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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사람 목숨 값이 너무 싸요"

  • 입력 2015.12.21 14:11
  • 수정 2015.12.21 17:55
  • 기자명 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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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황유미 씨의 영정을 들고 시위 중인 황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

삼성반도체공장의 노동자였던 故황유미 씨는 입사 2년 만에 급성백혈병으로 사망했다. 건강한 20대 초반 여성의 사례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발병에서 사망까지의 기간이 짧았다. 아버지 황상기씨는 삼성전자를 상대로 딸의 사망과 업무의 관련성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주요 언론사 대부분이 기사화를 거절한 상황에서 시사잡지 ‘말’지에 그의 인터뷰가 실렸다. 기사가 퍼져나가자 시민·노동단체가 관심을 보이며 힘을 보탰다.
삼성반도체공장에서 일했던 사람들 중 원인을 알 수 없는 암·백혈병과 불·난치병에 걸린 환자들의 제보가 잇따랐다. 이들은 함께 모여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후면 이들의 활동이 9년째를 맞는다.
모르쇠로 일관하던 삼성과의 협상은 지난해 새로운 전기를 맞는 듯 했다. 반올림에서 따로 떨어져 나온 피해자 6명의 가족이 모여 결성한 ‘가족대책위원회’(이하 가대위)와 삼성전자가 중재기구의 조정안에 합의한 뒤 반올림에 같은 제안을 했다. 삼성이 임명하는 조정위원장과 그가 선임하는 조정위원 2명이 만든 권고안을 놓고 세부 협상을 하자는 내용이었다.

반올림이 들러리가 된 게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지만 어쨌든 대화의 필요성을 느낀 그들은 조정위원회에 참여했다. 올 여름 권고안을 받아들고 나서 타결의 실마리를 찾으려 했다. 사회적대화기구라는 격에 맞는 대안을 만들고 전향적인 협상을 준비한 것이다. 반올림 활동가들은 올 여름부터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조정위원회의 ‘조정’은 가대위가 제안하고 삼성전자가 바로 받았어요. 처음에 우리는 회사와 직접대화를 원했기 때문에 거부했어요. 하지만 조정위원회가 반올림의 참여를 권고하고, 우리도 대화 자체를 포기할 수 없으니까 들어간거죠. 그래서 2015년 7월 23일 권고안이 나왔어요. 8월 중순부터 세부협상을 하자고 했고요. 그런데 회의 할 때마다 가대위와 삼성이 협상을 보류하자고 해요. 10월 7일, 그러니까 두 달만에 회의하려고 우리가 준비해서 갔는데 거기서 또 보류 하재요. 그때 '빡친'거죠. 그날 바로 기자회견하고 여기서 농성을 시작했어요.

아직도 권고안을 받아든 삼자(반올림, 가대위, 삼성전자)간의 협상은 지지부진하게 흘러가고 있다. 반올림 측은 삼성과 가대위가 독립기구의 조직을 원치 않는다고 비판했다. 특히 삼성은 자신들이 주도한 조정위원회의 안을 사실상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제안을 수용할 것이라는 언론플레이는 넘쳐나지만, 반올림 측에서는 삼성이 조정위원회를 무력화하려는 분명하고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고 했다. 협상장에서 삼성은 틀에 박힌 답변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반올림과 삼성의 입장이 갈리는 지점은 보상과 재발방지대책, 실행기구의 독립성과 투명성이다. 반올림은 공신력 있는 제3자가 추천한 인사들로 구성된 보상감시기구를 만들고, 공개된 기준에 따라 형평성 있는 보상을 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삼성은 개별협상을 원칙으로 내세우며, 보상 내용 또한 공개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고 있다. 반올림 측이 삼성반도체 피해자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인식하는 반면, 삼성전자는 이를 사적인 영역의 보상으로 제한하려는 것이다. 더욱이 삼성 측의 제안에는 개별보상 이후 산재신청을 금지하는 조항까지 포함되어 있어 반올림은 이 안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서울 강남구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농성중인 반올림 활동가들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8번 출구 앞. 고개를 들어 올려도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삼성전자 사옥 앞에 우체통보다 낮은 반올림 노숙농성장이 있다. 12월 2일 밤, 반올림 활동가이자 교섭단 간사인 산업의학전문의 공유정옥씨를 만나 반올림의 활동상황과 산업재해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산재는 예방을 잘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목숨 값이 너무 싸니까 예방을 안 해서 자주 발생하는 거예요.

한국은 산업재해 발생률이 유독 높은 나라다. OECD국가 평균의 3배에 가깝고 산재사고 사망률만으로 치면 OECD국가 중 1위다. 가장 낮은 수치를 보이는 영국과 비교하면 14배나 높고 리비아, 튀니지, 우즈베키스탄 등과 불명예의 어깨를 나란히 한다. 원인 해석은 입장에 따라 분분하다. 그중 개인의 ‘안전불감증’을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같은 사업장에서 수백 명이 불·난치병에 걸려 고통 받고, 사망에 이른 이유가 유독 피해자들의 안전 의식이 낮아서일까.

1980년대 IBM사는 화학물질 피해노동자들로부터 대규모 고소를 당했어요. 그 이후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메모리반도체 생산을 접고 개발도상국에 생산기계를 팔아버리죠. 그걸 넘겨받은 기업이 삼성이에요.

높은 공사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위험하다. 때문에 건설사는 공정이 느려지는 걸 감수하고 근로자의 몸을 안전난간에 묶어서 추락을 예방한다. 이처럼 예방은 우리가 아는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실행하는 선제조치다. 반도체 제조공정에서 사용하는 화학물질이 인체에 심각한 질환을 일으킨다는 사실은 미국의 사례를 통해 이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삼성은 아무 예방책도 마련하지 않았다. 위험성을 알면서도 방관했다면 문제는 윤리적인 차원으로 넘어간다.
연 매출 200조 원을 넘나드는 삼성전자가 노동자들의 안전에 대한 사전 조치도 취하지 않고, 심지어 피해자가 발생한 이후에도 그들의 발병과 업무의 관련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사람 좀 죽어나가도 돈이면 다 된다는 기업운영의 비윤리성을 인정하게 되는 꼴이기 때문일까.



반도체 공장의 노동자들

산업재해보상보험금은 기업이 내는 보험금과 정부의 예산으로 충당된다. 때문에 산업재해로 인정되어 보상금이 지급되면 정부는 세금이 어떻게 집행되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산재발생의 인과과정을 조사해야 한다. 정부가 나서서 기업을 조사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업은 가급적 사건을 기업과 개인의 문제로 축소해 끝내려고 한다. 숨기려는 기업과 밝히려는 피해자는 대개 산재신청에서 부딪힌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쪽은 대부분 피해자다. 대한민국에서 산업재해를 인정받기는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는 까닭이다.


150명의 노동자가 죽어가도 “문제 없다”는 삼성, 받아 적는 언론

삼성반도체 공장은 수원, 온양, 기흥, 천안, 아산 등 중부지역 곳곳에 있다. 이곳에서 일하거나 일했던 근로자중 150여명이 불·난치병으로 고통 받고 있다. 그중 50여명은 피를 쏟거나, 피부가 썩거나 뼈가 바스러지는 고통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이들 이름은 산업재해 사망자 명단에 없다. 산재인정을 못 받았기 때문이다. 한 공장에서 3교대로 일하다 병을 얻어 죽었는데 왜 산재인정을 못 받는 걸까. 산재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당사자가 재해와의 업무관련성을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기업들은 ‘영업비밀’등의 이유를 들어 상세정보를 공개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사실관계를 은폐·조작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삼성도 마찬가지였다.

(유미의 사례를 보도한) ‘말’지 기사를 받아 쓴 수원지역신문을 공장 노동자들에게 나눠주는 데 경비원이 와서 다 수거하더라고요. 가판대에 꽂아두면 가져가 버리고. 공장 앞에서 기자회견 할 때는 삼성 직원이 기자 행세를 하며 염탐하더라고요.

황상기씨도 어떤 화학물질이 딸을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 밝히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번번이 삼성의 벽에 가로막혔다. 삼성은 지금까지 반도체에 들어가는 화학물질 중 단 한 종류도 공개하지 않았다. (최근 발표된 SK하이닉스 반도체공장 역학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제조공정 중 약 2,000종의 화학물질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황상기씨는 2007년 9월 1일 참관인으로 역학조사에 따라 들어갔지만, 어떤 부가설명도 없는 상태에서 비전문가의 눈으로는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었다.
더욱이 삼성은 역학조사 현장에서 은폐 시도를 했다. 황유미씨가 죽자 위로금조로 500만원을 들고 왔던 삼성은, 황상기 씨가 집요하게 문제를 들춰내자 역학조사 중 그를 따로 불러 10억을 줄 테니 사회단체 사람들을 만나지 말고,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절대 말하지 말라는 회유를 시도했다. 개별협상과 보상내용공개금지로 사태의 본질을 축소·은폐하려는 전략은 이때부터 가동된 것으로 보인다.


2011년 6월 삼성 본사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넘어진 황상기 씨 ⓒ시사IN

황상기씨를 회유하는 데 실패하고, 반도체 피해자들의 고통이 여론을 타고 확산되자 삼성은 미국 산업안전보건 컨설팅회사인 인바이론사(社)에 의뢰해 자사 반도체공장의 업무 무해성을 공신력 있게 입증하려고 했다. 공장의 작업환경이 인체에 무해함을 증명함으로써 백혈병, 임파선암, 뇌종양, 유방암, 난소암 등의 원인이 피해자들의 생활습관과 가족력 때문이라는 추론을 이끌어내기 위한 논리적인 보강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삼성은 이 컨설팅에만 수십억 원의 비용을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2011년 7월 14일 컨설팅업체가 기자회견을 했어요. 강남 삼성전자 사옥 앞에서 기자 이백 여명이 삼성이 대절한 버스를 타고 기흥공장에 갔죠. 연구진이 미국인이니까 발표를 영어로 하더군요. 근데 통역하는 사람이 산업안전보건에 무지해요. 통역을 이상하게 하는 거예요. 옳게 해도 관련 전문가가 아니면 못 알아듣는 말을 그렇게 엉망으로 통역하는데 기자들이 어떻게 제대로 받아 적겠어요. 여튼 결론은 심플했어요. 자기들이 봤더니 삼성전자의 안전보건 관리는 완벽하대요. 산재신청자 6명의 업무관련성도 근거가 없고요.

피해자의 가족을 은밀히 회유해 사건을 덮으려다 실패한 뒤, 삼성이 수십억의 돈을 주고 의뢰한 컨설팅업체가 기자 수백 명을 불러놓고 발표한 삼성의 결백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반대 결과가 나왔다면 삼성은 이를 공개했을까?
황상기씨는 딸의 죽음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여러 언론사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 사건에서 언론사는 또 하나의 기업일 뿐이었다. 주류 언론사 대부분이 그의 부탁을 거절한 것이다. 이 사건을 다룬 대다수의 언론은 삼성전자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 적어 내보내는 데 그쳤다. 황상기씨 등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의 사연을 듣고 기사를 쓰는 언론사는 열 군데 중 한 군데 정도였다.

반올림의 협상력에 불만을 품고 개별협상을 신속히 받길 원하는 피해자 가족 여섯 분이 따로 가족대책위원회를 만들었어요. 피해자 가족도 두 조직으로 나뉜 셈이죠. 그런데 언론에 보도되기를 이 분들은 실제 피해자모임이고, 우리(반올림)은 활동가 조직인 것으로 규정되어 실리는 거예요. 마치 우리가 과격한 주장을 해서 협상 진행이 안 되는 것처럼요. 이렇게 한번 낙인을 찍으면 당사자들이 아무리 ‘아니야, 그게 아니야’라고 해도 바뀌지 않아요. 이 회사가 언론을 장악하고 있으니까, 90% 언론이 그렇게 쓰는 거예요.

기업의 조직적인 은폐·왜곡 시도와 언론사의 편향된 논조는 산재신청자들이 업무관련성을 입증하기 위해 가장 먼저 넘어야 하는 벽이다. 기업이 제시하는 위로금 몇 푼 받고 끝내는 것이 현명해 보일 만큼 두 세력의 차이는 극명하게 갈린다. 기업의 사탕발림을 거부한 반올림의 싸움은 8년 째 지속 중이다.


피해 사실 입증은 피해자의 몫…그러나 제조공정은 전부 '영업비밀'


반도체공장에서 발생하는 화학물질에 의한 산업재해는 관련성 입증 과정에서 과학적인 한계에도 부딪친다. 공사현장에서 떨어져 다치거나, 주방에서 일하다 화상을 입는 것과는 다른 악조건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현대의·과학의 봉인된 난제를 풀어야 하는 사람도 피해자들이다.

일상생활을 바꾼 <화학의 시대>인 1940년에서 1982년 사이에 합성 화학물질 생산은 약 350배로 늘고,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종류의 인공 화학물질이 환경과 야생 생물에게로 흘러들었다. 현재(1996년)는 전 세계에 10만종 이상의 합성 화학물질이 시장에 나와 있다. 이처럼 검증되지 않은 물질들이 쏟아지지만 현존하는 전 세계 검사 시설은 겨우 5백 종의 물질만 검사할 수 있을 뿐이다.

- 테오 콜본 외 2인 <도둑맞은 미래 our stolen future>

반도체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사물이지만 제조 공정은 대부분 화학물질을 이용해 진행된다. 화학 성질에 따른 반응의 유무와 정도를 조절해 회로를 만들기 때문이다. 한쪽에서 시작해 순서대로 회로를 조각하거나 이어 붙이는 물리적인 방식이 아니라 필름을 현상하듯 회로를 기판에 입히고, 수천 종의 화학물질을 바르고 씻어내면서 만든다. 그런데 삼성전자는 제조 공정에 어떤 화학물질을 쓰는지 한 종류도 밝히지 않고 있다. 유독 삼성전자 사업장에서 많은 피해자가 발생하는 상황은 삼성만의 특이한 화학물질 사용에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만든다.

반도체공장 산재피해자들은 대만도 있고, 우리나라 하이닉스도 있어요. 그래도 삼성만큼 많진 않아요. 똑같은 케미컬을 쓰더라도 그 케미컬에 노출되는 상황에 따라 다른데, 삼성만의 특수한 요인이 작용할거라는 의심이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는 거죠. 화학물질 중에 노동자들이 ‘SS400’ 이렇게, SS를 붙여서 부르는 물질이 있어요. 삼성솔루션(Samsung Solution)의 약자인데, 일종의 비법 소스인거죠. 중요한 영업비밀이어서 극소수만 아는 물질인데, 그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추정해볼 뿐이에요.

딸의 죽음의 진실을 묻는 황상기씨에게 삼성전자는 과학적인 증거를 대라고 했다. 어떤 제조 공정에서, 어떤 화학물질이, 언제, 얼마나, 어떻게 유미씨 몸에 들어가서, 어떤 생체 부작용을 일으켜 백혈병에 이르렀는지 합리적 근거를 요구한 것이다. 신도 모르는 발병의 육하원칙을 화학 전문가도 아닌 평범한 아버지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설령 안다고 해도 ‘왜’라는 이유, 즉 유미씨가 돈을 벌어 행복하게 살려고 했던 동기를 물고 늘어지는 기업을 상대로 황상기씨는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었을까. 그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신청을 했다. 그러나 공단도 그의 편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는 무죄추정원칙이 있다. 유죄 판결이 나기 전까지는 피고인에게 죄가 없다는 전제 하에 수사와 재판을 진행하는 원칙이다.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이 질서가 법률상의 원칙으로 자리 잡은 것은 국가가 시민의 보편적 권리와 자유를 가장 우선하겠다는 의미다. 안전할 권리, 목숨을 지킬 권리는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권리에 해당한다.


2012년 7월 26일 국회 정론관에서 심상정 의원과 반올림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정부의 산업재해 인정 및 삼성전자의 사과를 요구했다.


그런데 산업재해보상법에서 근로자의 재해는 ‘업무관련성 없음’이 기본원칙이다. 산재인정을 받으려면 자신이 진짜로 일하다가 아프게 되었다는 사실, 즉 근로복지공단을 속이지 않음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기업의 무죄를 기본으로 두는 원칙. 이 원칙은 누구에게 복무하고 있는가.
물론 개인이 인과를 증명할 수 있는 방안은 마련되어 있다. 형식적으로는. 개인이 기업에게 영업비밀에 해당하는 정보를 공개하라고 강제할 수는 없지만, 산재인정을 받는 과정에서 기업의 정보가 공공기관으로 넘어가면 개인은 정부를 상대로 그 정보를 공개하라고 요구할 수 있다. 그 사안이 영업비밀이라도 해도 ‘공공의 안전과 보건에 관한 것’이면 말이다. 그러나 삼성의 경우 그런 법률은 우습게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이 문제다.

사람이 죽으면 경찰에 돈을 줘서 수사를 의뢰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일하다가 죽으면 죽은 사람보고 노무사 고용하고 수임료 줘서 왜 죽었는지 직접 밝히라고 해요. 지금 고용노동부는 삼성의 영업비밀이라는 것을 다 보호해 줍니다. 일부 산재인정을 받아낸 과정에서 정부가 보유한 정보도 공개하지 않고 있어요. 심지어 무슨 보호구를 착용하는지도 공개가 안 돼요. 왜 공개 안하냐고 하면 소송하라 그래요. 소송을 해서 승소하더라도 3~5년 걸려서 정보를 받겠죠. 산재소송 다 지고 나서요. 일사부재리잖아요. 그때 받아봐야 소용이 없어요.

기업이 산재 인정을 꺼리는 또 다른 이유는 보험금 요율에 있다. 기업은 매년 산업재해보상 보험금을 낸다. 근로자가 일하기에 위험한 사업장은 안전한 회사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보험금을 낸다. 교사들이 일하는 학교는 낮고, 용접공이 일하는 조선소는 높다. 지수로 환산된 요율이 정해져 있다. 산업재해가 발생한 사업장은 이듬해 요율이 인상된다. 기업에서는 요율 인상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산업재해 인정에 인색하게 군다.
혈액암, 골수암, 피부암, 희귀성 난치병 환자가 속출하는 삼성반도체의 산업안전 위험지수는 0.35로 직업군 가운데 일선 학교 수준과 같다. 안전도 면에서 최고 수준의 일터라는 의미인가? 이 안전도가 과연 의미 있는 수치인 걸까?
경제 권력은 세습되면서 더욱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한국의 대기업은 국민 삶의 전반에서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대기업의 비윤리적 영업행태를 제어할 수 있는 조직은 정부가 유일하다. 그런데 고용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 등의 공공기관은 오히려 강자인 삼성의 편에 서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주고 보호하고 있다.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피해는 단지 억울한 약자들의 현실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사회의 기업과 정부의 유착 시스템이 얼마나 공고한지를 적나라하게 반영하는 사례다.


산재는 로또가 아니라 당연한 권리다

공유정옥씨는 산재를 인식하는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강물이 흘러야 조각배가 움직이듯 산업재해를 보는 시각이 바뀌어야 인정률도 올라가고, 더 많은 피해자들이 구제받을 수 있다.

산재를 사회보장제도와 인권차원에서 생각하지 않는 게 문제에요. 노동자들 사이에 산재를 인정받는 것이 노동권이 아닌 운 좋으면 받을 수 있는 로또 쯤으로 인식되어 있어요. 산재 보상은 시민(근로자)의 권리에요. 일하다가 병들고 다쳤다면 치료와 생계의 최저선을 보장 받을 권리요. 함부로 박탈하면 안돼요.

산업재해보상보험은 근로자는 선, 고용주는 악이라는 구도를 만들고자 시행되는 제도가 아니다. 예방이 최우선이지만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산업재해는 근로자와 고용주 모두에게 손해를 주는데, 그 금액과 범위가 막대하기 때문에 드는 보험이 산재보험이다. 근로자의 생존을 보장하고 기업의 안정을 위한 상생 장치인 셈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 당연한 안전장치를 부정하고, 노동자들이 그들의 권리로서 받아야 할 보상금을 공돈으로 치부하고 있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될지 몰라. 그러면 난 끝이야‘라는 불안. 불안을 공유하고 증폭하는 사회가 과연 살만한 공동체일까. 또 억울한 사람을 보며 내 일이 아니라는 것으로 위안을 얻어야 하는 사회에서 우린 어떤 내일을 발견하는 걸까. “억울한 사람 없이 보상받을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이 널리 퍼지는 사회가 괜찮은 사회 아닌가요.”라며 무심한 웃음을 보이던 공유정옥씨의 표정이 이 글을 쓰는 내내 눈앞을 떠나지 않았다.
밤8시에 시작한 인터뷰는 3시간동안 이어졌다. 나는 반올림의 존재를 영화 <또 하나의 가족> 홍보영상을 통해 처음 알았다. 인터뷰 전까지는 그간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 거의 몰랐다. ‘아시아경제’와 ‘디지털데일리’를 보며 ‘반올림도 똑같이 돈만 밝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나도 했다. 하지만 편집된 글로 접하는 사실과 내 앞에서, 내 눈을 보고, 호흡을 바꿔가며 표정변화와 함께 전해지는 사실은 너무 큰 차이가 있었다. 공유정옥씨의 발언은 차분했지만 날카로웠고, 넓었지만 또한 구체적이었다.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면 난 사람을 믿고 싶었다.

故황유미 씨와 아버지 황상기 씨


사람이 힘이고, 사람이 짐이다. 사람은 서로 짐이 될 때도 있지만 힘이 될 때도 많다. 짐과 힘을 교환하면서 우리는 함께 산다. “내 무릎이 푹푹 꺾이면 옆 사람이 버텨주고, 그가 쓰러지면 내가 대신하면서 여기까지 왔다”는 공유정옥씨의 반올림 활동기. 2일 밤, 높이 200미터에 이르는 마천루 아래서 반올림이 버티며 들고 있는 하늘은 잿빛이었다. 항의 문구를 적은 피켓을 잇대어 벽을 치고 얇은 비닐을 두른 노숙농성장 위로 그날 밤 많은 눈이 내렸다. 농성장은 버텨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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