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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가끔은 그의 깜짝쇼가 그리울 것 같다

  • 입력 2015.11.23 17:28
  • 기자명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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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월22일 이른 아침, 방학이지만 나는 학교 강의실에 나와 있었다. 날씨는 추웠고 그 전날 눈도 내려 세상은 하얗게 덮여 있었다. 이윽고 한 선배가 들어와 칠판에 큼직하게 썼다. ‘수원 성균관대.’ 순간 당황했다. 성균관대 수원 캠퍼스가 대체 어디에 붙은 거더라. 1호선 종점인 수원역 다음다음 역인가로 가늠될 뿐인, 머나먼 그곳으로 나는 가야 했다.
그날은 ‘해방공간 전평 이후 최초’의 전국 노동자 조직, 전노협이 결성되는 날이었던 것이다. 기나긴 전철 여행 끝에 수원 성균관대의 뒷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우리 일행은 살기등등한 경찰과 조우했다. 원천봉쇄했던 서울대학교가 아니라 수원 성균관대에서 결성식이 이뤄진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경찰들이 학교 안으로 밀물처럼 들어왔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일시에 흩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지 말걸!”이라고 투덜거리며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 숨을 죽이던 나 역시 그중의 하나였다. 한참 뒤 건물 밖으로 나왔더니 학교는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 있었고 전노협 결성식은 어찌어찌 치러졌다고 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허탈한 발걸음으로 지하철역을 되짚는데 선배 하나가 어깨를 쳤다.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몇 마디 나누는데 선배가 이상한 소리를 해 왔다.

와이에스(YS, 김영삼의 약칭), 개××.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되물었다. “갑자기 김영삼은 왜요?” 전노협 결성이라는 역사적(?) 순간을 함께하기 위해 백리 길 왔다가 홍역을 치른 건 피차일반인데, 왜 난데없이 제2야당 총재에 대한 욕설이란 말인가. 그러자 선배는 아직 모르느냐는 어투로 황망한 뉴스를 전했다.

오늘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이 3당 합당을 했어.

그날 저녁 뉴스를 보면서 나는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한때 노태우 대통령에게 군사독재자라고 맹공을 퍼붓던 김영삼 총재가 대통령의 오른편에 부동자세로 서 있는 게 아닌가. ‘전통적 야당 도시’ 부산의 상징이었고 수십년 군사정권과 맞서 싸워온 민주화 운동 진영의 주축이었던 그가 하루아침에 이렇게 변신하다니.


또 하나 놀라웠던 것은 그때까지 그렇게도 선명하게 여당에 맞섰던 통일민주당 국회의원들이 그야말로 일사불란하게 당 총재의 결정을 추인하며 스스로의 소속을 야당에서 집권 여당으로 바꾸는 데 동의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노무현이라는 초선 의원이 이의 있다고 팔을 쳐들었다가 끌려 나갔지만. 더 놀라웠던 것 하나는 “부산이 들고일어나면 정권이 바뀐다”는 자부심이 롯데 자이언츠에 대한 팬심 이상으로 드높던 ‘야도’(野都) 부산이 하루아침에 ‘여도’(與都)로 바뀌었던 현상이었다.



3당 합당에 반대한 노무현과 김정길 등은 1992년 총선에서 거대 여당 ‘민자당’에 무릎을 꿇었다. 이때 부산 동구에서 출마했던 노무현 후보의 토로는 김영삼의 변신을 실감나게 전하고 있다.

1988년 4월의 13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허삼수씨를 상대로 출마한 나를 지원하기 위해 내려온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총재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허삼수 후보는 반란의 총잡이입니다. 총잡이는 국회로 보낼 것이 아니라 감옥으로 보내야 합니다.’ 그로부터 꼭 4년이 지난 1992년의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총재는 유권자들 앞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허삼수씨는 충직한 군인입니다. 허삼수씨를 뽑아 주시면 제가 중히 쓰겠습니다. 저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도 허삼수씨를 국회의원으로 뽑아 주십시오.'

손오공도 이런 분신술을 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도 이런 전환을 꿈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영삼의 깜짝쇼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6월 항쟁 이후 대한민국 전체에 드리워져 있던 군사문화의 카키색은 차츰 엷어져 갔지만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은 남아 있었다. 6월 항쟁의 뒤끝에 치러진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조차 박희도 육군 참모총장은 대놓고 김대중 대통령 후보에 반대한다는 발언을 했고, 어느 장성은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다면 수류탄을 들고 뛰어들겠노라는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노태우 정권 내내 군부가 어떻게 움직일 것이라는 “모월 위기설”은 뻔질나게 등장하곤 했다.
1991~1992년 화제를 모았던 고원정 작가의 소설 <최후의 계엄령>은 그 불안감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전·현직 대통령과 정치인들이 실명으로 등장하는 이 소설 속에서, 특정 대통령 후보를 반대하는 군인들의 친위 쿠데타에 직면했을 때, 1980년 광주 진압군의 일원으로서 시위 대학생을 사살했던 이력을 가진 국회의원 오일무는 이렇게 연설한다.

12년 전 광주에서 제가 저질렀던 일을 용서받는 길은 바로 오늘, 바로 여기 여의도광장에서 그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일입니다. (중략) 군인 여러분은 12년 전 제가 저질렀던 것과 같은 범죄를 다시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저는 감히 여러분에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오늘, 여기 여의도광장에서 총소리가 울려 퍼질 때, 제가 맨 앞에서 그 총알을 맞겠습니다.

1992년 12월에 치러진 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군인 출신 아닌 민간인 출신의 대통령 당선자가 무난히 등장할 분위기였지만 고원정 작가 자신이 “이 책이 이처럼 팔리고 있는 배후에는 정치에 대한 불안감,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을 것”이라고 토로한 것처럼, 1990년대 초반만 해도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은 현실이었고 쿠데타라는 으스스한 단어도 생소하지만은 않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개표 결과, 민간인 김영삼은 무사히 대통령직에 안착했다. 그런데 취임사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 취임 보름도 안 됐던 김영삼 대통령은 또 한 번의 깜짝쇼를 펼친다. 3월4일 육군사관학교(육사) 졸업식에서의 연설은 일종의 예고편이었다.

임무에 충실한 군인이 조국으로부터 받는 찬사는 그 어떤 훈장보다도 값진 것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길을 걸어온 대다수 군인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영예가 상처를 입었던 불행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잘못된 것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 닷새 후 3월9일, 대통령은 임기가 아직 한참 남아 있던 육군 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해임해 버렸다. 육군 참모총장은 육사 17기 김진영 대장이었다.


백면서생이었던 나에게도 ‘육사 17기’의 이름은 익숙했다. 전두환 정권 탄생의 공신들이라 할 허삼수(앞서 김영삼 대통령이 감옥에 보내자고 했다가 여당 변신 뒤엔 충직한 군인이라고 말을 바꿨던), 허화평 등이 17기였고 6공화국 내내 ‘극우의 아이콘’으로 살아온 김용갑, 얼마 전에 돌아가 국립묘지 안장 논란이 일었던 전 경호실장 안현태 등등이 모두 17기였다. ‘친위쿠데타 설’이 등장할 때마다 ‘육사 17기’는 단골로 들먹여지던 기수였고, 김진영 참모총장은 그 선두 주자였다. 1979년 12·12 군사반란 때 직속상관인 수도경비사령관의 명령을 거역하고 전두환 소장을 따랐던 33경비단장이 바로 그였던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의 직속 인맥이자 노태우 정권의 마지막 육군 참모총장으로서 문민정부에 걸쳐 있던 군부의 대못을 김영삼 대통령은 단칼에 뽑아 버린 것이다. 다음날 비서관 회의에서 “놀랬재?” 하고 웃었다지만 놀란 것이 어디 비서관들뿐이었을까. 일단 정권의 의지가 드러나자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헌병대 대령이 군인아파트에 ‘하나회’ 명단을 살포하면서 군내 사조직 하나회의 속살이 백일하에 드러났고, 숙청의 칼은 더욱 매서워졌다. 그 이후 두 달 동안 땅에 떨어진 별들의 수는 42개에 달했다.
당시 학교 예비군 훈련장에 모여든 예비역들 사이에서 나온 얘기는 지금도 귀에 선하다. “이건 천지개벽이다. 김영삼 저 아저씨 미쳤다.” “와이에스 다시 봤다, 대단해.” 그리고 공군 출신들의 환호도 있었다. 이양호 공군 참모총장이 건국 이후 최초로 비육군 출신 합참의장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하나회라는 군부 내 사조직은 어떤 곳이었는가. 하나회는 ‘정규 육사 1기’라 자임했던 11기부터 무려 36기까지 뻗어 있었다.(현재 육군 참모총장이 31기이다.) 그러나 4반세기 동안 우리나라 군대를 좌지우지해온 하나회의 ‘적폐’는 그해의 짧은 봄 안에 끝장이 났고, 한국 사람들의 뇌리에서 군부 쿠데타 같은 단어는 삽시간에 남의 나라 얘기로 전락해 갔다.
김영삼 대통령은 그 후로도 여러번 사람들 심장을 들었다 놨다 했다. 북한이 끈질기게 송환을 요구해 온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를 선뜻 송환하는가 하면 금융실명제 같은 메가톤급 충격을 하루아침에 발표해 버리는 등 그의 깜짝쇼는 임기 내내 이어졌다. 또 한 번 온 국민이 그로부터 “놀랬재?” 소리를 들을 일이 벌어진 것이 1995년이었다.
이해에 나는 학생을 면하고 직장인이 됐다. 그런데 신입생 때부터 직장 초년생 때까지 대학가와 거리에서 울려 퍼지던 구호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두 이름이 있었다. 바로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었다. 시민들은 5·18 광주항쟁 진압의 책임을 물어 두 전직 대통령을 고소고발했지만 검찰의 대답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이었다. 김영삼 대통령 자신의 입장도 “책임자 처벌은 역사에 맡기자”는 쪽이었다.
그러나 금융실명제 실시로 인해 꼬리가 밟힌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이 드러나면서 분위기는 일변한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무려 4000억원의 ‘통치자금’을 보유하고 있다고 고백했는데 당시 입사 동기는 이렇게 설명했다.

단군왕검 때부터 지금까지 연봉 1억씩 받고 한 푼도 안 써야 모을 돈이고 우리 연봉으로는 빙하기 때부터 모아야 될 돈이야.

바야흐로 수면에 부상한 “단군 이래 최대 도둑”들에 대한 분노가 끓어오르던 1995년 11월24일 김영삼 대통령은 또 깜짝쇼를 연출한다. 여당 사무총장을 불러 “쿠데타를 일으켜 국민들에게 수많은 고통과 슬픔을 안겨준 당사자들을 처리하기 위해 5·18 특별법을 제정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뉴스에서 이 소식을 접하며 나는 1990년 1월22일과 1993년 3월9일에 취했던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가장 정신없게 된 사람들은 검찰이었을 것이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이 불과 넉 달 전 아니었던가. 검찰은 역시 기민하게 움직였다. 즉시 재수사에 돌입했고 11월30일에는 드디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소환장을 던졌다. 이에 대한 전 전 대통령 쪽의 반응은 오만하기 짝이 없는 골목 성명과 귀향이었다. 검찰은 수사팀을 전 전 대통령의 고향 경남 합천까지 급파하고서야 ‘피의자’를 연행해 올 수 있었다.
그 며칠을 나는 선명히 떠올릴 수 있다. 왕년의 부하들을 병풍처럼 세워 두고서 “내가 내란의 수괴라면 내란 세력과 야합한 김 대통령도 응분의 책임을 지는 게 순리”라고 으르렁대던 옛 독재자의 표정부터 고향 합천으로 향하는 차를 입체적으로 뒤따르던 취재진, 그리고 마침내 검찰의 팔짱을 끼고 끌려나오던 그 굳은 얼굴과 어떻게든 호송 차량을 가까이에서 찍으려고 오토바이까지 타고 접근하다가 땅에 나뒹굴었던 모 방송사 기자의 사연까지.
1980년 이후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눈물을 뽑고 때로는 생명까지도 빼앗았으며 죽음을 무릅쓴 저항을 하게 만들었던 독재자, 몇 년 전 풍비박산 났던 하나회의 원조가 바야흐로 죗값을 치르기 시작한 순간이 아니었던가, 전두환의 집 근처에서 모여든 시위대가 부르는 노래의 몇 소절에 그만 콧날이 시큰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왜 쏘았지 총 왜 찔렀지 칼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악에 받쳐 처단하라고 외쳤던 사람이 기어코 ‘법’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이제 한 나라의 대통령이 깜짝쇼를 펼치며 국민들을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던 시대는 ‘쿠데타’라는 단어만큼이나 우리로부터 멀어졌는지도 모른다. 요즘 세상에는 적절한 절차와 논리적 설명 없이 한 사람의 의지로 세상을 바꾸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오늘 그 깜짝쇼들이 새삼 살갑게 다가서는 이유는, 그런 방식으로라도 내 안의 갑갑함을 풀고 싶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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