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조선의 설계자는 정도전이 아니라 이방원이다

  • 입력 2016.02.16 18:40
  • 수정 2016.02.17 11:50
  • 기자명 임형찬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려 귀족은 이렇게 몰락했다


흔히 정도전을 조선의 설계자라고 부르지만, 사실 정도전만큼이나 초기 조선을 설계하는 일에 공이 큰 사람은 이방원이다. 이방원은 이성계의 여덟 아들 중 과거 급제를 한 두 명 중 하나다. 음서나 천거가 아니고, 진짜 학문 실력도 출중했다는 소리다.
정도전이 꿈꿨던 양천제(양인과 천인의 신분제-광범위한 자영농을 기본으로 한다)와 과거제도, 재상 중심의 왕도정치라는 것은 조선이 고안해 낸 제도가 아니고 이미 중국 북송에서 실험된 적이 있다. 조선의 체계는 북송을 본받은 것인데, 이 북송의 제도를 처음 체계화한 사람이 주희(주자)였다. 그런데 북송과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국가는 조선이 아닌 고려다. 왜 고려는 양천제를 시행하지 않은 걸까?
그럴 수가 없었다. 고려는 귀족 사회였고, 관리 등용의 큰 부분을 음서제가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흔히 사람들은 고려의 음서제도를 집안만 좋고 무능력한 ‘금수저’의 낙하산 정도로 생각하지만, 사실 고려시대의 음서로 관직에 진출한 고위공직자들의 학문적 능력은 꽤 출중했고 실무능력도 상당했다. 때문에 고려 전기에는 이 음서와 과거제(광종 이후 시행된)를 동시 시행해 두터운 인재풀을 형성하고 짭짤한 재미를 얻었던 적이 있다.
고려는 비록 귀족 사회였지만 외교력과 국방정책, 내정에 이르기까지 괜찮은 인재들이 포진하고 또 그만큼 괜찮은 왕들이 조합되면서 한때 (귀주대첩 이후) 동북아 패권국가의 위치까지 차지했다. 꽤 ‘쩌는’ 능력을 가진 나라였다는 소리다. (귀주대첩 승전 축하연을 북송의 개봉부에서 했다. 중국 능욕…)
이런 고려가 심각하게 망가지기 시작한 건 무신정권 이후부터였다. 고려 전기의 강조가 거란에게 잡혀 죽은 이후, 고려의 국방을 책임진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무신이 아니라 문신들이었다. 심지어 강감찬이나 강민첨도 문신이었고, 윤관도 문신이었다. 묘청의 난을 진압한 사람도 김부식(문신)이니 당시 고려 문벌 귀족 사회에서 문신들이 무신들을 밥버러지 취급하는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무튼, 고려의 전성기 때 음서 출신 귀족들은 꽤 출중한 능력을 발휘했다. 자기 영지의 공물 및 인력 징발 권리를 십분 활용해서 중앙 정부를 지원했고, 귀족들 사이에서도 국가에 대한 협조가 원활했기 때문에 전후 복구 사업이나 구휼 등 민생 안정에도 크게 기여했다.


즉, 그 당시에는 학문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과거에 합격한 양민보다는 자기 가문의 영지에서 수만 섬의 쌀과 사병을 동원해 중앙정부를 돕는 귀족이 훨씬 유능한 것이었다. 그러니 음서제 출신은 과거제 출신보다 훨씬 더 대접을 받았다. 게다가 과거 합격한 놈들한테 안 꿀리려고, 음서 혜택을 받는 각 귀족 가문의 장자들은 앞에서 말했듯 모두 학문적 수준이 높았다. 그러니 만약 정도전이 고려 전기에 태어나서 '양천제'니 '과거제 중심'을 외쳤다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을 거다.
그런데 이런 고려의 기반이 무너진 것은 무신정권이 등장하고 몽골을 침입한 이후였다. 그 중에서도 몽골 원정이 결정적이었는데, 전쟁을 하는 사이 귀족 영지들의 생산력이 확 떨어진 탓이었다. 어째저째 사람은 있으니 사병은 키울 수 있는데, 수확되는 물량이 별로라 중앙정부에 협력하고 싶어도 여력이 안 되었던 것이다.
귀족 정치라는게 서로 딜을 할 수 있을 때나 유용하고 유능한 것이지, 내놓을 물건이 없으면 그냥 무능력한 놈들끼리의 친분 쌓기나 다름없다. 게다가 원나라에 항복함으로서 친원 세력이 등장한 것은 고려 왕실을 무시하는 귀족들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니, 자기 영지에 충분한 자원이 있어도 고려 왕에게 협력하지 않겠다는 귀족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들이 음서로 진출해서 모조리 중앙 정부에 있으니 고려 왕의 입장에서는 짜증이 날 법하다. 귀족이 국가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그래서 공민왕은 이런 족속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이후 지방 귀족들의 안보 능력도 의심스럽게 되었다. 권력 유지와 대농장 경영을 위해 사병을 쓰지 국방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귀족 사병이었던 셈이다. 이런 상황이 되니 고려의 귀족 체제는 서서히 그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신진사대부가 경제적 기반이 없이도 '중앙 권력'에서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 등장한 이자춘의 모습

그때 두각을 나타낸 것이 이성계였다. 그는 신진사대부(이방원)인 아들내미를 두고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대부 세력의 지지를 받으며, 전투능력이 월등한 사병을 보유한 대호족이었다. 이자춘(이성계의 아버지)와 이성계 부자는 본디 원나라의 옷치긴 울루스(제후국이라고 해석하면 된다)의 천호장 겸 다루가치(지방정부의 최고 행정관)였다. 세습권력인데, 천호장은 몽골 사회에서 칸 다음 높은 직위다.
황제를 뜻하는 원나라 대도의 대칸이 있으면, 제후국에는 칸이 있고, 그 칸 아래는 천호장이 있다. 쉽게 이야기하면 몽골 지방정부인 옷치킨 울루스의 대귀족 가문이었다는 소리다. 여기서 옷치긴은 징기스칸의 막내 동생 테무게 가문(친왕가)을 뜻한다. 본디 오논 강변 일대를 다스리던 테무게는 금나라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뒤 만주일대를 통째로 물려받았다. 그래서 그의 영지는 몽골의 제후국 중 드물게 농경과 유목이 모두 가능했다. 이는 곧 산악전과 기마전까지 능숙한 병력을 키워낼 수 있는 강력한 제후국이 되었다는 뜻이다. 가별초가 가진 전투능력이 이런 거라고 보면 된다. 이들은 쿠빌라이 칸 등극에도 큰 공을 세웠고, 때로는 대칸 자리를 노리고 중앙 정부와 전쟁도 치뤘다.

그 중 평안도 북부와 함경도 지역, 간도 지역을 다스리던 사람이 이자춘과 이성계의 선조들이었다. 그러니까 육룡이 나르샤에 나오는 "성니메~" 이지란(본명 퉁두란 : 쿠란투란티무르)과 의형제를 맺고, 여진인까지 통제할 수 있었던 거다. 퉁두란은 여진족 여러 일파 중 가장 강력한 리더였는데, 이성계와 의형제를 맺고 고려에 투항했다. (지위만보면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급 위치였다. 시대가 원나라라서 나라는 못 세웠지만) 그리고 이 여진인들은 이지란이 이성계와 함께 조선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자 조선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했다. 그러니까 이 이지란이가 어마어마한 사람이다. 이성계-이지란 라인 때문에 명나라가 조선 침공을 못 한 거다.




이 양반이 아주 어마어마한 분이다.

원나라 말기, 중앙 정부는 주원장의 명나라에 밀려서 몽골고원으로 쫓겨날 판이었지만 만주일대의 옷치긴 울루스는 여전히 강대했다. 하지만 퉁두란과 이자춘-이성계 부자가 고려에 투항함에 따라 옷치긴 울루스는 고려를 압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원나라를 지원하러 떠나기도 어려웠다. (빈집털이 당할까봐) 게다가 고려왕과는 심양왕(요동 지역의 통치자) 자격을 두고 싸워 사이가 안 좋았다. (사실 쿠빌라이 칸이 옷치긴 울루스의 힘을 억제하려 고려왕이 심양왕을 겸하도록해서 서로 견제하게 한 것이지만.)
그래서, 옷치긴 울루스는 명나라에 투항했다. 남은 건 고려였다. 이성계는 이런 정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오늘날 이야기하면 미국에서 LA 시장까지 하다온 한국 정치인급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이후 옷치긴 울루스가 명나라에 항복한 것을 파악하자 '요동 정벌 불가론'을 외쳤고, 심양왕이라는 이름이 당시 정세에서는 아무 소용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최영은 심양왕의 권리를 여전히 놓지 않으려 했고, 그 계기로 만주를 점령하고 장악하려 했다.
그래서 최영이 숙청되었을 때 중앙 사대부들의 반발은 크지 않았고, 심지어 정몽주 같은 사람도 최영의 숙청에 동의했던 것이다. 단지 군사를 일으켰다고 그런 건 아니었다. 위화도 회군이라는 것도 상당히 복합적인 측면이 있었다. 당시 대외 정세에 따라서 말이다.



훈민정음은 이방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무튼 그런 과정을 거쳐 정몽주도 숙청하고 조선을 개창했는데, 초기 조선은 그야말로 피바람의 연속이었다. 그 가운데에 이방원이 서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정도전과 정몽주를 죽인 킬방원 정도로 기억하지만, 사실 이방원이 이겼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한글을 쓰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세종대왕을 낳았기 때문에? 아니다.
이방원을 단지 정적 숙청에만 관심이 있는 권력지향적 인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앞에서 말했듯 그는 과거까지 합격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양천제도를 시행하고, 과거제 중심은 동의했지만 정도전의 계획에는 큰 구멍이 있었다. 바로 귀족제를 타파하고 자영농 중심의 양반제도를 완성하려면 꽤나 디테일한 개혁이 필요했다는 사실이다. 정도전에게는 그 계획이 없었지만 말이다.



신문고

이방원은 왕위에 오른 뒤 신문고를 설치했다. 그래서 노비들과 양인들로 하여금 지방 호족 가문을 고소 고발하게 만들었는데, 이 이유는 부당하게 빼앗긴 토지를 돌려주거나 부당하게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서였다.
즉, 신분제의 한계가 있지만 그러한 조치를 취함으로서 최대한 자영농을 키우고 보호해야 함을 천명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방원 스스로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왜? 사병 혁파로 군권을 쥐고 왕이 되었으니까...이방원이 예민하다 싶을 정도로 권신들을 숙청한 이면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다. 그 권신들은 보지 못 했던 위험성을 이방원은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문자에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양인들과 속인들이 농사를 지으면 그 지방 호족들에게 세를 납부했고, 그 귀족들은 다시 중앙정부에 세금을 납부했다. 즉, 지방의 행정 사무를 각 귀족 가문이 했고, 신라시대보다 진보한 것은 중앙에서 감독관을 파견했다는 사실 뿐이었던 거다. 이 때 과거제와 음서제가 양립하는 시스템의 필요성이 드러난다. 과거 출신의 감독관이 음서로 진출한 가문의 영지에 가서 수탈이 있는지 없는지 감독하는 식이다.
이런 형태의 행정은 귀족들이 수탈을 하게 되면 금방 탄로가 나게 되어있다. 매년 비슷하게 세를 납부했는데, 갑자기 줄어들면 티가 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대대로 그 지역을 기반으로 해 살아가야 하는 귀족들 입장에서는 자기 영지의 백성들을 어느 정도 챙겨야 한다는 생각도 있다. 그게 자기 사병이고, 사람이니 말이다.
그런데 별안간 고려가 무너지고 죄다 과거 출신으로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이 지방에서 조세와 공납, 역이라는 행정을 맡게 되었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들은 백성들을 속여 돈을 더 뜯거나, 양민을 노비로 만들어 부릴 수 있는 여지가 좀 더 컸다. 호족들은 자기 식구 중한 건 알고 있었다지만, 임기 몇 년 채우고 다른 데 갈 놈들은 그런 거 없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태종 이방원은 생각했다. 이 권신놈들이 힘이 더 커지면 말로는 양천제를 따를지언정 고려시대 귀족들보다 힘이 더 막강해질 수 있다는 점을 말이다. 그래서 정도전을 죽였다. 사실 진짜 이유는 여기에 있다. 통제 불가능해지는 과거제 출신 귀족 사회가 된다는 뜻이었다. 이후로도 태종은 권력이 좀 집중되는 사람이 있다 싶으면 이유를 만들어내서 숙청했다. 민무구, 민무질을 비롯한 4형제와 사돈인 심온 가문까지도...하륜은 눈치를 채고 알아서 나갔지만 버텼으면 죽였을 것이다.
태종 2년 조선왕조실록에는 특별한 기록 하나가 있다.

전곡(錢穀)의 출납(出納)과 회계(會計)·이문(移文) 등의 법을 정하였다. 임금이 지신사 박석명을 시켜 상정 도감(詳定都監)에 전지(傳旨)하기를,
"여러 창고의 전곡의 출납은 제조(提調)가 관장하게 하고, 그 회계는 사평부(司平府)에 보고하고, 그 문자를 서로 통하는 격식을 상정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제조 하윤(河崙)·권근(權近) 등이 상언(上言)하기를,
"주관(周官)의 사회(司會)와 한(漢)나라의 평준(平準)과 당(唐)나라의 탁지(度支)와 송(宋)나라의 삼사사(三司使)의 관직은 오로지 중외(中外)의 전곡 출납을 맡았었습니다. 이제부터 여러 창고의 전곡 회계(錢穀會計)는 사평부(司平府)에 보고하고, 그 문자는 낭청(郞廳)의 아전[員吏]이 육전(六典)에 의하여 서로 왕래하게 하소서."
하여, 윤허한 것이었다.
<태종실록 3권, 태종 2년 1월 16일 기해 3번째기사 1402년 명 건문(建文) 4년 전곡의 출납과 회계·이문 등의 법을 제정하다>

'문자를 서로 통하는 격식을 상정하여' 라고 있다. 여기서 문자는 한자가 아니다. 우리가 태종 이방원의 시대로 되돌아가서 요금을 납부한다고 치자. 공문서는 죄다 한자로, 요금 고지서에는 千냥이라고 되어있다. 그런데 당신은 글을 읽을 줄 모른다면!
수납원이 '만 냥이요~!' 라고 말로 당신에게 이야기하면 아무 의심 없이 만 냥을 낼 거다. 그리고 요금 영수증 천냥에 도장을 떡하니 찍으면 나머지 구천 냥은? (영수증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지..) 그렇다. 인마이포켓이 되는 것이다. 고려시대와 달라진 행정사무를 해야 하니 이방원은 '문자' 좀 서로 통하게 격식을 만들라고 한 것이다.
당시 사대부들은 한자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공문서를 읽고, 기록할 권력이 있었다. 말이야 속이면 그만이고, 백성은 속으면 졸지에 땅 빼앗기고, 빚지고, 노비로 전락하는 거였다. 그러니 이방원이 정도전을 죽였던 것이다. 이방원은 정도전처럼 양천제와 과거제 중심의 국가를 내세웠지만 이런 디테일한 문제점을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즉위하자마자 신문고를 설치하고, 권력 좀 있는, 혹은 지방에 땅 좀 가진 사대부들을 하나씩 숙청해나갔다. 그리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은 혜안도 바로 이 점에서 출발했다.
어떻게든 한자를 읽는 방법을 통일해 백성들이 글을 알아야 관리들에게 수탈을 당하지 않고 자영농이 많은 양천제의 기틀을 잡을텐데... 한 마디로 언어정책이 필요했다. 그런데 세자였던 양녕은 그런 데 관심이 전혀 없었다. 반면 충녕대군은 음운학도 할 줄 알고, 잡학에 능한데다 천문지리며 과학, 역사에도 두루 능통했다. 그러니 세자로 세운 것이었다.
더욱 웃긴 건 차남인 효령이 왕이 될 수 없는 이유였다. 양녕이 폐세자가 되면 효령이 받아야 하는데....이방원 왈 "효령은 술을 못 마셔서 왕이 될 수 없어…" 답은 정해져있었다는 소리다.
그러니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한글 창제는 이방원이 기획하고, 세종대왕 이도가 실행한 것이다. 필요성을 역설한건 이방원이고, 세종대왕은 부왕의 '뜻'을 아주 잘 이해하고 공부하여 직접 한글을 창제했다.
잘 보자, 훈민정음.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음'. 새로운 문자인데 '음'이라고 한다. 그렇다. 원래 이 문자의 용도 자체가 한자를 읽는 표준 음을 제정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아전들이 똑같은 글을 다르게 읽어서 백성을 속이는 짓을 못 하게 되는 것이었다. 또, 훈민정음을 만들고 만든 책이 있다. 바로 <동국정운>인데, 바로 한자를 우리말로 읽는 표준 음운서이다. 즉, 하늘 천은 '천'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 여기서 출발했다. 이 점은 한글 창제를 반대하는 유생 최만리의 상소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신라 설총의 이두는 비록 촌스럽고 속되다 하오나, 모두 중국에서 통용되고 있는 글자를 빌려서, 말을 도와주는 곳(어조사)에 사용해 한문과 더불어 원래 어긋나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말단 관리나 노비들까지도 꼭 이두를 익히려면, 먼저 두어 권의 책을 읽고서 짜임새 있게 문자를 익힌 다음에라야 비로소 이두를 사용할 수 있나이다. 그래서 이두를 쓰는 자는 모름지기 문자에 의지해야만 그 뜻을 전달할 수 있었나이다. 그러므로 이두로 말미암아 문자를 배울 것이 자못 많아서 학문을 일으키는 데 일조했나이다.
만약 우리나라가 본래 한문을 알지 못해 매듭을 엮어 쓰는 시대라면, 잠시 언문을 빌려서 한 때 쓴다면 오히려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른 의논(정의)을 지키려는 사람은 반드시 “그렇게 언문을 임시방편으로 시행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더디고 느릴지라도, 중국에서 통용하는 문자를 습득해서 장구한 계책으로 삼느니만 못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물며 이두가 사용된 지 수 천 년이건만 관청의 장부와 정기 모임 등을 적는 데 막히는 것이 없는데, 하필 예로부터 써 온 폐단 없는 글(이두)을 고쳐서, 따로 촌스럽고 무익한 글자를 만드셨나이까?

이두가 사용되고 수 천 년(과장법이지만) 동안 아무 문제 없이 쓰고 있는데 왜 한글을 만들었냐는 것이다. 관청의 장부와 정기 모임을 적는데 막히는 것이 없다라는 것은 이두의 용도를 알려주고 있다. 세종은 이 이두를 없애고 한글을 한자를 읽는 표준 문자로 만들려고 했다. 사실 더욱 놀라운 것은 세종만이 '정음' 정책을 썼던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홍무정운> , 여기서 홍무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연호이다. 그래서 주원장은 홍무제라고 불린다. 홍무 7년인 1375년, 주원장은 <홍무정운>을 출간했는데, 이유는 명나라도 양천제를 시행하는 데 있어 조선과 유사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땅도 넓고 민족 수도 많은 중국은 언어 해독능력에서 오는 문제가 더 심각했다. 그래서 홍무제도 한자를 읽는 표준음을 제정했다. 백성들이 속지 말라고. 게다가 주원장의 숙청 정도는 이방원은 상대도 안 된다. 몇 천 단위로 신하들을 죽였다.


세상을 바꾸려면 연구가 필요하다


세종대왕은 세종27년부터 신숙주와 성삼문을 시켜 새 표음문자인 훈민정음으로 홍무정운의 한자에 음을 달게 하는 작업을 했고, 이 작업은 1455년 단종 3년에 완성되었다. 그런데 더더욱 놀라운 건 이런 정책은 명나라가 원조가 아니라는 데 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위해서 <홍무정운>을 참고하기 전에 참고한 문자가 있으니 바로 파스파 문자다. 파스파는 티벳 라마승인데,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의 국사였다. 몽골인인 쿠빌라이 칸도 나라를 돌보려고 하니 같은 문제에 부딪혔던 거다. 티벳인, 몽골인, 여진인, 거란인, 위구르인, 한인, 남인 등등의 민족이 다 섞여있는 나라인데, 공문서를 쓰고, 문서 교환을 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글이야 한자나 위구르 문자로 통일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 활용이었다. 게다가 몽골은 상업국가이고 신용을 바탕으로 화폐를 찍어내야 하는데, 문자를 읽는 방법이 각각 다르면 온갖 사기가 횡행해 나라가 한 순간에 절단날 수 있었다. 그래서 원나라도 한자를 읽는 방법, 각 민족 사람들이 자신들의 말을 음 그대로 적는 문자를 개발했는데, 그게 파스파 문자였다. 파스파 문자는 그래서 표음문자였고, 세종대왕이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참고자료이기도 했다. 훈민정음의 모태가 되는 셈이다.
조선 전기 태종 이방원과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되는대로 연구하고 참고해서 기어코 뽑아낸 결정체가 바로 <훈민정음>이다. 결론은 뭐냐고? 이방원이 정도전을 죽여서 다행이라는 점이다.
너무 허무한 결론인가? 그렇지만 세상이 변하려면 이 정도의 노력과 과정이 있다는 사실은 알아야 한다. 개혁이라는 게 그리 만만치는 않으니까. 행동도 해야 하지만 시대운도 맞아야 한다. 당시의 고려왕조가 저 지경이었기 때문에 저 변화들이 가능할 수 있었다.

+ 덧붙임 : 훈민정음은 공부하라고 만든 게 아니라, 사기 당하지 말라고 만든 거다.
재미있게 각색하려 오버를 조금 하긴 했지만, 정말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 덧붙인다. 한국의 국문학자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세계적인 역사학자들은 세종대왕의 한글창제를 '회계학적 용도'로 보는 측면이 더 많다.
특히 <총, 균, 쇠>로 유명한 제러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글자'라는 것 자체가 인류사에서는 회계적 목적으로 등장했다고 본다. 즉, 글자 체계의 수준에 따라 그 나라의 회계학적 수준도 결정이 되는데, 인류사를 보면 재미있는 장면이 있다. 바로 유목민과 농경민의 차이이다. 이 두 문화권은 회계적으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유목민은 '현 시점'에서의 수량만 체크하면 된다.

가축들의 숫자는 현재만 유의미하지 과거에 몇 마리였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문자가 필요 없다. 필요한 지혜는 구전으로 다 한다. 그러나 농경민들은 다르다. 지난 해에 수확된, 올 해 수확된 농작물의 총량을 계산해야 한다. 즉, 경제학적으로 보면 유목민은 저량(Stock)의 개념을 쓰고, 농경민은 유량(Flow)의 개념을 쓴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양란과 일제강점기라는 흑역사 때문에 빙구 취급을 받더라도, 일단 그들이 인류사적인 '문자의 의미'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그것도 기록으로 남겼다.
세종시대에 만들어진 역사책이 있다. <치평요람>. 즉, 중국의 역대 왕조와 한반도의 왕조 치세의 요체들만 '사례별'로 묶은 책인데, 상당수가 일본에 넘어가 있고, 완전히 국역되지 않았다. 여기에 정인지는 서문을 남겨놓았다. 그 글에서 그는 '결승지정을 최초의 국가정치'로 언급하며, 결승의 시대가 끝나고 서계의 시대가 왔다라고 언급한다.
즉, 결승지정이란 '결승(잉카의 키푸와 같은 밧줄로 만든 기록물)'으로 정치를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역>에 등장하는 말이기도 하다. <주역>의 계사에서는 "옛 정치는 노끈의 매듭으로 하였다." 라고 한다. 즉, 중국의 은허 시대의 상형문자가 나오기 전의 이야기이다.
문명사에서 회계란 특정 범주를 토대로 기록물을 정리하는 것이다. 즉 이 범주는 국가이며, 정치의 범주를 뜻한다. 통제된 회계를 통해 신뢰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도 동일하다. 지금 시대에 발견되는 대부분의 상형문자들이 사실은 회계적 의미이지 역사적 구전을 남겨둔 것은 별로 없다.
심지어 세종실록에 딱 이렇게 규정되어 있다.

세종 27년(1445) 3월 30일 "다스려지는 국가는 일어나고, 어지러운 국가는 망하게 되는데, 이 사실을 얻고 잃음이 함께 지나간 역사에 실려 있다. 좋은 것을 가히 법으로 삼고 나쁜 것을 가히 경계해서 권장과 징계를 마땅히 후인에게 전해 주어야 한다. 여러 책을 골라 모아서, 만고 역대를 밝게 실었다. 그윽이 생각하오매, '결승지정'을 파한 뒤에 '서계'가 만들어졌고, 붓대 잡는 관원을 둠에 따라 사적이 이루어졌다“

세종이 그토록 쉬운 표음문자를 창제하려고 한 것은 사실 백성들이 '문자 생활'을 못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지만 후대 사람들은 이 문자 생활을 단순히 해석해버린 오해가 있다. <어제훈민정음>에서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더불어 서로 맞지 아니하므로, 문자생활을 할 수 없는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 하는 사람이 많다“



여기서 문자를 '한자'로 해석하면 엉망이 된다. 글 초반에 나온 태종실록에서 언급된 ‘문자’와 비교해보면 결국 세종이 말하고자 한 문자와 문자생활은 '증거력'과 '공증 능력'을 갖춘 문자와 문자생활을 의미한다. 더군다나 훈민정음 창제 후 한글이 경전 번역에 사용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공증 문서와 편지 등이 이용되었다는 것을 본다면 뜻이 좀 더 명확해진다.
이방원은 이 점을 알고 있었으나 구체적인 음운학적 지식이 없었다. 그래서 유일하게 백성들이 관원을 고소할 수 있도록 하는 법제와 신문고를 만들어서 송사를 직접 상황에 맞춰 청취하여 결정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하지만 모든 송사에 의정부 관원과 육조의 고위 관료들이 관여할 수는 없었으며, 당사자들이 한양에 와서 송사를 진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심지어 고려 시대에 지방 감독관이 지역 감영의 회계 자료를 '감사'하는 것도 비효율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료 대 관료가 아니라 백성 대 관료라는 증거의 입증 관계를 재구성해야 한다. 그것이 조선 통치의 핵심이자 양천제도의 요체였다.
정인지는 훈민정음 서문에 이렇게 썼다.

옛날에 신라의 설총이 처음으로 이두를 만들어 관부와 만간에서 지금까지 이를 행하고 있지마는 그러나 모든 글을 빌려서 쓰기 때문에 혹은 간삽하고 혹은 질색하여, 다만 비루하여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언어 사이에서도 그 만분의 일도 통할 수 없다 (중략 : 훈민정음 28자에 대해서 전하께서 만들었다 등등) 그런 까닭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 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이로써 글을 해석하면 그 뜻을 알 수가 있으며, 이로써 송사를 '청단(청단이라 함에 주목)'하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가 있게 된다. 자운은 '청탁'을 능히 분별할 수 있고 (후략)

즉, 훈민정음을 쓰면, 문서와 말만 듣고도 어떤 놈이 거짓말을 하는지 안다는 뜻이다. 여기서 청이란 들을 청(聽)이다. 조선시대 기관 중에는 질청(作聽)이라는 곳이 있다. 회계 문서를 중심으로 하는 공공문서 취급 기관이다. '작'이라 읽지 않고 '질'로 읽었다. 주요 업무는 공공기관과 민간기관 사이의 문서 처리를 담당했고, 물자 출납의 회계와 공증이 주요 업무이다.
다산 정약용은 본래 관청을 뜻할 때 쓰는 廳자도 한나라, 진나라 때까지는 엄호 변이 없는 들을 청을 썼고 들을 청은 '본래 어떤 일을 보고 하는 것을 듣는 장소'라고 한 바가 있다.
즉, 문자가 제대로 전파되지 않는 시대에 관청은 '듣고, 판단'하는 것이 일이었다. 증거력을 갖춘 문서 체계가 없었으니 결국 서로의 말에 따라 모순을 발견하여 송사를 처리하는 것이 일이기 때문에 언어 정책은 중세 통치의 핵심 관건이었다.
훈민정음의 창제로 비로소 신문고와 언어 정책의 필요성은 사라졌다. 증거력이 있는 문자체계를 백성들도 알게 되었고, 한자의 음운에 따라 표준화된 정음으로 기록된 한글 공증 문서를 백성이 소지하는 한 송사는 매우 효율적이 된다는 것을 뜻했다. 지방 감독관을 파견하여 회계 문서를 잘 처리하는지를 중앙 정부가 알아보는 업무도 좀 더 여유롭게 주기적으로 감시할 수 있게 되었다(틀리면 지역 백성들이 송사를 하니까).
회계의 기본은 증거력을 갖춘 문서와 공증이었다. 세종의 업적 중에는 복식부기와 같은 듕긔법, 감합법을 국가 표준으로 만든 일이 있다. 감합법은 오늘날 공문서에서 앞 페이지를 반으로 접어 도장을 앞페이지의 뒷면과 뒷페이지의 앞면에 반반 찍힘으로서 공증됨을 알아보는 것인데, <대명률직해>에 우선적으로 넣는다. 그리고 1417년 시행한다. 양란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중앙에서 보관하던 듕긔책이 소실됨으로서 기존의 공증 문서들과 비교가 어렵게 됨에 따른 것이었다. 신분제와 토지제도, 조세제도가 한꺼번에 흔들린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었다.
여기서 이방원이 양녕을 바라보는 시각이 나온다. 충혜왕 시절과 공민왕 시절을 본다면 처자를 함부로 범한 것도 아니고 기생과 놀아난 세자였다. 양녕의 행태는 여말선초에서는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방원이 원한 것은 고려 시대의 풍습을 따르는 것이 아닌 유교적 본을 보여야 할 왕이었다. 그리고 양천제와 과거제의 기틀을 다질 정책적 혜안(씨앗)을 가질 군주였다.
당연히 언어 정책과 문자를 통한 회계적 공증 시스템이 차기 정책의 핵심이었는데, 그 요체를 아는 이가 다름 아닌 충녕대군이었다. 그래서 이방원은 충녕에게 이런 말을 한다. "정치의 대체(大體)를 안다" 라고 말이다. 양녕의 폐세자를 결심한 순간 답은 충녕으로 정해져 있었다는 말이다. 다만 적장자라는 미련으로 그것을 미뤄왔을 뿐이었다.


물론 조선을 계획한 것은 정도전이라지만, 그에게 이방원과 같은 통치의 기본적 청사진이 있었는지는 의문스럽다. 양천제와 과거제는 생소한 것이 아니라 주자학을 배운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이상적 국가 모델이었다. 이미 시행한 나라도 있었다.
하지만 그 제도를 위한 통치적 기반은 사실 이방원이 더 많이 연구했고, 추진했으며, 그 정책 요구를 세자인 충녕에게 물려주었다. 음운학적으로 이방원은 훈민정음과 전혀 관련성이 없다. 그러나 통치 과제로서의 언어 창제를 물려준 것은 분명하다. 조선을 안정시키고 양천제와 과거제를 유지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는 이방원이 공론화를 시킨 것이니까.
만약 정도전이 설계한 그대로의 나라였다면 조선은 매우 비효율적이었을 것이다. 결국 권력이 세습되었을 것이고, 출납 과정에서 부정부패가 만연했을 수도 있다. 한글이 없었다면 말이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