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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님의 화려한 '침상일기', 이거 진짜야?

  • 입력 2015.12.24 14:39
  • 수정 2015.12.24 14:42
  • 기자명 물뚝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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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



난중일기, 어디까지 봤니?

아래에 인용한 것은 인터넷에 흔히 돌아다니는 <난중일기> 해석본이다. 진위를 가리기 전에 일단 같이 살펴보자.


맑다. 순찰하러 떠나 백야곶(여천군 화양면 백야도)의 감독관이 있는 곳에 이르니, 승평부사 권준(權俊)이 그 아우를 데리고 와서 기다렸다. 기생도 와서 종일 같이 놀았다. 비가 온 뒤라 산의 꽃이 활짝 피어 경치가 멋져 형언키 어렵다.

2월 19일 [양력 4월 1일]<경술>


오오.. 충무공 이순신께서 기생들과 함께 노시다니, 살짝 놀랍긴 하지만 갑자기 이해도 간다. (당시 사회상을 고려한다면) 호방한 무관들이 함께 풍류를 논하는데 어찌 기생이 빠질 수가 있으랴. 꽃이 흐드러진 봄의 풍경 속에서 말이다.


아침에 맑다가 저물 때에 비가 내렸다. 우우후 및 강진현감이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술을 먹였더니 몹시 취했다. 우우후는 취하여 쓰러져 돌아가지 못했다. 저녁에 좌수사가 왔기에 작별의 술잔을 나누었더니 취하여 대청에서 엎어져 잤다. 개(介, 계집종의 이름인 듯)와 같이 잤다.

3월 9일 [양력 4월 6일]<병자>


계집종이라니, 관비를 말하는 것인가? 개라는 이름이 당시엔 흔한 이름이었나 보다.


바람이 세게 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아침에 행적(行迪)이 와서 봤다. 진원(珍原)에 있는 종사관의 편지와 윤간(尹侃) 봉해의 문안 편지도 왔다. 이 날 아침 광주목사(최철견)가 와서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이어서 술이 나와 밥을 먹지 않아서 취해버렸다. 광주목사의 별실에 들어가 종일 몹시 취했다. 최철견의 딸 최귀지(崔貴之)와 잤다.

9월 19일 [양력 11월 8일]<임자>


뭐? 광주목사의 딸과 같이 잤다고? 혼례도 안 올리고?


바람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저녁나절에 길을 떠나 십 리쯤 되는 냇가에 이르니, 이광보(李光 輔)와 한여경(韓汝璟)이 술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서 같이 이야기하는데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안세희(安世熙)도 왔다. 저물 무렵에 무장(茂長)에 이르렀다. 여진(女眞)과 잤다.

9월 12일 [양력 11월 1일]<을사>


여진은 또 누구인가? 여진족인가? 한자로 보면 ‘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인 것 같기도 하고…


맑다. 하루 더 묵었다. 여진(女眞)과 두 번 관계했다.

9월 14일 [양력 11월 3일]<정미>


헉. 두 번씩이나? 하기사 두 번 정도야 뭐, 힘 좀 내면 가능하겠지만 일기에 횟수까지 적다니, 충무공께서 좀 지나치게 솔직하신 거 아닌가?


맑다. 체찰사가 현(무장현)에 이르렀다고 하므로 들러가 절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여진(女眞)과 세 번 관계했다. 여진(女眞)이 아파 울었다.

9월 15일 [양력 11월 4일]<무신>


으아니. 세 번씩이나? 그것도 아파서 울 정도로? 이순신 장군이 당시에 몇 살이셨더라?


맑다. 일찌기 창녕사람이 웅천 별장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살대(箭竹) 쉰 개를 경상수사에게 보냈다. 저녁나절에 수사가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활을 쏘았다. 장흥부사, 흥양현감도 같이 쏘다가 어둘 무렵에 헤어졌다. 나이 젊은 계집들은 하루 종일 같이 놀다가 초저녁에 돌아갔다.

2월 12일 [양력 3월 10일]<기유>


부사 현감들이 모이는 자리에 나이 젊은 계집들이 단체로 왔었다고?


맑다가 구름이 끼었다. 새벽 세 시에 출항하여 해가 뜰 무렵에 견내량의 우수사가 복병 한 곳에 이르니, 마침 아침 먹을 때였다. 그래서 밥을 먹고 난 뒤에 서로 보고서 다시 잘못된 것을 말하니 우수사(이억기)는 사과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일로 술을 마련하여 잔뜩 취하여 돌아왔다. 그 길에 이정충(李廷忠)의 장막으로 들어가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취하여 엎어지는 줄도 깨닫지 못했다. 비가 많이 쏟아지므로 먼저 배로 내려가니, 우수사는 취하여 누워서 정신을 못 차리므로 말을 못하고 왔다. 우습다.
배에 이르니, 회, 해, 면, 울(蔚) 및 수원(壽元) 등이 함께 와 있었다. 비를 맞으며 진 안으로 돌아오니, 김혼(金渾)도 왔다. 같이 이야기하다가 자정이 되어 잤다. 계집종 덕금(德今), 한대(漢代), 효대(孝代)와 은진(恩津) 네 명과 잤다.

3월 5일 [양력 4월 2일]<임신>


끄억. 이..이거슨, 쓰리썸도 아니고 파이브썸. 이게 당대의 관습으로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별장 난교로 유명한 모 차관이 살던 시대도 아니고…




아니, 이거 진짜야?

충무공, 성웅 이순신. 그는 당대의 무장이며, 임진, 정유 양 왜란을 맞이하여 조선을 구해낸 구국의 영웅이다. <난중일기>는 그가 전쟁 당시에 직접 겪었던 일을 기록한 일기이며 현재 전해지는 것은 모두 아홉 권으로 일곱 권의 일기와 서간첩 한 권, <임진장초>라는 책 한 권으로 구성돼 있다. 현재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書簡帖壬辰狀草)>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위에 인용한 문구들은 소위 난중일기 해석본이라고 인터넷 상에 떠돌아 다니는 글이다. 정확한 출처는 확인하지 못했다. 난중일기의 해석본은 매우 많이 존재하므로 그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된다.
삼도수군 통제사라는 수군 최고 직책까지 올랐던 고급 무관이 군영에서 겪은 일을 적은 일기에 자신의 성생활에 대해 저렇게 진솔하게 적었다는 것, 상당히 신기한 일이다. 물론 저런 진솔한 이야기들이 박정희 시절 강력하게 추진되었던 ‘이순신 영웅 만들기’의 흐름 속에서는 대중에게 노출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이은상이 쓴 <난중일기 역주해본>에는 저런 내용들이 모두 빠져 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일부에서는 이순신을 영웅화 하기 위해 오히려 인간적인 매력이 넘치는 진솔한 구절들을 고의적으로 뺀 것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온다.
일견 그럴싸한 주장이다. 이순신은 무관이다. 그것도 고위직이었으며 전란 기간 동안 호남 지역에서는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렸을 것이다. 그런 그가 당대의 성 풍속도에 입각해 봤을 때 하등 흠이 안 될 만한 행위들, 즉 계집종이나 기생들과 어울린 이야기를 일기에 못 쓸 이유가 없다. 여진이라는 어휘는 충분히 여성스러운 이름이며, 그녀와 관계한 횟수까지 기록하는 것이 뭐가 문제가 되겠는가? 오히려 무장으로써 강인한 체력(응?)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심지어 두 명도 아니고 네 명과 함께 하기까지 한 것으로 보아 개방적인 성생활을 즐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권위주의에 찌든 사람들이 위선적인 의도로 저런 이야기를 뺀 것도 이해가 갈 법한 일이고, 그게 밝혀진다 하더라도 이순신의 명성에 하등 흠이 갈 일이 아니며, 오히려 우리는 이순신이라는 역사 속의 영웅을 좀더 친근하게 대할 수 있고, 생동감 넘치는 인격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과연 저 문장들이 진실일까? 실제로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며, 그 내용을 이순신이 직접 쓴 것일까? 답은 ‘아직은 알 수 없다’이다.
<난중일기>는 후에 후손들이 붙인 제목이다. 원래의 구성은 이렇다.


제1책은
〈임진일기 壬辰日記 〉로 27매
(1592.5.1. ∼ 1592.5.4., 1592.5.29. ∼ 1592.6.10., 1592.8.24. ∼ 1592.8.28., 1593.2.1. ∼ 1593.3.22.),
제2책은
〈계사일기 癸巳日記 〉로 30매(1593.5.1. ∼ 1593.9.15.),
제3책은
〈갑오일기 甲午日記 〉로 52매(1594.1.28. ∼ 1594.11.18.),
제4책은
〈병신일기 丙申日記 〉로 41매(1596.1.1. ∼ 1596.10.11.),
제5책은
〈정유일기 丁酉日記 〉로 27매(1597.4.1. ∼ 1597.10.28.),
제6책은
〈정유무술일기 丁酉戊戌記 〉로 20매(1597.8.4. ∼ 1598. 1.4.),
제7책은
〈무술일기 戊戌日記 〉로 8매(1598.9.15. ∼ 1598.10.7.)로 되어 있다.


그 밖에 장계(狀啓), 등본(謄本), 별책 부록 끝에 1598년 11월 8일부터 17일까지 최후 10일간의 일기가 1장으로 되어 있다.
눈치 빠른 독자는 알아챘겠지만, 을미년의 일기가 빠져 있다. 유실된 것이다. 그 상태로 지금까지 전해져 <난중일기 초고본>으로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에 후대에 다시 정리한 <이충무공전서>가 있다. 1795년에 목판본으로 만들어진 이 판본에는 원문과 다른 곳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 두 가지가 기존에 우리가 <난중일기> ‘원본’이라고 간주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기록이 하나 더 발견되어 추가되었다. 17세기 말에 난중일기 원본을 필사해 보관하려고 만든 것으로 보이는 <충무공유사>라는 책이 있었다. 즉 <이충무공전서>에 비해 100년 정도 앞서 만들어진 판본이다. 이 판본은 덕수 이씨 종가에 <난중일기>의 별책부록 비슷하게 보관되어 오다가 현충사로 옮겨졌고 해독하는 과정에서 유실된 을미일기의 일부가 담겨 있는 것으로 밝혀져 귀중한 자료로 확인되기도 했다.



충남 아산시에 위치한 현충사



이미 이삼백 년 전부터 <난중일기>의 불완전한 카피본이 퍼지기 시작했고, 우리는 그 흔적을 쫓아 충무공이 직접 쓴 내용은 무엇일까 하는 것을 ‘추정’해 볼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이다. 거기다가, 충무공은 이 일기를 매우 난해한 한문으로 기록했다. 마치 이두(吏讀, 한자 차용 표기법, 衣(옷 의)를 두고 ‘의’라고 음독하지 않고 ‘옷’이라고 훈독해야 하는 경우 이두를 활용했다.)와 같은 용법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결정적으로 이 책들은 아주 급하게 쓴 초서로 적혀 있다. 해독이 그리 쉽지 않다. 당시의 용어들도 생소하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는 과연 충무공이 직접 일기를 쓸 때의 의도를 진실에 가깝게 해독할 수 있는 것일까?
<난중일기>는 매사가 그렇지만 역시나 일본에서 먼저 해석을 시도했고, 일어판 번역본이 나와 널리 읽히고 있기도 하다. 과연 일본 사람들은 이 난해한 문장들을 제대로 해석했을까? 충무공이 사용한 당시의 군사용어나 생활용어들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었을까?
어찌되었거나, 지금 중요한 것은 <난중일기>의 역사적 가치나 거기에 담긴 내용들의 난해함이 아니다. 과연 충무공께서는 꽃놀이를 나가 기생들을 단체로 불러 즐기며, 파이브썸을 즐기고, 하룻밤에 세 번씩이나 해 상대가 고통스러워 울게 만들 정도의 절륜한 정력을 자랑하는 플레이보이셨던가 하는 것이다. 논점을 일탈하지 말고 다시 주제로 돌아오기로 하자.
위에 인용된 내용을 놓고 진행되는 갑론을박을 인터넷상에서 검색하기는 무척 쉽다. ‘저 내용이 맞다’, ‘충무공은 그렇게 진솔한 분이셨다’, ‘부럽다’라는 측과 ‘저런 내용이 사실일 리가 없다’, ‘원문에는 저런 기록 자체가 없다’, ‘오역이다’라는 주장이 충돌하고 있었다.
기생들 이야기나 ‘개’라는 이름을 가진 계집종에 관한 내용은 제쳐두자. 일단 도대체 그렇게 자주 등장하는 여진은 누구인가부터 따져 보기로 하자. 여진이라는 이름은 원문에 나온다. ‘女眞’이다. 그러나 일종의 메모 비슷하게 일기장 옆 공간에 적어 놓기를 女眞 十十, 女眞 十十十, 이라는 식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충무공전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여진을 충무공의 섹스파트너로 해석하는 것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이 여진이라는 단어가 <이충무공전서>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근거로 날조라고 주장하지만 그건 틀린 주장이다. 비록 귀퉁이지만 원문에 분명히 적혀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충무공전서>는 상당히 많은 부분에 윤색이 가해진 기록이기도 하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셔서 상중인데 왕이 고기를 먹으라고 내려줘서 비통했다는 충무공의 솔직한 심정을 왕이 고기를 내려주셔서 감동했다는 식으로 윤색한다. 충무공이 왕에게 개기는 것이 보기 안 좋다고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저 기호 같은 문장에서 일단 여진을 진이라는 이름의 여성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리 무리한 해석은 아니다. 이 해석이 맞다면 여진은 아마도 관비였을 것이다. 문제는 반복되는 열십자이다. 20, 30을 의미하는 것인지, 마치 벽에다가 X표를 해서 횟수를 기록하는 것과 유사하게 횟수를 기록한 것인지 모른다.
즉, ‘여진과 두 번 했다’, ‘여진과 세 번 했다’라는 해석은 여진을 여성의 이름으로, 열 십자를 횟수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열 십자를 두 번 연속으로 쓰는 것은 20(卄)의 의미일 수도 있다. 이렇게 따지면 열 십자 세 번은 30이 된다. 두 번, 세 번도 아니고 스무 번, 서른 번을 했다고? 이건 좀 뭔가 이상하다.
이 부분을 놓고, 충무공 관련한 역사 전문가인 이용호 박사는 진작부터 오역설을 주장해 왔다. 그는 ‘석세(石世)를 돌세로 읽는 것처럼 충무공은 이두를 많이 사용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봐서는 안될 전쟁터에서의 기록에 본인만 알 수 있도록 이두로 적은 것이며 이후 정조 때 판각에서는 후대의 오역을 막기 위해 아예 지워버렸다’라고 주장한다. 정조 때 판각은 <이충무공전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이용호 박사는 충무공이 여진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나의 군대(진영)’이며, 여진 20, 여진 30은 20명의 군사, 30명의 군사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즉, 자신의 병사들을 이끌고 다른 곳을 방문해 거기 함께 묵었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용호 박사는 연세대에서 <난중일기 영역본>을 출간하면서 이 여진이라는 말을 ‘the night with chin(친과 함께 자다)’과 ‘spent the second night with chin(친과 함께 두 번째 밤을 보냈다)’라고 해석하면서 오역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난중일기 완역본>을 최근 출간한 초서 전문가 노승석씨는 이 부분에 대해 또 다르게 해석한다. ‘卄’자는 초서로 共이라는 것이다. 즉 女眞 十十는 女眞共이며, 이는 그저 여진과 함께 잤다는 뜻이지 횟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그러면 十十十는 또 뭘까?
아파서 울었다 하는 부분은 원문에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건 의역의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위 일기에 등장하는 최철견의 딸 최귀지는 서출이었다고 한다. 충무공의 신분을 고려한다면 광주 목사가 자신의 서출 딸을 충무공과 함께 자게 하는 정도는 당시의 관습으로 보아 이해가 갈 수도 있는 일이라는 판단이 든다. 그 경우, 충무공은 그 일을 일기에 기록했을 법도 하다.
네 명의 계집종과 함께 잔 내용은 원문에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나라 공무원들이 <난중일기> 정도의 자료를 인터넷으로 확인하기 어렵게 웹사이트를 만들어 놓는 만행을 저지른 덕분이다. 조만간 아산 현충사까지 가서 직접 <난중일기> 원본을 눈으로 보고 확인해서 다시 알려드리도록 하겠다. (근데 보여주긴 하려나??)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그리고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 더. 위의 인용에는 없지만, <난중일기>에는 ‘세산월(歲山月)’이라는 한양 기생이 충무공을 찾아 전남 영광까지 내려와 밤 늦도록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나와 있었다. 이는 노승석 씨의 해석으로 인해 세산월(歲山月)이 아니라 내산월(萊山月)인 것으로 확인됐다. 역시 초서 문제로 인해 발생한 오해인 것이다.
내산월은 선조 때 문인 이춘원(李春元 1571∼1634)이 자신의 시에서 언급했을 정도로 유명한 기생이다. 그리고 그 내산월은 충무공을 좇아 전쟁 통에 전남 영광까지 찾아와 함께 술을 나눌 정도로 충무공을 사모했던 것이다. 이건 오로지 잠자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것이다.




충무공이 직접 손으로 써서 남긴 일기는 초서와 이두체로 범벅이 되어 있는 혼란스러운 문장들이다. 역사적 사료로써의 가치가 엄청난 자료다. 그만큼 해석하기가 힘들지만, 우리는 그런 중요한 자료의 해석조차 아직 정설을 확립하지 못할 정도의 못난 자손들이다. 이유? 그거 해석한다고 돈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충무공이 절륜한 정력을 자랑하는 플레이보이였을 수도 있다. 또는


남해 기효근이 배를 내 배 곁에 대었는데 그 배 속에 어린 색시를 싣고서는 남이 알까 봐 두려워하니 가소롭다. 이같이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하고도 예쁜 색시를 태우기까지 하니 그 마음 씀씀이야말로 이루 다 말할 길이 없다. 그러나 그 대장인 원 수사(원균) 또한 그러하니 어찌 하랴.

- 난중일기 중에서


라면서 문란한 군 기강을 탄식하는 고지식한 군인이었을 수도 있다. 물론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는 호방한 고위 무관이었을 수도 있다. 어쩌란 말인가? 그게 현실이라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 뿐이다.
단지 안타까운 것은, 그런 절절한 기록 하나 제때 제때 해독하지도 못하는 우리들의 찌질함이다. 돈 안 되는 일이라면 충무공이고 뭐고 관심도 없고, 도로 깔기 위해서 문화재 따위는 불도저로 밀어버리는 우리의 천박함이다. 그게 더 심각한 문제 아닌가?
그리고 끝으로, 나는 개인적으로 차라리 충무공이 호방한 플레이보이였다면 더 좋을 것 같다. 고지식한 꼰대 장군보다야 삶을 즐길 줄 아는 로멘티스트가 구해준 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이 훨씬 더 자랑스럽지 않겠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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