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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불바다' 사건과 언론이 전하지 않은 뒷이야기

  • 입력 2016.02.13 16:55
  • 수정 2016.02.14 14:27
  • 기자명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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찜통더위 - 개 같은 날의 오후
<개 같은 날의 오후>(1995)라는 영화가 있었다. 한 동네에서 벌어지는 뜻밖의 사고를 둘러싼 해프닝을 담은 영화인데, 물색없이 깔깔대며 웃게 만들다가도 미간을 좁히는 진지한 메시지가 녹아 있던 영화였다. 왜 제목이 ‘개 같은 날’일까. 가정폭력을 휘두르던 남편을 동네 아주머니들이 집단으로 응징하다가 덜커덕 때려죽이게 되는 설정이었으니 ‘개 같은 날’이긴 하겠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모티브는 영화의 배경이 더운 여름이었다는 것일 게다. 이 영화의 시작은 스모그 가득하고 아스팔트 열기 피어오르는 도시 풍경을 가로지르는 뉴스 멘트였다.


“일요일 정오 뉴스입니다. 전국이 화끈한 찜통더위에 갇혀 있는 가운데 어제 대구에서는 수은주가 섭씨 40.2도까지 올라가 42년 8월 1일에 기록한 40도를 53년 만에 경신했습니다. 또한 부산의 38.7도를 비롯, 전국의 기온이 36도 이상의 높은 기온을 보이고 있습니다.”


가정폭력과 동네 아줌마들의 좌충우돌이라는 이 이상한 조합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바로 그 미칠 것 같은 더위였다. 영화에 등장하는 이 이상더위는 개봉 바로 전해, 1994년의 더위였다. 요즘도 여름 더위가 지독할 것이라는 예보의 뒤에 ‘1994년 더위가 다시 올지 모른다’는 엄포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바, 당시 전국 각지에서 기록한 최고 기온은 오늘날까지도 그 위엄을 잃지 않고 있다.




전국에서 에어컨이 동이 나는 건 기본이고, 서울 시내 급수량이 달릴 만큼 더위는 혹심했다. 6월 17일에 이미 기온이 서울 34.7도였다. 그 뒤로 두 달 동안 그 기온이 유지됐다고 생각해 보시라. 나름 모범생(?)으로 술 먹고 수업을 빠지는 일이 있을망정 반바지 차림으로 캠퍼스를 누빈 적이 없는 처지였건만, 그해 여름에는 샌들에 반바지를 걸칠 수밖에 없었다. 정녕 그해는 ‘개 같은 여름’의 해였다.




"서울은 불바다가 되고 말거요"
1994년은 이미 봄부터 심상치 않은 열기(?)가 한반도를 감싸고 있었다. 그 열기는 판문점에서 왔다. 북한은 1993년 3월 엔피티(NPT), 즉 핵확산 금지 조약을 탈퇴하면서 핵 개발을 공식화했고 미국은 당연히 이를 막으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94년 3월 19일 남북 특사 교환을 위한 실무 대표들이 만난 자리에서 대형 악재가 터진다. 북측 박영수 단장의 ‘불바다 발언’이 그것이다. 취업 준비를 위한 세미나를 끝내고 늦은 저녁을 먹으며 9시 뉴스를 보다 황망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억센 이북 억양의 박영수 단장은 거침없이 말을 터뜨렸다.


“여기서 서울은 멀지 않습니다.”


순간 한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서울 한 귀퉁이의 퀴퀴한 냄새 나던 식당 안에서부터 전국의 모든 곳에서 사람들의 시선은 화면 속 박영수의 입을 향하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식당에 앉아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저 ××가!” 또 약간의 망설임 후에 박영수 단장의 결정적인 한마디가 터져 나왔다.


“불바다가 되고 말 거요. 송 선생 당신도 살아남기 어려울 게요.”




1994년 3월, 국회 국방위에서 박영수 북측 회담 대표가 '서울 불바다' 발언을 하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식당 안에는 일순 침묵이 흘렀다. ‘충격과 공포’였다고나 할까. 불바다 발언을 듣고 발끈한 우리 측 반격의 목소리는 왠지 떨리는 듯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지금 전쟁 선언하는 거예요? 우리는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


이 불바다 발언은 엄청난 파문을 불러왔다. 서울이 불바다라면 평양은 피바다가 될 거라는 섬뜩한 경고도 날아갔고, 라면 등 비상식량 사재기 현상도 일부 나타났다. 정부와 언론은 금방이라도 쥐어뜯고 싸울 듯 북한을 대대적으로 비난하는 데에 열을 올렸다. 그런데 며칠 후 한겨레신문을 읽으면서 나는 크게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서울 불바다', 언론이 전하지 않은 뒷 이야기
리영희 교수가 “전쟁을 부추기는 자들이 있다!”라는 제목의 한겨레신문 1면 칼럼을 통해 서릿발 같은 명문(名文)으로 ‘불바다’ 소동을 꾸짖은 것이다.


“우리의 소위 ‘언론’들은 북한 대표의 발언을 회담의 전체의 맥락에서 도려내어 거두절미한 채 그것만을 연일 대서특필하면서 국민에게 전쟁 위기감을 부채질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한 보도 태도와 평론자세는 ‘언론(인)의 최저한의 초보적 직업 윤리조차 거부하는 작태라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이 무슨 말씀인지를 알았던 것은 한참 뒤였다. 실상 북한 대표 박영수의 “불바다 발언”에는 그 전과 후가 있었던 것이다. 회담 도중 북측이 “미국이 경제제재를 한다고 하는데 미국이 경제제재를 한다면 귀측(남한)도 거기에 가담할 것인가?”라고 묻자 남한 대표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북측은 “한국이 유엔의 대북한 제재에 동참하겠다는 것은 전쟁 선언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고 치고 나왔고 남측은 요지부동이었다. 정리하자면 영화의 한 장면으로 볼 때 “당신들 전쟁하자는 거야?”라고 따지는 상대 앞에서 “그렇다면 어쩔 건데?” 하며 팔짱을 낀 형국이었다. 여기서 불바다 발언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불바다라는 말을 듣고 “우린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 하고 언성을 높였던 남측 대표 통일원 차관 ‘송 선생’에게 북한 대표는 공부 못하는 학생을 몰아붙이는 얄미운 선생의 포스를 뿜는다.


“그쪽에서 전쟁 선언했다고 지금 말하고 있는 거요. 왜 말을 듣지 않구….”

그리고 터져 나온 멘트는 폭소를 터뜨릴 정도로 엉뚱하다.

“지금 졸고 있소?”


물론 ‘불바다’ 같은 험하기 그지없는 언사를 입에 담은 박영수 북측 대표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당시 안기부장 특별보좌관이었던 이동복의 회고대로 그의 발언은 “공격적이 아니라 방어적으로 한 얘기”였다. 대화의 맥락이 온전히 전달되었더라면 ‘불바다’의 충격은 덜했을 것이다.



당시 사건을 다룬 동아일보 지면. 북측 대표가 "전쟁 불사" 입장을 취했다고 전했다.



원래 판문점 회담이 이런 식으로 공개된 적은 없었건만 정부는 스스로 ‘거두절미’, ‘전후 생략’한 자료화면을 방송사에 직송했다. 방송사 간부가 “이걸 틀어도 됩니까?” 정부에 되묻기까지 했다니 능히 분위기를 짐작할 만하다. 바로 1년 전 취임식에서 “같은 민족만 한 동맹은 없다”고 호언하던 대통령의 정부는 도대체 무엇을 노렸던 것일까. 결국 전후 맥락과 좌우 사정은 다 사라진 채, 안보 정국이 시작되었다.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저 대단한 무더위의 시작 즈음이던 6월 6일 현충일, 연휴를 맞아 행락 인파가 고속도를 메우자 ‘안보 불감증’이라는 성토가 튀어나왔다. 시국이 어느 땐데 놀러 다니느냐는 개탄이 난무하는 가운데 심지어 주식 시장이 안정세인 것도 ‘안보 의식의 부재’의 정황으로 시빗거리가 됐다.

‘우리 문학의 큰 개가’라고 칭송받던 소설 <태백산맥>이 공안당국의 조사 대상이 됐고 확성기 싣고 ‘멸공’을 부르짖으며 도심을 누비는 차량들이 등장했다. 나도 예비군 훈련 정훈교육 시간에 예비군 본연의 안정적인 자세로 코를 골고 자다가 “아저씨 같은 사람 때문에 이 나라가 망할 수도 있는 겁니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 이 나라는 적화됩니다! 지금 때가 어느 땐데!” 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이 와중에 북한은 아이에이이에이(IAEA), 즉 국제원자력기구를 탈퇴했고 ‘안보 민감증’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이런 즈음에 히트를 친 사람이 있었으니, 서울시 부시장이었다. 북한 핵 관련 비상대기 관계관 회의에서 “북한의 도발 징후가 있으니 시민들에게 비상물품 확보를 권장한다”는 발언을 한 것이다. 이 발언 이후 강남 일대의 부유층에서부터 사재기 폭풍이 시작됐다.




ⓒ MBC


쌀, 부탄가스, 물, 참치통조림, 양초 등 몇몇 품목이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어느 동네에서는 품절 사태까지 일어났다. 또 은행에서의 현금 인출 사례도 몇 배나 늘었으며, 넉넉한 분들은 달러 환전과 미국 비자 신청에 나섰다. 일이 이렇게까지 돌아가자 안보 불감증을 한탄하던 정부는 이번에는 손사래를 치며 ‘비상물품 확보’에 나선 국민들을 비판하는 오락가락 갈팡질팡의 진수를 보여 준다.
그즈음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사실 딴 데 팔려 있었다. 그것은 미국에서 열리고 있던 월드컵이었다. 홍명보와 황선홍 등 이미 한국 축구의 전설이 된 이들이 한창 젊은 나이로 그라운드를 누비던 시절, 김호 감독의 한국 축구는 16강의 꿈을 이루기 위해 스페인•볼리비아•독일과 맞붙게 되어 있었다.

6월 17일 한국은 강호 스페인을 만났고 후반 막판의 극적인 동점골로 2 대 2 무승부를 기록하는 개가를 올렸다. 동점골을 넣은 서정원이 어퍼컷 세리머니를 시전하며 환호할 때 나도 거실 바닥이 무너져라 펄쩍펄쩍 뛰었다. “스페인하고 비기다니!” 아마 대한민국 사람 태반이 스페인과의 무승부에 열광하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바로 그 시간 한국인들에게는 운명의 올가미가 소리 없이 죄어들고 있었다.




진짜 불쌍한 나라
1994년 6월 16일 오전, 레이니 주한 미국대사는 정종욱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만나 미국의 민간인들을 철수시키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북핵 문제에 대한 외교적 노력이 절망적 상황에 이르고 제재를 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미국 민간인들을 철수하는 것은 당연한 절차라는 것이었다. 레이니 대사는 한국에 와 있던 손녀들에게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3일 내로 한국을 떠나라.”


전 미국 국방장관 페리는 이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클린턴 대통령에게 ‘재난을 불러올 수 있는 옵션’, 즉 언젠가는 미국을 겨냥하게 될 핵무기를 북한이 보유하도록 내버려두는 대안과, ‘달갑지 않은 옵션’, 즉 재래식 전쟁의 위험성이 있더라도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적극 저지하는 대안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하게 했다. 대통령은 ‘달갑지 않은 옵션’을 선택했다.”


이는 한국한테는 당연히 ‘재난을 불러올 수 있는 옵션’, 아니 재난 그 자체인 옵션이었다. 그렇게 클린턴이 결심하고 원자로가 있던 영변 폭격까지 계획되고 한국군과 미군 및 민간인 사망자까지 예상된 시나리오가 버젓이 선 마당이었다. 그 재난의 당사자였던 한국인들만은 까맣게 그 사실을 몰랐다. 나를 포함한 많은 한국인들의 눈은 한국 월드컵 대표팀의 선전에 집중돼 있었고 그 입은 결정적인 순간에 뻥축구를 했던 스트라이커 황선홍에게 퍼붓는 욕설에 골몰하고 있었다.
미국의 ‘혈맹’인 한국 대통령도 미국 대사가 “미국 민간인들을 소개시키겠소”라고 통보하기 전까지는 전쟁이 진짜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미국이 한국의 의사와 관계없이 전쟁을 결심했다는 사실을 깡그리 몰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클린턴에게 이렇게 소리 질렀다고 한다.


“전쟁은 안 됩니다. 역사와 국민 앞에 죄를 지을 수는 없소.”


그러나 그 자신이 정말로 ‘죄인’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됐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지. 살인마가 칼을 들고 주위를 배회해도 아무것도 모른 채 밝게 웃으며 애인과 통화 중인 영화 속 주인공처럼, 한국인들은 전쟁의 유령이 44년 전처럼 자신들의 머리 위를 배회하며 어깨에 내려앉아 머리부터 물어뜯을 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생판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던 나라 미국에서 한국 축구팀의 경기는 계속됐다. 다음 상대는 볼리비아였다. 독일이나 스페인에 비해서는 네임밸류가 확연히 떨어지는 팀이었기에 그때껏 이루지 못한 월드컵 1승의 기대는 하늘을 찔렀다. 마침 경기 시간도 새벽이 아닌 아침 시간대. 전쟁을 가까스로 피했으나 꿈에도 그 사실을 몰랐던 한국인들의 관심은 이 경기에 쏠렸다. 볼리비아전(戰) 정도가 뭘 그리 대단했겠느냐고? 이 경기의 시청률은 63.7퍼센트로서 지금도 스포츠 경기 가운데 최고의 시청률로 남아 있다. 그 ‘대망의’ 볼리비아전 시청을 위해 아침 일찍 선배 자취방에 모여 있는데 한 선배가 볼리비아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저 나라 불쌍한 나라야.”


그 선배는 언론사 입사 공부를 하느라 시사상식이 매우 풍부했다. “원래는 꽤 큰 나라였어. 그런데 브라질하고 전쟁하다가 져서 아마존 상류 뺏기고 칠레한테 져서 주석 광산 다 내주고 내륙국이 됐지. 심지어 남미에서 제일 못살던 약소국 파라과이한테도 졌지.” 아닌 게 아니라 그때 화면에 비친 볼리비아 선수들은 꽤 불쌍해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더 불쌍한 것은 전쟁이 자신에게 송곳니를 드러내는 것조차 모른 채 63.7퍼센트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볼리비아전에 몰두하던 한국인들이 아니었을까? 볼리비아인들은 비록 졌을망정 자신들의 결의로 전쟁을 선언했을 것이고 자신의 필요에 의해 전쟁을 수행하였을 텐데 말이다. 서로 다른 측면에서 불쌍한(?) 두 나라의 그날 경기는 0 대 0으로 비겼다.
월드컵의 열기로 살인적인 더위를 잠시 제압하는 동안, 미국 전 대통령 카터가 북한에 방문했다. 그리고 극적인 합의를 이끌어 냈다. 김영삼 대통령이 북한의 김일성 주석의 조건 없는 정상회담을 수락하여 7월 25일 전쟁 후 최초의 정상회담 개최가 합의된다. 그러나 1994년은 더웠다. 정말로 ‘개같이’ 더웠다. 어떤 연구에 따르면 3천명이 넘는 노약자들이 폭염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고 한다. 역시나 무더웠을 한반도 북쪽에서 한 명의 노인이 쓰러진다. 정상회담을 앞둔 김일성 주석이었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1994년 여름의 끔찍한 더위는 또 다른 장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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