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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 왜 우리는 YS를 미워했냐고?(3)

  • 입력 2015.12.30 17:07
  • 기자명 경제평론가 최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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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세 천수를 누린 YS는 2015년 연말 최고의 뉴스메이커였다. 각종 언론매체는 그의 고난과 투쟁, 민주주의자로서 ‘김영삼’을 조명했다. 정희준 동아대학교 교수는 「왜 우리는 YS를 미워했나?」(직썰, 2015. 12. 02.)라는 기고를 통해 YS에게 어마어마한 상찬을 올렸다. 심지어 "너희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고 우리를 나무라기까지 한다.
틀렸다. YS가 딱 한 번 뜨거워져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꿰찼을 때, 뜨겁다 못해 자신을 하얗게 태워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사라진 수많은 사람들, 많다. 진보는 그를 욕해도 된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쓴다.




이전 글 보기 : <[반론] 왜 우리는 YS를 미워했냐고?(1)>
<[반론] 왜 우리는 YS를 미워했냐고?(2)>





YS는 DJ에게 열등감을 느꼈다
사실 1987년까지만 해도 YS의 정치적 식견과 비전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YS의 기민한 동물적 정치 감각에 대한 지지는 있었을지라도, 그의 민주주의적 이상과 신념, 향후 미래에 대한 비전에 대해 검증 받은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략적으로 그가 말실수가 잦다거나, DJ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어눌하다는 것 외에는 구체적인 그의 ‘실력’을 알 수 없었다. 이에 비해 DJ는 이미 다년간에 걸쳐 의회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1971년, 장충단공원에서 대통령 선거 유세 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



이를 아는 식자층에서는 자연스럽게 DJ를 지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부산과 경남을 제외하고서 말이다. 87년 후보자 단일화 과정은 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민통련은 김대중, 김영삼을 초청하여 정책 세미나를 열었다. 두 사람의 식견과 비전 그리고 주요 정책을 알아보는 후보 검증 작업이었다. 예상대로 김대중은 모든 면에서 김영삼을 압도했다. 민통련은 야당 단일 후보로 김대중을 추천하기로 결정하고 결의문을 발표했다.
"민통련은 이 시점에서라도 두 지도자가 희생적 양보를 통해 후보 단일화를 이루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보지만, 이것이 불가능할 경우 김영삼 총재가 살신성인의 희생정신으로 김대중 고문의 손을 잡으면서 망국적인 지역 감정을 해소하고 이번 선거에서 범국민적 후보가 압승하여 군사 독재를 끝장내는 데 협력할 것을 진심으로 촉구한다."
김택근, [김대중 평전 '새벽'·27] 동지의 배반 그리고 세 번째 실패 中(프레시안 2011. 12. 01)


이 영향 때문인지 YS는 이 이후 단 한 번도 ‘토론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참석하는 토론회라 하더라도 상호 토론이 아니라(불행하게도 87년 당시 대통령 선거에서는 후보자 상호간의 토론회가 없었다. 미디어를 통해 후보자를 선택할 수 있는 기준이 없었던 것이다.) 철저하게 후보자 1인과 다수의 패널이 참석하는 ‘관훈토론’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지금의 ‘잘 짜여진’ 시나리오대로 기자들이 질문하고 프롬프터 보면서 답변을 하는 청와대 기자회견(과연 이게 기자회견인지 모르겠으나)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수월할 것이다.
후보자 간의 정견을 발표하고 상호 토론을 통해 차이를 부각하고 국민의 선택을 받는 것이 민주국가에서는 기본이 될진대, 당시 맹목적이고 열광적인 지역감정은 국민들의 합리적 선택을 방해했다. 결국 ‘YS가 DJ에게 양보하라’는 민통련의 선언은 ‘그런 일이 있었다’ 정도로 치부되었으며 그 어떤 언론사도 이 상황을 세세히 언급하지 않았다.
내가 굳이 87년 후보단일화 실패의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는 이유는 아직도 당시 YS를 지지했던 일부 지식인들이 그때의 고집을 꺾지 않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종인과 김광두 등 박근혜를 지지해서 당선시킨 인사들이 아직 정권이 끝나지 않은 시점에 국민들에게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한 것을 볼 때, 명백한 선택의 실수를 저지른 이들이 아직도 사과하지 않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미화라니!!




김영삼의 돈 봉투
잘 알려진 대로 YS는 돈으로 쪼들려본 적이 별로 없다. 멸치잡이 어선을 수십 척 거느렸던 부친 덕이기도 하지만, 추측건대 일찍이 1970년대 ‘대중경제론’을 자신의 경제철학으로 내놓은 DJ에 비해, 아무런 입장을 표명하지 않은 YS가 기업인들에게는 훨씬 더 수월한(?) 상대였기 때문은 아닌가, 짐작만 갈 뿐이다.
다만, YS의 돈 봉투는 정치후배들의 지갑을 항상 풍성하게 하는 역할도 했다. 사실 故 유진산 전 신민당 총재로부터 배운 것이지만 YS는 그의 옷 주머니 곳곳에 돈이 든 지갑이나 봉투를 넣어두고 다녔다. 그러다 후배들을 만나면 세어보지도 않고 지갑 채 빼 줬다. 그 정치후배(여기엔 노무현도 있었다.)들은 ‘천하의 YS가 내게 지갑 채 주었다’라는 자부심을 느꼈다.
92년 대통령 선거는 YS가 DJ를 정계에서 은퇴(?)시킨 결정적 사건이었으며 YS의 ‘돈 선거’가 극에 달하는 선거였다.


김영삼 후보 측은 당시 선거에서 천문학적인 선거 자금을 살포했다. 김영삼이 스스로 "이러다가는 나라가 망하겠다"고 할 정도였다. 당시 대통령 노태우는 "3,000억 원을 선거 자금으로 김영삼에게 줬다"고 회고록을 통해 19년 만에 폭로하기도 했다.
그리고 김대중에게는 20억 원을 줬다고 밝혔다. 김대중은 그 20억 원 때문에 두고두고 발목을 잡히며 곤욕을 치렀다. 결국 사과까지 했다. 김영삼은 노태우에게서 받은 3,000억 이외에도 선거 자금을 무차별적으로 끌어 모았다. 선거 캠프나 자신이 직접 받은 선거 자금까지 합치면 상상할 수도 없는 액수였을 것이다. 원 없이 쓰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승리를 확신하며 표밭을 누볐다. 그런 김대중이 오죽 측은했으면 노태우가 당시를 떠올리며 회고록을 통해 미안해했겠는가.
김택근, [김대중 평전 '새벽'·27] 동지의 배반 그리고 세 번째 실패 中(프레시안 2011. 12. 01)




노태우 전 대통령의 회고록은 정치계에 적잖은 타격을 입혔다. ⓒ 조선일보 홈페이지 갈무리


겁도 많고 간도 작은 DJ는 김중권으로부터 받은 20억 원에 대해 사과를 했다. 사람들은 어떻게 독재자로부터 돈을 받을 수 있는가? 하고 비난했다. 그러나 떡 시루 자체를 받은 YS에 대해서는 비난하지 않았다. 나는 이 모든 게 YS에게서 지갑째 선물 받은 그 많은 ‘지갑 기자’들의 덕이라 생각한다. 노태우조차 DJ에게 미안해 했고, YS 스스로도 “이러다 나라 망하겠다.”라고 읊조렸던 92년 YS의 대선자금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언급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노태우가 회고록에서 언급하지 않았던들, 지금 활자화 되었겠는가?




최동지~ 넘어오면 현금 3천만 원!
3당 합당 후, YS의 민주계는 동교동계의 핵심들을 빼가려고 부단한 노력을 했다. 그때 넘어간 사람도 있겠고, 새로 수혈된 사람(김문수, 이재오, 손학규 등)도 있었다. 이 와중에 동교동계가 가장 분노한 것이 DJ의 집에 드나들던 집사 혹은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들도 빼가려고 했던 사건이었다.
전두환 정권 시절 나왔던 <동교동 24시>라는 참 나쁜 이 책은 당시 안기부가 동교동의 실무와 심부름을 하던 함 모 씨를 회유해서 만든 작품이었고, DJ진영에 큰 타격을 입혔다. 거짓말도 세 번 하면 다 믿듯이, <동교동 24시>에 묘사하는 DJ는 아주 악랄하고 기회주의적이며 교활한 인물로 그려 놓았다. YS는 이와 똑같은 짓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동교동 24시>가 출간된 뒤 저자 함윤식 씨가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 MBC



당시 DJ의 밑에서 정치를 하던 사람들의 주머니 사정은 뻔했다. 궁핍한 생활과 변변치 않은 생계를 유지하면서 자존심만 쎈 사람들이었다. 언론에 ‘김대중’이라는 이름 석 자가 실리지 못하고 ‘동교동에 사는 재야 모 인사’로 표현하면서 ‘동교동계’가 된지라 상도동계와는 좀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물론 상도동의 핵심이었던 최형우, 김동영, 김덕룡이나 동교동계의 핵심이었던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나 주군에 대한 충성심은 가히 최고이긴 마찬가지였다.
김옥두는 신군부에 잡혀가서 고문을 당할 때, 몽둥이로 내려치면 “아악!!”하고 비명을 지르는 대신 “선생님!!”하고 비명을 질러서(여기서 선생님은 김대중 선생을 의미함) 고문수사관을 질리게 만들었고, 내 부친은 남한산성에 납치되어 끌려가 고문을 받을 때, 고문수사관 입으로 물기, 벽이나 책상 모서리에 머리 부딪히기 등 자해를 통해서 고문을 극력 방해할 정도였다. 이런 독종들이 핵심으로 있는 곳이 바로 동교동계이고 상도동계였다.
그러나 주군의 성격에 따라 가신들도 달라지는 법! 이미 YS는 권력에 맛 들인 상태였다. 원래 풍족했지만 집권여당으로 넘어가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YS의 충신이자 동교동계 쪽과 나름 가교역할을 하던 김 모 씨가 내 아버지께 전화를 한 일이 있다.


“최동지! 넘어 와~ 어르신(YS)께서 당신을 찾으신단 말야~ 당신 넘어오면 서울지역에 지구당 위원장직 보장하고 현금으로 3천, 보장할게.”


내 부친은 자존심 빼면 시체인 사람이었다. 그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 YS 측에서 이런 제안을 던졌다는 것에 부친은 큰 모멸감을 느꼈다. 내 부친은 그 자리에서 쌍소리를 해 대며 전화를 끊었지만 후에 그 사건을 두고 ‘인간적인 연민마저 느꼈다’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깜짝 놀랐제?
정희준 교수는 YS가 ‘공직자 재산 공개, 하나회 제거, 금융 실명제 등 큼직한 개혁 정책’을 통해 국민을 통쾌하게 해 준 대통령이었고, ‘대통령 지지도 90%는 전쟁 중에나 가능한 수치’라고 하면서 그의 업적을 기린다.
나 역시 YS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때마다 통쾌했고, 지지를 보냈다. 90% 가운데 나도 속해 있었다. 이 어마어마한 업적은 전광석화처럼 일을 해치우는 기민함과 철저한 보안, 무서운 추진력이 그 배경이다. 참모들마저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YS가 빙긋이 웃으며 “깜짝 놀랐제?”했다는 것이다. YS는 이런 것을 즐겼던 것 같다. 심지어 연금시절 자신과 교류를 했던 옆집 꼬마 여자애(이규희 씨로 YS 당선 당시에 ‘꼬마동지 대장동지’라는 책을 펴 낸 바 있음)에게 전화해서 “깜짝 놀랐제?” 했다고 한다.



청와대에서 권영해 안기부장에게 업무보고를 받는 김영삼 전 대통령. 1995. 1. 20.



좋다! 국민들 다 깜짝 놀라게 해서 이런 어마어마한 업적을 세우는 것에 찬성을 한다. 그러나 한 가지만 명확하게 하자. 이제는 그런 ‘깜짝’ 놀라는 대통령의 통치행위가 통하지 않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YS니까 가능했으며, 당시의 시대적 상황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민주주의를 이끌어가는 정치 지도자는 일의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여론을 듣고 설득을 하고 합리적인 의견으로 끌어내서 비록 부족하더라도 차근차근 밀고 나가야 하는 것이다. 모 지방자치단체장이 대권에 도전하겠냐,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일단 싹 쓸어버리고~”라고 답을 해서 사람들의 속을 시원하게 했다. 나도 수구적이고 반동적인 인간들을 좀 싹 다 쓸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민주적 원칙과 상식을 지켜야 한다. 이제 전두환식의 싹쓸이는 고스톱에서나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쉽지 않은 것이다.
정희준 교수는 YS의 하나회 숙청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전두환과 가까운 육사교장 민병돈이 노태우 대통령 면전에서 대북정책을 비판한 후 경례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았다는, 그 살 떨리는 시절에 하나회를 숙청한 YS의 용기에 감탄한다. 그러나 민병돈 장군에 대해 좀 알고 이야기 했으면 한다. 그는 87년 6월 항쟁 당시 전두환의 계엄령 선포를 정면으로 반대했고, 5공 시절에 휘하 장병들의 자유 투표를 실시했으며, 육사 교장도 이 일이 있은 후, 스스로 그만 둔 인물이 그다.
또, ‘하나회 제거가 결국 나중에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는 데 최대 걸림돌을 사전에 제거한 것이라면’이라는 가정법을 동원하면서 마치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들기를 위해 하나회를 제거한 것처럼 표현한다. 말마따나 비록 전두환 시절이었지만 국회 국방위원회 회식 자리에서 여당 의원들을 두들겨 패는 군인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자신의 정권안위를 위해서 하나회를 해체한 것이지 무슨 김대중을 위해 하나회를 해체한 듯 표현하냐 이 말이다. 한국말은 아, 다르고 어, 다르다.




정치인을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정희준 교수가 쓴 글에서 드러난 가장 큰 문제는 역사의 인식을 오로지 ‘김영삼 대통령’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는 것에 있다. YS 집권시절, 외국에서 대학원 다니는 상황이었던 만큼 재야와 노동운동진영에 가해진 가혹한 탄압에 대해 모를 수도 있다는 것쯤은 이해한다. 그러나 YS에 대한 사람들의 비판은 그저 3당 합당과 IMF 때문이라고, 자신도 3당 합당이 아쉽다고 이야기하는 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탁, 까놓고 이야기해서 YS뿐 아니라, DJ도, 노무현도 자신이 야당에 있었을 때의 상황과 여당 또는 대통령이 된 상황에서 정국을 바라보는 관점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DJ도 사람을 꿔주는 한이 있더라도 의회 내에서 다수를 점유하려고 했던 것이다. 노무현도 그렇게 한미FTA를 시행했던 것이고 이 와중에 농민이 경찰에게 맞아서 죽는 불행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정치인은 무엇으로 평가를 해야 하는가?
과연 정희준 교수가 바라보는 식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단 정권을 쟁취해서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지만) YS의 방식이, 무협지보다 더 재미난 신문기사를 만드는 것이, 개혁조치를 화끈하게 밀어붙여서 국민의 90%의 지지를 받는 것이, 진짜 좋은 정치인일까? 그렇게 성공을 해야만(결코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박수를 쳐 줄 수 있는 것일까?
아래는 한국일보 서화숙 기자가 이승만 대통령을 건국대통령으로 높여야 한다는 뉴라이트 진영에 대해 날린 일침이다.


“이승만 대통령을 추앙한다는 것이 (유족들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 일이며 또 단지 그분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를 올바르게 살겠다는 모든 이들에게 굉장한 상처가 됩니다. 그리고 조롱이 될 수 있습니다. ... 중략 ... 우리가 정치가를 판단할 때는 그 사람이 얼마나 민주주의를 잘 확립했느냐? 그리고 그 사람이 인권을 얼마나 잘 지켰느냐가 가장 중요한 잣대입니다."

<백지연의 끝장토론> 中, 한국일보 서화숙 기자, 2011. 08. 17.


이승만 이름에 김영삼이라는 이름을 넣고 읽어보라. 새삼 다른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정치인을 평가하는 잣대는 민주주의의 확립이고 인권의 보전이다. 국민이 여당 견제하라고 야당 시켜줬더니 날름 권력의 품에 안기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의 약속을 어긴 것이다. 그가 대통령직에 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인권유린이 있었는지 모른다. 도서관 가서 한 번 신문 찾아봐라. 아무리 조중동이라 하더라도 사건을 완전히 외면하지는 못 했을 테니 아마 있을 게다. 바쁘지 않으면 당시 연세대 사태에 관련된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봐도 좋다.
우리는 지금 기가 막히게 불행한 시대를 지나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조국광복을 위해 만주벌판에서 총 한번 쏴 보지 못하고 이리나 늑대에게 잡아 먹힌 아니, 굶어서 얼어 죽은 조국 독립투사의 성함을 알지 못한다.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일제와의 투쟁을 위해 헌신했으나 노덕술을 비롯한 친일경찰에 의해 떠밀리듯 북으로 떠난 김원봉, 거기서도 숙청당한 김원봉이 흘린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다카기 마사오가 대통령이 되고 그 후예가 대통령이 되어 정의가 사라진 시대를 온갖 ‘흙수저, 금수저’론과 부대끼고 살아가는 이 환경을 우리 스스로 만들었다는 비참함을 곱씹으며 어찌 살아야 하는지 모를 지경이다.
제발 이 글을 단순히 YS 비판하기, YS 옹호하는 이들 비판하기, DJ 옹호하기 식으로 이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가 뭐라 해도 김영삼은 염석진이다
솔직히 나 역시 DJ와 노무현에 대해 매우 유감스러운 감정이 늘어진 이끼마냥 줄줄이 달려 있다. 김대중 정권 시절에도 민주노총은 “김대중 정권 타도하자!”라는 식의 구호와 깃발이 나부꼈고, 노무현 정권 시절에도 폭력적 국가기구로 인해 민중들이 탄압을 받았다.



서울 서린호텔에서 만난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 1986. 7. 8.



김대중과 노무현 시절, 신자유주의는 민중들을 엄습했으며 지극히 ‘한계’가 명확한 개혁에 그치고 말았다. 많은 이들이 김대중 정신과 노무현 정신을 이야기하지만, 이제는 그 김대중과 노무현을 넘어서야만 한다. 제한된 민주주의 시대를 펼친 김대중과 노무현의 정신을 넘어선 전면적 민주주의가 앞으로의 시대정신이 돼야 함이 분명하다. 그렇게 장강의 도도한 물결이 흘러가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역사를 치장한다 하더라도 명확하게 이야기할 것은 문민정부라는 레토릭의 화장술로 치장한 김영삼 정권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과는 그 근본적인 성격을 달리한다는 점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김영삼은 염석진이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안윤옥이며 하와이 피스톨이다. 건널 수 없는 간극이다. 이걸 억지로 민주정부의 연장선 혹은 앞선 선구자로 연결시키려 하니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 못하는 것이다.




역사를 두려워 하라
역사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지금 내가 딛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이 어떠한지 정확하게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3당 합당으로 정치질서가 어그러졌고, 6월 항쟁의 결과물로 만개해야 할 민주주의의 꽃이 꺾인 것이다. 과거 민주투사라 참칭했던 자들이, 결국은 군부독재의 품에 의탁하여 부와 명예를 탐했던 이들이 현재의 상황을 만든 것이다. 좌파니 종북이니 지금 험한 말이 나오는 근본원인이다.
YS만큼 투쟁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자기 양심을 속이지 않고 살려고 노력하는 수많은 소시민들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YS와 그를 떠받치는 이들이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소리 소문 없이 온 몸을 하얗게 불태워 대한민국을 위해 민주주의의 제단에 제 살과 혼을 기꺼이 내준 사람들과 그 유가족이 시퍼렇게 눈뜨고 있는 상황에서, 함부로 이야기하면 안 된다.
그러니 진보뿐 아니라 양식 있는 자들은 김영삼의 역사를 통해 오늘을 반성해야 한다.
적과 싸우다 적을 닮지 말고,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
그것이 김영삼과 그를 떠받치고 미화하는 자들에게 역사를 정확하게 인식시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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