관한 문제는 스스로 챙기고 살펴야 한다는 점입니다. 안전 문제를 제도에만 맡겨놓은 채 지켜보지 않고 내버려두면, 이런 사고는 언제든 다시 발생할 겁니다.

사고 후 정부는 지하철 차량 내장재를 전부 교체했습니다. 지하역사의 안전기준도 강화했습니다. 2월 18일, 192명이 어이없이 사망한 대구 지하철참사가 발생한 이 날만은 그들의 죽음이 갖는 의미와 그 이후 바뀐 것들을 돌아봤으면 합니다. 다시 있어서는 안 되는 사고이기에,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 사진은 대구지하철 참사 희생자 대책위원회에서 제공한 것입니다. 신문 스크랩은 동아일보 2003년 2월 19일자부터 23일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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