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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서 사라질 역사] 5. 똥물을 뒤집어 쓴 여공들

  • 입력 2015.10.26 09:53
  • 수정 2015.10.26 09:55
  • 기자명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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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2 21일 새벽, 동일방직 똥물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의 개요 설명은 필자가 존경하는 박준성 선생님의 강의를 빌려 온다.
1972년 전국 섬유노조 동일방직 지부 조합원은 1383명이었다. 그 가운데 1204명이 여성이었다. 그런데도 조합 간부는 회사 말 잘 듣는 기술직 남자들이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부녀부장이던 주길자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민주적인 여성 지부장으로 선출되었다. 일대 사건이었다. 노동조합은 자주적이고 민주적으로 바뀌어 갔다.


여자들에 비해 남자의 못남이 극적으로 대비되는 역사라면 온 인류사를 통틀어 우리 나라가 첫째 아니면 둘째, 때려 죽여도 셋째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저희들이 못나 오랑캐에게 국민을 빼앗긴 주제에 몸 더럽힌 여자와는 살 수 없다고 으르대던 맹추들의 아이러니가 그랬고, 요즘 툭하면 등장하는 XX녀에 대한 광적인 돌팔매질이 그렇다.
동일방직의 남성 노동자들은 그 단군의 자손 가운데서도 특출하게 못난 존재였던 것 같다. 같은 노동자이면서도, 그들은 회사와 아삼육의 콤비를 이루며 눈에 불을 켜고 노조 파괴 공작에 나섰다. 그리고 마침내 밝아온 1978 2 21. 이 날은 노조 대의원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투표를 하러 사무실에 모여들던 여성 노동자들 앞에 버티고 선 것은 회사 측에 매수된 남자조합원들 중 행동대원들이었다. 그들은 가죽 장갑을 끼고 뭔가를 움켜쥐고 있었다. 비위도 좋지, 그건 똥물이었다. 이들은 여성 조합원들에게 달려들어 똥물을 뿌릴 뿐만 아니라 옷을 들추어 그 속에 집어넣거나 강제로 입을 벌려 쏟아붓기도 했다. 부모를 죽인 원수도 아니고, 재산을 통째로 들어먹은 사기꾼도 아닌 직장 동료들에게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큰 모욕이 벌어지는 동안 현장에 있었던 경찰 둘은 구경만 하고 있었다. 하기야 구경도 그런 구경이 있었겠는가. "가난하게 살았지만 똥을 먹고는 살 수 없다."는 울부짖음은 아랑곳없이, 동일방직 노동조합을 박살내겠다는 심사는 그렇게 여지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사진 속의 여공의 표정을 들여다보자
. 여덟 팔자로 다물린 입은 금새라도 흐느낌으로 미어터질 것 같고, 똑바로 앞을 응시하지 않는 눈은 부끄러움과 분노가 범벅이 된 빛을 쏘아 낸다. 부르쥔 주먹이 덜덜 떨리고 있음은 누가 봐도 짐작할 수 있는 일, 저들의 푸른 작업복에 뭉터기로 박힌 저 똥물들은 1978년 대한민국 역사에 들이부어진 오물로서 오늘도 싯누렇게 빛난다. 입에 똥물을 머금고 양치질을 하는 듯한 욕지기로 양심을 건드린다.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동일방직 근처 사진관 주인 이기복씨였다. 이 사진관은 원래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이 '영원한 추억과 우정'을 남기기 위해 즐겨 찾던 단골 가게였다. 상상도 못할 일이 동료 남성 노동자의 손에 자행되고, 그 꼬라지를 경찰은 빙글빙글 웃으며 보고만 있는데다 노동자들의 조직이라는 노총 간부는 되레 똥물 튀기기를 독려하고 있는 판에, 입 안에 똥이 처넣어져 악도 쓰지 못하던 여성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증거로 남기고자 했을 때, 생각나는 사람은 그 사진관의 주인 아저씨 뿐이었다. 울면서 자신을 찾는 여성 노동자들의 부름에 이기복씨는 달려 왔고, 셔터를 눌렀다.
하지만 동일방직 노조 분해는 지역 차원이 아닌 중앙 차원에서 기획되고 있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연출자인 중앙정보부와 그 외 끄나풀들이 냄새 맡기에 서투를 리 없었다. 곧 이기복씨의 사진관은 살기등등한 기관원들의 방문을 받았다. 하지만 이기복씨는 끝까지 필름이 없다고 우겼다. 이 씨는 기관원들에게 "필름은 모두 노조원들이 가져갔다."고 잡아떼며 여성 노동자들의 피눈물로 현상한 사진들을 지켜냈다.

10여명의 여공들이 똥물을 뒤집어쓰고 있었고 노조사무실과 사무장실 천장과 벽에 온통 똥물이 묻어 있었습니다. 또 몇몇의 여공들은 바닥에 누워 울고 있었습니다.

이기복 사장님의 회고다. 얼마나 참담한 광경이었을까.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데모 한 번 나가지 않는 처지의 누구라도 발을 구르며 분노했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 그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에게 그 칼끝이 향했을 때 그 분노를 숨김없이 드러내기란, 작은 행동이나마 발 내딛어 그 분노를 100분의 1이라도 표출해 보기란 정말 힘들다는 걸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안다.
오늘 저 사진을 다시 보매, 동일방직 노동자 뿐 아니라 이기복 씨가 궁금해졌다. 78년이라면 긴급조치가 시퍼렇다 못해 허연 빛으로 세상을 쓸어볼 때였다. 평범한 동네 사진관 아저씨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이 사진을 지켜낸 것일까.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리는 세도의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들이닥쳐서 사진 있는 거 다 아니까 내놓으라고 책상을 두들길 때 그는 무슨 용기로 "사진 없습니다. 다 가져갔습니다." 하고 시치미를 뗄 수 있었을까. 행여나 숨겨뒀던 필름이 발각이라도 됐다면 몇 년쯤은 우습게 감옥에서 썩을지 모르는 상황인데 말이다.
이기복씨도 덜덜 떨었을 것이다. 그냥 의리고 뭐고 확 다 집어치우고 슬며시 사진 뭉치를 내 주며 "나야 뭐 돈 주고 찍으래서 찍은 거 뿐입니다."하고 머리를 긁적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나아가 "쟤들이 진짜 빨갱이들이었다니." 하면서 스스로를 위무하고 망각의 저편으로 양심의 고리를 넘겨 버리고 싶은 유혹에 휩싸였을 가능성도 크다.


그런 사람들은 실제로 많았다
. 하지만 여공들의 추억을 만들어 주고 김치와 치즈를 연발하며 웃음을 끌어내던 평범한 사진관 주인은 그 공포와 유혹을 넘어섰고, 그는 우리 역사에 보기 드문 기록을 후손들에게 전해 주게 되었다. 때론 백 권의 책보다 한 장의 사진이 더 설득력이 큰 법. 그가 없었다면 동일방직 똥물 사건은 건조한 문자와 억울한 육성으로만 남았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반드시 휘황찬란한 업적을 남기고 불세출의 위업을 이룩해야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본때나는 큰 자리에 오르는 인물들이어야만 역사를 만드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기복씨같이 평범한 사람, 장삼이사에 필부필녀의 한 사람 뿐일지라도, 술 먹고 어울리는 친구들일지라도 우리 앞에 닥쳐든 역사에 무심하지 않으면, 그 공포에 저항하지는 못할망정 항복하지는 않으면, 유혹에 빠질망정 정신을 잃지는 않으면, 저 사진처럼 모래처럼 작지만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역사의 알갱이들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나치의 마수에서 유대인들을 구해 낸 오스카 쉰들러는 본디 휴머니즘과는 거리가 매우 멀었고, 비열한 돈 거래에는 도가 텄던 비정하기까지 한 사업가였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위태로움을 무릅써 가며 유태인들을 구했다. 그의 손에 생명을 구했던 한 유태인이 그에게 그 까닭을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는 아무 거리낌없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건 당연하지. 그 사람들은 내가 아는 사람들이었거든.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들한테는 인간적으로 대해 줘야 하는 거라고.

그 대답은 언뜻 싱거워 보였지만 그렇지 않다. 그건 쉰들러가 선택한 마지막 양심의 보루였던 거다. 나치에 저항하고 히틀러 개새끼를 부르짖는 것은 언감생심이고 그 와중에 돈도 벌어야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아는 사람들이 그렇게 참혹하게 죽어가도록 놔 둘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의 성곽이었다. 그는 그 성곽을 지켜낸 것이다. 지성적이지도 않고 특출나게 용감하지도 않은 한 평범하고 무뚝뚝한 독일 남자가 인간의 위대함을 훌륭히 빚어낸 셈이다. 1978 2 21일 이기복씨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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