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하루만에 1,288명이 끌려갔던 건대항쟁, 그날의 함성

  • 입력 2015.10.30 17:35
  • 기자명 김형민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건대항쟁. 1986년 10월 28일.



80년대 대학가는 거의 매일이 전쟁이었지. 우리야 그 끄트머리에 들어온 처지였고 꺼져가는 불꽃을 본 셈이지만. 80년대 중반의 대학가는 사람이 죽어가고 깨지고 죽이겠다고 서로 달려드는 전쟁터였어.
그 중에서도 1986년은 참 잔인한 해였다. 나는 서울대학교 85, 86학번들, 그리고 ‘일반 학우’가 아니었음직한 분들을 만나면 으레 이렇게 인사치레를 해. “아이고 1, 2학년 때 참 힘드셨겠어요.” 나이 차이 얼마 난다고 대학 학번이 중요하겠느냐마는 그래도 왠지 3학년쯤 되면 머리가 굵었을 것 같고 1, 2학년 때의 충격이 더할 거 같아서 말이지.
교정에서 사람이 불덩이가 돼서 떨어져 내리고 방금 전까지 음담패설을 하던 친구가 스스로를 불사르며 이미 목구멍이 타들어가 나오지 않는 구호를 외치는 걸 본 사람들이라면 그 트라우마 평생 가지 않을까. 또 1986년은 건대사태라는 한국 현대사에 굵직한 기록으로 남은 사건의 해이기도 해. 내가 “저런 게 공성전이구나.” 하고 감탄하며 전말을 지켜본 ‘전투’이기도 했지.
그 해 10월 28일 전투(?)가 시작된다. 당시 학생운동을 양분하던 자민투 세력은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 줄여서 애학투련을 결성해. 1986년은 각 학교마다 정파 간의 대립으로 못 볼 꼴 많이 볼 때였는데 우리 학교에서도 정파 조직원들끼리 각목을 들고 싸우는 일이 벌어졌다지.
대학 사회에 던진 충격파는 자민투 쪽이 더 컸던 걸로 기억한다. 86년 5월 신림동 녹두거리에서 분신했던 김세진, 이재호 학생이 외친 구호는 “미제의 용병 교육 결사 반대”였는데 일반에는 생경하기 이를 데 없는 구호였지. 이른바 ‘미제’와 그 ‘식민지’ 한국, 그리고 ‘용병’으로서의 한국군 공식을 공개적으로 들고 나온 충격은 꽤 심대했지.
내가 무척이나 싫어하는 주사파 세력의 본격적인 대두도 이 무렵이지. 하지만 나는 이때의 주사파는 긍정적으로 봐. 적들을 때려잡기 위해 훈련된 특수부대를 시민들 앞에 풀어놓았던 인간 백정 전두환과 싸우면서 그 반대편을 바라봤던 건 충분히 이해가 가니까.
1986년 아시안 게임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전두환 정권은 기세등등했어. 전두환 측근들의 친위 쿠데타설까지 돌고 있는 상황이었지. 자민투 세력은 이에 대응해야 한다고 봤고 ‘애학투련’ 결성은 그 일환이었다. 하지만 이 애학투련의 결성을 기다린 건 자민투 세력만이 아니었어.




원래는 연세대가 집회 장소였는데 건국대로 장소가 바뀌었어. 원천봉쇄가 일상이던 시절 이상하게도 경찰은 학생들의 건대 진입을 막지 않았어. 10월 28일 오전 7시부터 녹색 제복의 ‘안드로메다 군단’들이 배치돼 있었지만 학생증 검사도 하지 않았어. 건국대학교는 거대한 그물이 되고 있었지. 물고기들을 들여서 한 번에 쑤욱 들어올려 만선을 노래할. 이윽고 오후 1시 물고기들의 합창이 시작됐다.


하나,
미제의 식민지 통치를 분쇄하고 그 앞잡이 전두환 군부독재를 타도하여 민족자주와 민중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한다.

둘,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침략을 분쇄하고 민족의 자립화를 이룩한다.

셋,
전두환 일당의 독재정치를 타파하고 사회의 민주화를 이룩한다.

넷,
한반도의 분단구조를 철폐하고 한민족의 염원인 조국통일을 실현한다.


학생들은 어떤 부류는 감격에 겨워, 일부는 집회 끝나고 술 먹기를 기다리며 선언문을 듣고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지. 그러던 3시 20분 갑자기 경찰이 학내에 진입한다.




맞아 싸울 새도 없이 경찰은 드넓은 캠퍼스 전부를 장악했고 학생들은 갈팡질팡하다가 사회과학관, 도서관, 학생회관 등으로 쫓겨 들어갔지. 경찰은 득의양양의 미소를 지어. 준비 없는 농성만큼 처리하기 쉬운 건 없으니까. 돗자리 깔고 앉아서 지그시 기다리기만 하면 항복을 하든 사생결단을 내든 금세 반응이 오게 마련이니까.
딱 이맘때잖아. 낮에는 대충 따뜻해도 밤이면 한기가 살을 파고들었고 학생들 옷이래야 얇은 잠바떼기가 다였겠지. 먹을 것도 당연히 없었고.
당국은 이 엉겁결에 시작된 학생들의 농성을 두고 지금도 기억에 선명한 대단한 이름을 붙인다. ‘공산혁명분자 건국대 점거 농성 사건’. 그 가운데에는 멋모르고 선배 손에 이끌려 온 1학년들도 많았었는데 입학한 지 6개월 된 그들도 졸지에 ‘공산혁명분자’가 된 어처구니없는 순간. 하지만 이 ‘공산혁명분자’들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지켜야 할 건 지키는’ 박카스 청년들이었어.
음식물을 확보하기 위해 매점을 털긴 했지만 돈을 있는 대로 걷어 딱 그 금액만큼만 가져다 먹고 초코파이 하나로 몇 명이 한 입씩 베어 먹는 상황에서도 자기 몫을 포기하고 남을 더 먹이려는 학생들이 많았고 더 부족한 건물을 위해 줄을 매달아 바구니에 담아 전했지. 농성이 끝난 후 일부 건대생들은 부서진 자판기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더구나. 자판기에는 동전 무더기와 함께 이런 메모가 놓여 있었대.


“죄송합니다 가진 게 이것뿐입니다. (나중에) 꼭 갚겠습니다.”


그들이 건국대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었던 10월 30일 당국은 또 하나의 희대의 사기극을 발표한다. 북한이 금강산 댐을 건설하여 서울을 수몰시킬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거야. 63빌딩이 반이나 잠기고 국회의사당도 그 원형 지붕만 남기고 물 속으로 사라진 미니어처는 사람들의 시각을 자극했고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를 포함한 각급 학교에서는 관제 데모가 벌어졌으며 북한에 대한 경각심은 하늘을 찔렀지. 건국대학교에서 농성하던 ‘공산혁명분자’들을 강경 진압할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었어.
10월 31일 마침내 '황소30작전'이 개시된다. 경찰이 투신에 대비한 매트리스를 깔기 시작하자 학생들은 진압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최후의 저항을 시작해. 한 학생이 매트리스 위로 화염병을 던졌고 거기서 검은 연기가 치솟았지. 그 검은 연기를 뚫고 중세 공성전 같은 경찰과 학생의 공방전이 시작됐어. 고가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전경들에게 학생들은 돌을 던졌고 하늘에서는 소방 헬기가 물을 있는 대로 뿌려 댔어. 옥상에 종아리까지 물이 찰 정도였다니 알만하지.




학생들은 건물에 쫓겨 들어갈 때부터 일본 동경대 야스다 강당 사태를 떠올렸다고 해. 1969년 강당을 점거 농성하던 일본 대학생들과 공권력의 충돌 사태 말이지. 그래서일까. 그 마지막 진압 과정에서 한 학생은 건대 벽에 일본 야스다 강당 벽의 낙서를 다시 적어 놓는다.


“연대를 구해 고립을 두려워 않고 힘 미치지 못해 쓰러지는 것을 개의치 않지만 힘 다하지 않고 꺾이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도 분명 오류는 있었어. ‘반공이데올로기 분쇄’는 반공의 이름으로 모든 자유를 압살하던 독재정권에게 항거하는 의미는 있었겠지만 너무 나갔고 그들만의 말의 성찬에 가까웠지. 안기부의 조작인지는 몰라도 그들의 문건 중에 등장했던 ‘낙동강 전선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돌아간 전사들’ 운운의 표현은 심해도 많이 심했지. 그 기사를 보면서 저 학생들이 진짜 빨갱이 아닌가 고개를 갸웃했던 기억 선명하다. 그런데 ‘진달래꽃 머리에 꽂고’ 하는 표현을 쓴 걸 두고 진달래꽃이 북한의 국화라고 우기던 당국의 모습에 이내 그 의심을 거두었던 기억도 나고. 그때 은근 반골이었던 국어 선생님이 그랬거든. “여러분, 김소월은 빨갱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와아 웃었고.
글자 그대로 파쇼 정부였던 전두환 깡패 정부 하에서 학생들은 정말로 치열하게 싸웠고 건대항쟁은 그 봉우리 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 그들은 일망타진됐고 1,288명이라는 건국 이래 최대의 구속자를 낳았지만 그 일망타진 후에는 새로운 싹이 돋았고 반성의 손모음이 있었고 결국은 87년 6월 항쟁이라는, 지금까지도 우리 역사의 동력이 되고 있는 (그러나 이제는 벽이 된 느낌도 있는) 역사의 단초가 되니까 말이야.



건대항쟁 당시 부상자를 옮기는 학생들.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무더기로 끌려와 구속된 뒤 교도소까지 갔던 여학생들은 필로폰 투약 혐의로 수의를 입고 있던 한 여배우를 만나게 돼. <여자가 밤을 두려워하랴>, <애마부인> 등 유명한 에로 영화에 많이 출연했던 여배우였지. 감옥에 들어와서도 교도관들과 싸움을 벌이고 밥그릇을 차 버리고 독재 타도를 부르짖는 여학생들을 보면서 그녀는 많이 부끄러웠대. 그녀가 재벌가 파티에서 술 먹고 있는 동안, 어떤 이들은 자신이 몰랐던 세상의 그늘에서 자신을 던지며 싸우고 있는 걸 보았으니까. 그리고 원래 당찬 구석이 있었던 제주도 출신 여배우는 또 다른 의미의 당찬 여자가 된다. 누군지 짐작하겠지? 바로 아파트 난방비 비리를 폭로한 김부선 씨야.




그냥저냥 하루 이틀 살아가는 세월이긴 하지만 그 세월이 쌓이면 결국 역사가 되고, 너든 나든 팔랑이는 나비보다 못한 존재들일 수는 있어도 그 나비의 팔랑임이 태풍으로 바뀌어 세상을 깎고 물줄기를 변화시키기도 하는 게 역사겠지. 큰 울림을 남기고 간 가수 신해철이 그런 말을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결국 우리가 노래하며 사는 이 세상도 누군가 목숨 바쳐 싸워서 만든 거라구요.”


그래. 우리 세상은 어제가 만든 거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내일을 만들고 있고. 내일의 티끌이나마 내일의 모래나마.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