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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지도자가 불러온 최악의 참사, 쌍령 전투

  • 입력 2015.12.16 11:50
  • 수정 2015.12.16 13:30
  • 기자명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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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령 전투'를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한국사 전공자가 아닌 이상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일 거다. 교과서에 제대로 나오지 않으니 고등학교 시절 공부를 열심히 했던 사람도 알 도리가 없다. 쌍령 전투는 1637년 음력 1월 3일 벌어진 청나라 군대와의 싸움으로, 우리 나라 전쟁 역사상 최악에 가까운 참패다.

이런저런 전쟁이 많았던데다 대승도 대패도 흔했던 것이 우리 역사지만, 쌍령 전투만큼 참담하게 진 경우는 드물다. 일본군의 기습에 5만 대군이 무너져내렸던 광교산 전투도 부대 전체가 몰살당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쌍령 전투는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쌍령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대부분의 병사들은 적군에게 죽은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



무능한 지휘관의 대책 없는 돌격…참사는 예고되어 있었다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조선 조정은 팔도에 영을 내려 근왕병을 집결시키도록 했다. 근왕병이라야 농민들에게 창이나 활 들려 준 엉성한 부대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팔도 감사와 병마 절도사들은 부랴부랴 관내의 장정들을 긁어모아 임금이 피신해 있는 남한산성을 향해 행군했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땅 넓고 인구도 많았던 경상도 병력이었다.
당시 경상도에는 병영만 좌병영, 우병영 두 곳이 있었다. 기록마다 많이 엇갈리긴 해도, 이 때 경상도는 최고 4만(연려실기술 기록), 못해도 2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걸로 추정된다. 전사한 지휘관들의 출신지를 봐도 경주 출신에 백의종군한 무관 손종로, 창원부사 백선남, 안동 출신 선약해 등등이 있으니, 아마 경상도 전지역에 총동원령 수준의 징집이 내려졌을 것이다.
그들은 강행군을 거쳐 문경 새재를 넘어 충주를 거쳐 경기도에 진입했다. 경상 좌병사는 허완, 우병사는 민영이었다. 머리 수는 그런대로 채웠으니 나름의 자신감도 있었을 터다. 그런데 요즘도 그렇지만 이 때도 '쪽수'는 전쟁의 기본이지 전부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적군의 정보였는데, 임진왜란 이래로 조선군 장수들이 가장 취약했던 부분이 바로 정보전이었다. 척후병만 제대로 내보냈어도 범하지 않을 실수를 무시로 했던 것이 그 증거다. 이 전투에서도 정보력의 부재는 여실히 드러났다. 경상도군은 쌍령에 이르도록 척후 한 번을 내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경기도 광주 부쌍령

반면 청나라 군대는 이미 조선군의 근왕병이 사방에서 몰려 온다는 것을 알았고 대책을 세워 두고 있었다. 남한산성을 포위한 10만의 청군 가운데 일부가 쌍령으로 남하했다. 그런데 쌍령에 이르른 조선군 부대를 이끌던 경상 좌병사 허완은 다음과 같은 인물이었다.

나이가 많고 겁을 잘 먹어 사람들을 보면 질질 짜기부터 했다.(연려실기술)

그는 희한한 부대 배치를 선보였다. 진의 가장 외곽에 훈련이 덜 된 조총부대를 배치하고 그 다음에 정예 사수를, 그리고 창검으로 돌격해서 싸우는 살수 부대를 맨 후방에 배치한 것이다. 일반적인 부대 배치와는 정반대였다. 이건 순전히 허완 자신의 목숨을 보호하겠다는 의도였다. 이에 까무라치게 놀란 부하 장수들이 항의하자 허완은 이렇게 대답했다. “안돼. 정예 사수들이 얼마 없지 않나.” 그럼 맨 앞의 초보 사수들은 뭐 화살받이 칼받이란 말인가.
조선군은 쌍령 앞을 흐르는 개천을 해자 삼아 목책을 둘렀다. 그런데 미리 이들의 정보를 입수해 놓은 청나라 군대는 낮은 곳으로 돌격해 들어오지 않고 산등성이를 타고 남하하여 고지대로부터 짓쳐들어왔다. 북한산성 성벽이 그렇듯, 낮은 곳의 목책은 높게 쳤지만 상대적으로 고지대의 목책은 허술했다. 청나라군은 조선군의 이 허점을 찔러서 고지대에서 조선군을 내리몰았던 것이다.

적군은 많지도 않았다. 기껏해야 수백 명의 기병이었고 그 중에도 수십 명이 앞으로 나선 것이었지만 전방의 초보 사수들은 겁에 질린 나머지 조준도 못 한 채 아무 곳에나 총을 난사했다. 결국 적에게는 제대로 된 피해도 주지 못한 채 화약이 떨어져 버렸다. 애초에 화약을 절약한다는 명목으로 사수 1인당 열 발 정도 쏠 화약만 지급했던 탓도 있지만.
화약이 떨어진 뒤 몇몇 용감한 사람들이 앞에 나가 활을 쏘며 독전했지만, 자신이 들고 있는 조총이 쓸모없는 쇠막대가 되었다는 걸 깨달은 부대는 크게 동요했다. 그 사이, 이들의 머리 위로 청나라군의 돌격이 시작되었다. 경상 좌병사 휘하의 군대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기록에 따라 세부적인 부분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이후 한국의 전쟁 역사상 가장 참담한 장면이 벌어진다.
높은 데서부터 밀고 내려오는 청나라군에 쫓긴 조선군이 도망을 치며 서로를 밟아 죽이게 된 것이다. 뒤에서는 적군이 밀려 들어오고, 살 길은 오로지 목책을 넘는 것 뿐이었다. 조선군은 일시에 낮은 지대의 목책으로 몰렸다. 그 중에서도 힘없는 자들은 넘어지고, 힘있는 자들은 그걸 짓밟고 목책에 매달렸다.
병사들은 목책을 필사적으로 기어올랐다. 그런데 막상 올라서고 보니 목책 바깥 쪽은 또 까마득했다. 낮은 쪽 목책은 당연히 높게 지어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뒤에서는 꾸역꾸역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면서 올라오고 있었기에 돌아설 수도 없었다. 결국 먼저 올라선 병사들은 눈을 질끈 감고 목책 아래로 뛰어내렸지만 태반이 목숨을 잃었다.



오르다가 밟혀 죽고 뛰어내려 머리 깨지고 허리 부러져 죽은 시신들이 목책 안팎에 산처럼 쌓이고서야 뒤에 오던 병사들이 그들을 디딤돌 삼고 계단 삼아 목책을 넘어 도망갈 수 있었다니, 참사도 이만하면 세계사적 참사다. “골짜기가 구릉이 되도록 시체가 쌓였다.”는 기록이 남은 것을 보면...
아마 추격하던 청나라군도 기가 막히지 않았을까.

가장 볼썽사나운 부분은 제가 살고 싶어 부대 배치를 엉망으로 햇던 경상좌병사 허완도 도망가다가 밟혀 죽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자가 그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자질이 현저히 부족했던 허완을 윗자리에 올려 놓은 것은 인조반정이었다. 별 볼일 없던 인물이 인조반정을 거치면서 줄을 잡아 반짝 출세를 했던 것이다.
어쨌든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허완의 부대가 궤멸되자 청군은 경상우병사 민영의 진영에게 달려들었다. 민영의 부대는 그래도 허완의 부대보다는 나아서 정예 포수들이 일제 사격을 가해 청나라 군대를 움찔하게 했는데, 여기서도 화약을 아낀다고 정예 포수들에게 딱 두 냥씩 (열 발 정도 쏠 수 있는)의 화약만을 지급한 게 말썽이 생겼다.
처음 지급한 화약을 다 쓰자, 수령들이 나서서 화약을 재분배하기 시작했는데 그만 그 화약 더미에 불꽃이 튀면서 폭발이 일어났다. 그 자리에서 수십 명이 몰살한 것은 물론 화약도 전부 날아가 버렸다. 화약이 떨어진 군대. 그 뒤로는 또 다시 도망과 압사가 반복되었다. 경상도 해안가부터 태백산맥 줄기까지 경상도 방방골골에서 박박 긁어온 수만 명은 그렇게 어이없이 증발했다.


승리는 기념하고 패배는 기억해라


척후병 하나 제대로 내보내지 않아 적의 위치와 상황을 파악하는데 실패한 정보력의 부재, 훈련 안된 군중을 머리 수 하나만 믿고 정예병 앞에 들이미는 우매함, 그나마 있는 전력을 지도부 사수를 위해 써 버리는 비겁한 아둔함, 지휘관 스스로 통제력을 상실하고 도망치다가 밟혀 죽는 참담함, 그리고 청나라 군이 죽인 것보다 더 많은 수를 스스로 밟아 죽인 조선 병사들의 얼굴에 가득했던 비루함. 역사 교과서에 싣기도 싫을 만큼 황당한 참패를 그려낸 요소들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역사 교과서는 이 이야기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사람들은 아픈 기억을 지우려고 한다. 돌아보기도 싫은 기억은 아예 페인트칠을 해 버리지. 하지만 인생의 스승이 되는 건 대개 즐거운 추억보다는 통한의 기억이다. 틀린 문제에 부아가 치밀어 그 문제를 머리 속에서 지워 버리면 같은 문제를 또 틀리게 된다. 승리는 기념하고, 패배는 기억해야 되는 이유는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전쟁 얘기는 그래서, 전쟁에 필요한 얘기만은 아니게 된다. 우리 삶도 결국은 어떤 대상과의 투쟁의 연속이고, 자기 자신과의 싸움의 지속이고 방해물과 고난과의 겨룸의 연장일 테니 말이다. 쌍령은 정축년 쌍령에만 있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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