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한국 청년들을 위한 정글의 법칙

  • 입력 2015.11.06 15:21
  • 수정 2015.11.06 15:41
  • 기자명 고함2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1세기의 한국 사회의 청년 세대를 지칭하는 담론들은 넘쳐납니다. 이러한 담론들은 대부분은 예전 청년 세대들을 기성 권력 제도를 비판하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주체성의 ‘상징’으로 묘사합니다. 반면 현재 청년 세대들은 불확실한 미래와 가혹한 경쟁에 내몰려 더 이상 과거의 청춘을 누리지 못하는 세대로 규정합니다.
논문 <서바이벌, 생존주의, 그리고 청년세대: 마음의 사회학의 관점에서>(김홍중)에서는 현대의 한국 청년 세대들을 ‘생존주의 세대’로 명명합니다. 이들의 가장 중요한 모토는 ‘생존(survival)’입니다. 이번 청년연구소에서는 논문의 내용을 바탕으로 청년들이 처한 치열한 생존 생태계를 분석해봅니다.


생존의 생태계, 다섯 가지 법칙

1. 일상이 곧 서바이벌이다.


생존은 원래 ‘시장’과 스포츠 영역에 주로 국한된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단어는 사회의 다른 영역에 침투하기 시작했고 우리의 행위를 이끄는 원리로서 기능하기 시작합니다. 가족이든 학교든 기업이든, 아니 어디든 예외일 수 없습니다. 자기계발서는 히트를 쳤고, TV에서 방영되는 각종 리얼리티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은 압도적인 인기를 끌었죠. 이는 경쟁을 깊이 내면화한 우리의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생존 개념은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의 경쟁 상황에서 도태되거나 낙오되지 않는 것입니다. 음악이나 요리가 언제부터 치열한 경연의 주제가 되었나요? 사실 방송 속의 그들의 모습은 내일 당장 해고되지 않기 위해 출근하는 우리네 모습과 크게 달라보이진 않거든요.

2. 경쟁이 끝나기를 바라지 마라.


대학가면 온 세상이 내 것이 될 줄 알았죠? 취직하면 다인 줄 알았죠? 대학입시나 취직은 그저 더 높은 경쟁 세계로 올라가기 위한 하나의 단계에 불과합니다. 경쟁을 거쳐 ‘살아남았다’고 생각할 때 또 다른 고차원의 경쟁 세계가 열립니다. 우리는 경쟁의 불안과 긴장에서 한순간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현대의 노동 체계는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통해 능력을 혁신하고 변화하는 시대에 맞추어 살아남으라고 요구합니다. 우리는 최종적으로 살아남았을 때 비로소 ‘미생’에서 ‘완생’이 된다고 믿지만 사실 그 순간이 언제 올지는 모릅니다. 다만 그 보이지 않는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뿐이죠.

3. 살고 싶으면 스펙을 쌓아라.



청년들은 다양한 스펙으로 스스로의 평가가치를 높이고자 합니다. 생존 여부는 요행이나 운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나의 역량을 ‘자본’으로 어떻게 효율적으로 계발할 것인지가 중요하죠. 우리는 나도 몰랐던 잠재력을 끌어내어 생존을 위한 존재로 변모해갑니다. 생존과 관계없이 오롯이 나를 규정짓는다고 생각했던 나의 희망, 상상력, 소중한 경험들은 어느새 자기소개서 한 줄을 채우기 위한 ‘자본’들로 환원됩니다. 아니, 이제는 그 스펙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경험을 만들어 갑니다. 봉사활동도 취업을 위한 도구로 해석되는 세상이니까요.

4. '평범하게 사는 것'은 절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이렇게 아등바등 사는 청년들이 물질적인 부귀와 명예를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제 이러한 노력은 사회적인 성공이나 명성의 획득을 위한 야심 찬 도전이 아니라는 것이죠. ‘평범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금수저를 못 따라가’ 자조 섞인 말과 같이 청년들은 이제 순수하게 노력한다고 해서 엄청난 계급 상승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다만 우리는 가정을 이룰 수 있을 정도의 금전적 여유와 사회적인 안정을 위해 분투합니다. 왜냐구요? 사실 이제는 그것도 쉽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죠.

5. 생존과 자아찾기는 같은 의미다.



생존 추구는 사회 체제에 순응하는 것 뿐 아니라 우리의 자아를 실현해가는 그 과정의 하나로 간주됩니다. 새로운 생존 개념은 더 이상 생존을 위해 자아를 포기하거나 자아를 위해 생존을 포기하는, 양자택일의 상황이 아닙니다. 생태계에 순응하는 방식 자체가 자아를 실현하는 과정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죠. 예를 들어, 음악 서바이벌의 참가자들은 정말로 자신이 음악을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그들이 겪은 아픔을 여실히 보여주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휴머니즘(humanism)도 궁극적으로는 생존을 위한 진정성입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정립된 새로운 유형의 진정성이 곧 ‘열정노동’이라는 용어로 설명되고 있지 않나요?

ⓒ 한국경제신문 트위터

이것이 청년만의 탓인가?

생존주의는 이 사회를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틀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이 생존주의 논리에 매몰되어 살아간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누군가는 생존주의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독립적인 삶을 설계합니다. 또 누군가는 생존주의 삶의 독선에 문제제기를 하면서 공동체를 구현하고 대안적인 삶을 모색하기도 합니다. 아니면 생존의 삶에 좌절하여 아예 사회에서 이탈해버리는 사람도 있겠죠.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생존주의 문화가 청년세대에만 국한되어 발견되는 현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이렇게 주체화시킨 것은 앞선 세대가 만든 제도와 장치입니다. 더 넓게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와 가치가 그렇게 흘러간 것이겠죠. 청년들이 나약해서 생존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온 세대에게 확산된 생존주의가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 청년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성 세대에 의해 조직된 세대론은 청년세대들을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무력한 세대로 치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1997년 이후 한국 사회의 구조 변동이 일으킨 다양한 문제 상황들에 대처해야 했던 현실이 있습니다. 높은 청년 실업률과 취업 문제, 등록금과 대출, 주택 자금과 같은 경제적 문제들이 그 예입니다. 언급했듯, 현대의 생존 경쟁은 대단한 성공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청년 세대가 아니라 당장 내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는 현실, 즉 최소한의 삶의 조건도 보장할 수 없는 불투명한 현실(hell)이 아닐까요.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