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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한 순간도 민족지였던 적이 없다

  • 입력 2015.11.10 17:13
  • 수정 2015.11.10 17:32
  • 기자명 북클라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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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는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을 자신들이 항일 민족지였다는 주장의 근거로 내세운다. 1936년 8월10일 독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를 지워서 게재한 곳은 몽양 여운형 선생이 사장으로 있었던 조선중앙일보였다. 그러나 그때는 인쇄 품질이 좋지 않아 총독부가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며칠 뒤 동아일보에도 일장기가 지워진 사진이 게재된다. 이길용 기자가 경영진 몰래 편집해서 올린 사진이었다.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송진우는 이길용 기자를 불러다 “성냥개비로 고루거각을 태워버렸다”고 호통을 쳤다. 이사장인 김성수의 전기에는 “몰지각한 소행이라고 노여움과 개탄을 금할 수 없었다”는 대목이 있다. 박지동 전 광주대 신문방송학과 교수가 쓴 ‘한국언론실증사’에 따르면 “송진우와 김성수는 손이 발이 되도록 일제 당국에 빌면서 조선민족 탄압과 대륙 침략의 선전도구로서 분골쇄신하는 앞잡이 중의 앞잡이 노릇을 자임했다”고 한다.
일장기 말소가 이길용 기자 개인의 돌출 행동이었느냐 동아일보 차원의 결정이었느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정운현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은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에는 “일장기 말소 사건을 동아일보의 항일운동의 일환으로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이 사건 이후 김성수가 한 것은 이에 관련된 10여 명의 기자들을 해고시킨 일이었다”고 적고 있다. 일부 기자들의 정서와 경영진의 판단이 전혀 달랐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김성수의 전기에는 위에 언급된 대목에 이어 이런 이야기가 있다. “히노마루(일장기)의 말소는 잠자려는 민족의식을 흔들어 놓은 경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다소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에 대한 탄압은 민족 대표지로서 쾌히 짊어져야 할 십자가로 생각되기도 했다.” 이 책이 1976년에 동아일보에서 출간됐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상당 부분 윤색이 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일장기 말소 사건의 실체는 동아일보의 행적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김성수는 1943년 총독부 관보였던 매일신보에 쓴 글에서 “새로운 여명을 맞이해 인류 역사에 위대한 사업을 건설하려는 대동아 성전에 대한 제군 및 우리 반도 동포가 갖고 있는 의무”라며 “제군이 생을 받은 이 반도를 위해 희생됨으로써 이 반도는 황국으로서의 자격을 완수하게 되는 것이니 반도의 미래는 오직 제군의 거취에 달려있다”며 젊은이들에게 전쟁 참여를 독려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일본 경찰이 배포한 정보 자료를 인용해 백범 김구 선생을 테러 분자로 묘사했다. 독립군의 항일 투쟁은 거의 보도되지 않거나 경찰서 습격 사건 등이 발생하면 “비적들이 용맹한 황군의 토벌에 의해 궤멸됐다”고 보도하는 정도였다. ‘한국언론실증사’에서는 “이런 보도는 역설적으로 ‘우리 독립투사들이 싸우고 있구나’ 하는 실날 같은 희망으로 민족 동포의 가슴을 희망으로 뛰게 했을지도 모른다”고 평가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1937년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을 ‘아군’이나 ‘황군’으로 불렀다. 그해 12월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1면 머리기사로 ‘아군의 승승장구’를 대서특필했다. 친일신문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일제 기관지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정운현 전 국장은 한겨레 인터뷰에서 “조선일보가 해방과 함께 복간호를 내지 못하고 미국 군정이 들어선 뒤에야 복간할 수 있었던 것도 당시 민중이 이들의 죄악을 낱낱이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조선일보의 자매지 조광은 1940년 3월호에서 “민세 일계의 황통을 이으옵신 세계 무비의 깨끗하옵신 역사를 가진 우리 일본 황실의 번영이 이처럼 날로 점앙하는 것은 위로 성명하옵신 천황 폐하를 모시옵고 아래로 국민이 일치단결 국운의 번영을 꾀한 때문일 것”이라고 노골적인 충성을 표시했다. 그해 1월1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나란히 용 그림과 함께 일왕 부부의 사진을 1면에 내걸었다.
친일 소설가 이광수는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낙후된 민족으로서 조선 민족의 낡은 관습과 생각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이른바 민족 개조론을 주창하기도 했다. ‘일제하 민족언론사론’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신문 제호를 가려 놓으면 이미 그 논조에서는 어느 것이 민족지고 어느 것이 총독부 기관지인지 구별할 수조차 없게 됐고 2000만 신민의 애국충정을 호소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호 경쟁적이라는 것이 특색이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친일 행각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놀라운 건 해방 이후 이들의 생존 방식이다.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 논란이 거셌던 1945년 12월, 동아일보는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한다”는 왜곡 보도를 내보낸다. 실제로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를 주장한 쪽은 미국이고 소련은 시기가 짧을수록 좋다는 의견을 냈다. 동아일보의 보도는 명백한 오보였지만 그 여파는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유일상 건국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한겨레 기고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동아일보의 보도 이후 신탁통치에 찬성한 세력은 좌익으로 몰리고 친일파와 미국을 상전으로 모시는 외세의존 세력들이 오히려 지배계층을 재구성했다. 다수 국민들의 반식민지·반외세 감정을 포착해 ‘신탁통치는 또 다른 식민통치’라는 선전구호 아래 국내의 자주·민주세력을 매도하고 고문 기술자를 포함한 친일파를 다시 등장하게 만들었다.”
동아일보의 오보가 나간 뒤 남한 사회는 벌집을 쑤셔놓은 듯 들썩였다. 조선일보는 “죽음으로 신탁통치에 항거하자”는 제목으로 호외를 발행하기도 했다. ‘한국언론실증사’에 따르면 “그때까지 친일파는 매국노요 민족 반역자였는데 반탁운동을 ‘세탁’의 계기로 삼아 애국자로 둔갑했다.” 강만길 전 고려대 사학과 교수는 “신문들의 오보와 선동이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이끌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위력이 컸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좌익 세력들은 동아일보 보도 이후 반탁운동에 참여했다가 나중에 찬탁으로 입장을 바꿨는데 미국과 소련의 군사정부가 남북을 분할 통치하고 있는 현실에서 임시 민주정부를 설립하고 과도기적인 신탁통치를 받아들이는 게 통일 독립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과서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처음에는 반탁을 했다가 소련의 사주를 받아 찬탁으로 돌아섰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은 ‘사료로 본 20세기 한국사’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익 친일세력들은 신탁통치 갈등을 이용해 전체적인 정치구도를 ‘찬탁=극좌·친소’라는 틀 속으로 몰아넣으며 자기들의 세력을 확대해 나갔으며, 어느덧 반탁은 애국이며 즉시 독립의 길이요, 찬탁은 매국이며 식민지화라는 등식이 성립돼 갔다.” 소련이 타스 통신을 통해 해명을 하고 진실공방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이런 사실은 국내에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한국언론실증사’는 청산하지 못한 친일 역사의 핵심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있다는 사실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비판하고 있다.

미국의 침략세력과 친일역적으로 몰리던 한국민주당 및 경찰 계통 사람들은 소련과 그 지지세력을 반역으로 몰아감으로써 자신들이 국민의 지지를 회복하면서 상대방을 진짜 악마 빨갱이로 매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됐기 때문에 신문 보도를 통한 반공음모는 한층 의도적으로 무르익어갔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친일·반민족 행위는 그들의 지면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민족 자주의식을 말살하고 분열을 조장하는 데 앞장섰던 이 신문들은 해방 이후에 이념 갈등을 부추겨 남북 분단을 유도한다. 일제의 앞잡이들이 해방 이후 미군의 앞잡이가 됐던 것처럼 이 신문들은 빨갱이를 적으로 내몰면서 일제 시절에 쌓은 권력 기반을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민족지를 참칭하는 것은 참으로 후안무치한 일이다.
1974년 동아일보에서 노동조합이 설립되자 동아일보는 노조 임원 11명을 포함한 13명을 전원 해고한다. 그해 10월24일 그나마 깨어있는 기자들이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발표한다. 정부가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넣어 광고를 주지 못하도록 압박하자 98%의 상업광고가 떨어져 나갔다. 그 유명한 백지광고 사태다. 이듬해 3월 동아일보는 113명의 기자들을 해고시켜 정권의 탄압에 굴복한다. 그게 동아일보의 실체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반공을 명분으로 친일파 공화국의 탄생에 주도적으로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5·16 군사 쿠데타를 적극 지지했으며 유신독재를 노골적으로 찬양했다. 정권의 폭압에 눈 감고 인권유린을 외면하고 역사를 왜곡했다. 5·18 광주민주화 운동을 폭도들의 반란으로 매도했고 전두환 정권이 내려 보낸 보도지침을 충실하게 따랐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한 순간도 민족지였던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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