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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리오사는 왜 핸들을 왼쪽으로 돌렸을까?

  • 입력 2016.02.01 12:25
  • 수정 2016.02.01 12:26
  • 기자명 이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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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는 아주 잘 만들어진 영화다.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말이 너무 많은 것을 담고 있다고 생각되면, 잘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말을 붙여도 무방하다. 물론 전통적인 개념에서의 내러티브(narrative)를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논하자고 한다면 이견이 많겠지만 시각화(visualizing)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story)의 전개를 판단해 보면 ' 잘 만든 이야기'라는 말은 충분히 수식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취향의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는 잘 만들어진 "영화"


CG
등의 그래픽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서 실사 영화 내에서도 시각적인 표현의 한계가 점차 줄어들고 있는 상태에서 문자 텍스트 중심의 내러티브 개념으로 영화의 이야기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판단일 수 있다. 실제 이 영화는 120분 동안 아주 충실하게 관객들을 이야기 속으로 몰입할 수 있게 해준다. 문화가 예술적인 가치를 지니고 내포된 의미를 향유하던 것에서 소비형태의 일종으로 그 방법이 변화되고 있고, 가속화될 것들이 예상되는 가운데 영화가 할 수 있는 이야기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본다. 할리우드의 거대 자본들이 갈수록 엔터테인먼트를 강조한 영화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단순히 이야기 요소의 고갈 때문이 아니라 영화의 소비 경향을 감지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이러한 배경에서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보았을 때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는 영화가 영화로서 표현할 수 있는 시각화가 단순히 볼거리라는 유희에서 끝나지 않고 어떠한 내러티브를 내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영화에서 시각화되는 요소들이 상당히 매니악한 부분들 임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취향의 문제를 벗어나 작품 전체의 분위기와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데 복무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때문에 이 영화를 제대로 즐기려면 들이닥치는 대로의 시각적인 요소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마니악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아이콘들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 전통적인 개념에서 이야기의 의미를 찾으려는 고정관념을 내려놓으면 120분은 단 몇 번의 호흡을 하는 동안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한 장의 이미지면 꽤 많은 것들이 설명된다. 디젤펑크, 카체이싱,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는 세 가지 키워드로 구성되어 있다
. "포스트아포칼립스(post apocalypse)", "디젤펑크(diesel punk)", "카체이싱(car chasing)" 그리고 이 세 가지에 집중한다면 영화의 모든 것들을 파악할 수 있다. 영화는 이 세 가지 요소를 정말 깔끔하고 담백하게 그려내고 있다. 120분 내내 정신 없이 달리고 터지고, 날아가는 것을 생각했을 땐 모든 것들이 과하다는 생각은 들지는 않는다. 이는 쓸데없는 '의미'에 대한 이야기들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포스트아포칼립스가 가지고 있는 절망감이나 디젤펑크에서 언급할 수 있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질문, 카체이싱에서 느껴지는 위기감 등을 말하려 하지 않고 그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무거운 상징을 한껏 내포할 수 있는 요소들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루는 감독의 역량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무엇보다 120분 전체를 돌아보았을 때 불필요한 프레임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다듬어진 구성에 기인하고 있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에서의 의미들이 마냥 가볍기만 하고 엔터테인먼트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다만, 지루한 사연을 통해서 이야기를 진행하기보다는 시각적인 상징들을 통해서 의미를 부여하고, 부여한 의미들에 대한 지나친 해석이나 풀이를 동반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차이를 보인다. 감독은 그저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움직이는 가를 들여다보길 원하는 것 같고, 이를 통해 몇 가지 의미들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영화의 초반 부에서 퓨리오사는 자원을 가지러 가는 전투 트럭에 임모탄의 아내들을 숨겨 출발한 뒤에 느닷없이 트럭의 방향을 돌린다. 여기서부터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흥미 있게 볼 수 있었던 부분은 좌측으로 트럭의 방향을 선회한다는 것이었다. 공간과 장소의 의미에 대한 연구를 한 이푸-투안(Yi-Fu Tuan)은 인간의 신체가 공간에서 지향하는 방향성과 의미에 대한 연구에서 좌측은 우측에 비해 미래를 상징한다고 했다. 또한 앞으로 전진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과거보다는 미래를 지향하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전진하는 것에는 신성한 것들을 지향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도 이야기한다. (-푸 투안, 구동회, 심승희 역, 『공간과 장소』, 대윤, 1995, 63~64쪽 참조.) 그러기 때문에 퓨리오사가 핸들을 왼쪽으로 꺾었다는 것은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들이 단순히 시타델로부터 탈출을 하고 싶다는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만을 지니고 일을 도모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읽어낼 수 있다고 하겠다.


그들은 왜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던 것일까?
그에 대해 왼쪽이 지향하고 있는 의미를 대입해 볼 수도 있다.



이푸-투안이 이야기한 공간의 방향성이 가지고 있는 의미들



또한 이러한 방향성에서 얻어지는 의미는 그들이 어머니의 땅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소금사막을 건너다가 맥스의 권유로 시타델로 향하는 것에서도 적용된다
. 소금사막을 무작정 건너봤자 희망을 기대할 수 있는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하고 그들의 방위 개념 자체를 전환한 것이다. 추격을 위해 주축세력들이 자리를 비운 시타델을 향한 전진이 그들에게 미래에 대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구원이라고 생각했던 어머니의 땅이 없어진 것을 받아들이고 난 다음 그들이 선택한 것은 미래였다


이러한 움직임에서는 이
-푸 투안의 이론에서 이야기하는 전방이 지니고 있는 신성함에 대해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우선 퓨리오사 일행이 시타델로부터 벗어난 이유가 그것이다. 무엇을 위해 탈출했냐는 질문에 퓨리오사는 구원이라고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자유나 억압으로부터의 탈출, 생존과 같은 일차원적인 대답이 나오지 않는 것은 영화 전체가 굉장한 속도감과 과도하지 않은 의미부여를 시종일관 견지했던 것을 생각할 때 이례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지향성이 이 영화의 볼거리들이 단순히 오락적 소비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퓨리오사의 트럭에 타고 있던 임모탄의 아내들은 서로 다른 목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우선 그 구원은 각자에게 다른 모양으로 나타난다
. 임모탄의 아기를 낳기 위해 존재했던 이들에게는 아이를 낳는 도구가 아니라 오롯이 자신으로 존재하고 싶어 하는 목적이 있다. 퓨리오사는 납치되어 오면서 빼앗겨버린 자신의 존재를 되찾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것은 그가 퓨리오사 장군이 아닌 돌아가신 어머니의 딸이자 그저 한 사람의 퓨리오사로 존재하고 있었던 고향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워보이인 눅스는 임모탄에게 버림받아서 사라져 버린 삶의 이유를 다시 찾기 위해서라는 목적을 지니게 된다. 곧 꺼져버릴, 유한함에 직면한 눅스는 그 어느 것보다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부여가 필요하다.
때문에 자신의 암세포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기까지 하고, 임모탄에게 버림받은 후 케이퍼블이 삶에 대한 의미를 언급하자 별다른 고민 없이 퓨리오사 일행과 함께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맥스 역시 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벗어나 현재의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싶어 하는 것이 영화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그러기 때문에 맥스는 자신의 길을 선택할 기회를 주었음에도 다시 일행들과 합류하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들을 종합해 보았을 때 그들이 이야기하는 구원은 곧 자신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온전히 자신 답게 살 수 있는 것, 그것이 그들이 지향하는 미래였고, 또한 구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구원을 원한다는 것은 이-푸 투안이 이야기 한 신성한 것들을 지향하면서 전진하는 것과 맞아떨어진다.


그들이 방향을 돌려 모래폭풍을 뚫고서라도 닿고자 했던 것은 구원이었다


이러한 메시지는 퓨리오사 일행이 임모탄을 제거하고 시타델로 돌아왔을 때 극명하게 드러난다
. 임모탄이 죽고 퓨리오사가 돌아왔음을 알아챈 시타델의 기존 세력들을 어떻게 할지 몰라 어리둥절해한다. 이제껏 한 번도 자신들의 의지로 행위를 주도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아무런 반응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퓨리오사를 맞이하기 위해 장치를 움직이는 이들은 워보이들 중에서도 아이들이다. 또한 그동안 임모탄이 군중들을 컨트롤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물을 개방하는 건 그동안 어머니 우유를 공급하기 위해서만 존재했던 여인들이었다. 아직 워보이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고, 생산 장치로서의 역할 만을 감당했던 이들이 변혁을 자신들의 손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들은 임모탄이 부여한 의미 외에는 존재하지 않던 시타델에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스스로 선택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영화의 문법대로라면 일종의 구원이다. 또한 영화의 전체적인 설정에 짙게 깔려 있는 종교적인 요소들을 보았을 때 그들이 갈망한 구원, 즉 온전히 자신에 가까워지는 것은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구원(redemption)과 같은 신성한 것이다.


돌아온 퓨리오사를 맞아주는 이들은 워보이들 중에서도 어린 아이들이었다


마지막으로 잘 만든 영화라는 의미부여는 이러한 다층적인 의미들이 서사에 의해서 열거되기 보다는 철저하게 보이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 나는 이 영화가 이 시대에 엔터테인먼트를 충족시키면서 어떻게 의미를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보여준 훌륭한 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때문에 과도한 의미부여를 피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세계를 보면서 되묻게 된다. 나의 세계에서, 구원은 무엇인가. 나는, 나답게 살고 있는가. 나답게 산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인가. 나에게, 구원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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