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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욱, "박근령 친일 발언 덕에 한일관계 좋아졌다"

  • 입력 2015.10.19 10:48
  • 기자명 누블롱 라베리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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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령 친일 발언, 한일 가교역할한 것"
‘석고대죄’ 이후 7개월만이었다. 신동욱(47) 공화당 총재를 서울 모처에서 다시 만났다. 살이 빠져 있었다. 박근령(61) 씨의 친일 발언 논란으로 언론과 정계의 뭇매를 맞은 터였다. 신 총재는 인터뷰 내내 발언의 의의를 설명하려 애썼다. 당 총재와 대통령 동생의 생계는 박지만 EG회장의 도움으로 해결하고 있었다. 지난 추석에는 고기와 와인을 받았다고 했다. 신 총재에게 생존이란 비단 정치적 의미에 국한되지 않는다. 여기에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충성과 극우적 포지션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는 기자에게 메시지를 보내 밤길이 두렵다고 했다. 그는 살아남고 싶어 했다.

- 일본에서 돌아온 후 어떻게 지냈나.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 문제의 인터뷰는 어떻게 이뤄진 건가.
일본 오키나와에 한국인 위령탑이 있다. 위령탑을 제주도 평화공원으로 가져오는 사업 때문에 일본을 종종 방문했다. 그러던 중에 일본의 지인들에게 <니코니코>를 소개받았다. 광복 70주년과 한일 정상회담 50주년을 기념코자 기획된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인터뷰 제의를 받았고 아내는 흔쾌히 수락했다. 출연료 없이 항공권과 숙소만 제공받았다.

- 박근령 씨의 발언에 김경재 청와대 홍보특보와 김용갑 새누리당 상임고문이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는데.


“위안부 문제는 한일협정 때 다 끝난 이야기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을 타박하는 뉴스만 나가서 죄송하다.”
“한일협정은 한국 경제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 총리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한국 정부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비판하는 것은 내정간섭이다.”
- 박근령, 일본 니코니코 인터뷰 中 2015. 08. 04.


대한민국이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을 청와대가 보여주고 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산하 친·인척특별감사반은 대통령 친인척의 비리를 감찰하는 곳이지, 그들의 삶과 인생까지 감시하는 곳은 아니다. 입단속까지 시키면 월권이자 인권유린이다. 박근혜 정권을 독재정권으로 만들 참인가. 또한 나는 공화당의 총재다. 정치인의 입을 막으란 것은 곧 대통령에게 정치탄압을 하라고 종용하는 것 아닌가. 김 상임고문은 도대체 어느 시대의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청와대 홍보특보 역시 할 일이 그렇게 없나. 대통령 여동생의 발언에 홍보특보가 나서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과연 바람직한가.

-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이 발언 이후 소폭 하락했다.
대통령은 여동생의 소신발언이라 여길 것이다. 발언 후 대통령 지지율이 2퍼센트 하락한 것은 사실이다. 언론들은 망언으로 규정하고 ‘박근령 죽이기’를 시작했지만 고작 2퍼센트 떨어졌다. 아내의 발언에 대한 <MBN>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부정적이다’가 79퍼센트, ‘찬성한다’가 7.6퍼센트, ‘잘 모르겠다’는 12퍼센트다. 잘 모르겠다는 의견은 찬성으로 봐야 한다. 그렇다면 반대 80에 찬성 20이란 얘긴데, 사실 이는 여론 몰이를 한 후에 나온 결과가 아닌가. 언론이 내 해명을 동일선상에 놓고 다뤘다면 어땠을까. 여론조사 결과는 확연히 달라졌을 것이다.

- 여전히 국민 대다수는 박근령 씨의 발언을 부정적으로 본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하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 충성의 한 방법이다. 돌팔매질이 무서워서 입을 다물면 안 된다. 최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사위 마약 논란에 대해 상당수의 국민들은 김 대표의 딸도 유전자 검사를 하길 바랐다. 그걸 내가 먼저 얘기했다. 다수의 국민들이 궁금하지만 무서워서 하지 못한 말을 내가 한 것이다. 아내의 발언도 이와 마찬가지다.

- 필요한 발언이었다는 것인가.
아베 총리와 박 대통령은 보수다. 국익을 위해 필연적으로 상충될 수밖에 없다. 이는 한일 양국으로서는 손해다. 이를 타개할 제 3의 변수가 필요하다. 일반인이나 일개 정치인을 통해 가능했을까. 아내는 한일 국교 정상화의 주인공인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다. 현 대통령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 외교라는 것은 결국 주고받는 것이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무릎 꿇고 사죄를 했다(8월12일). 아내의 발언이 없었다면 그게 가능했겠나. 아내의 인터뷰는 일본에서 대서특필됐다. ‘한국의 현인’이라고 하더라. 일본 우익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들의 자존심을 다소 살려준 것 아닌가. 아내의 발언 덕분에 한일간에 물꼬가 트인 셈이다. 그러니까 하토야마 전 총리도 용기를 낸 것 아니겠나. 인터뷰 직후 아내에게 후련하냐고 물어봤다. 자기를 지지해줘서 고맙다고 하더라.

- 계산된 발언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계산된 발언이었다면 반대를 했을 것이다. 난 아내에게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첫 만남에서 지각을 한 아내의 행동을 책망하기도 했다. 이전까지 아내가 꾸짖음을 들어본 적이 있었을까. 육영재단 시절, 재단의 CEO는 아내이고, 재단의 가장 큰 문제는 아내가 바뀌지 않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아내는 자신을 돕지 않고 목에 칼을 들이민다며 노발대발했다. 이사장이 바뀌어야 된다는 말에 서운함을 토로한 것이다. 자문위원이 된 후에도 아내의 기획안을 대부분 반대하곤 했다.




"육영재단에 가면 죽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 육영재단에 어떻게 가게 됐나.
지난 2002년 대선 당시 국민통합21의 자문위원으로 일했다. 청와대 입성을 꿈꾸기도 했지만 정몽준 당시 후보의 노무현 후보 지지철회로 백일몽에 그쳤다. 캠프에서의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은 ‘교수’라는 타이틀이 정치를 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당시 내 학력은 호서대 벤처전문대학원 석사 학위가 전부였다. 지원 끝에 백석문화대학 겸임 교수가 됐다. 한나라당의 고위당직자로 시작을 해야 승산이 있다고 봤다. 마침 한나라당 디지털위원장 선거가 있었다(2005년). 강용석 변호사도 후보로 나왔다. 난 후보 5인 중 4등을 했고 한나라당 전국위원이 됐다. 당 서열 300위였다. 임태희 당시 여의도 연구소 소장을 만나 디지털 자문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차에 육영재단 이사장이었던 아내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내는 내게 재단의 자문위원이 돼줄 것을 제안했고 난 수락했다(2006년).




- 박근령 씨가 신 총재를 지목한 이유가 있나.
아내는 내가 2006년에 쓴 칼럼을 읽고 연락을 한 것이다. 대통령 후보와 전직 대통령을 각각 개에 비유한 칼럼으로 당시 반향이 꽤 있었다. 칼럼에서 난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마르티스에, 박정희 전 대통령은 진돗개에 빗댔다. 칼럼에 촌철살인이 있어 육영재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육영재단은 1974년부터 박근혜 대통령이 이사장을 맡아오다 운영권 다툼 끝에 1990년 11월 박근령 씨가 이사장 자리를 넘겨받는다. 이후 박지만 EG회장과의 운영 다툼이 이어졌다. 성동구청은 2001년 감사를 통해 비리 혐의 등을 이유로 박근령 씨의 이사장 승인을 취소했다. 박근령 씨는 소송 끝에 이사장에 복귀했다. 이후에도 공익법인 설립·운영법 위반으로 벌금이 부과되는 등 육영재단을 둘러싼 소송은 끊이질 않았다.)

- 박근령 씨의 첫인상은 어땠나.
막연히 도도하고 세련된 이미지로 예상했다. 재단에 대한 사진 지식도 전무했다. 약속시간을 한 시간 넘겨 동네 아주머니 같은 사람이 후다닥 들어오더라. ‘저 아줌마 급한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게 첫 인상이었다.

- 어떤 주문이 있었나.
아내는 열심히 일했지만 사건에 휘말렸다고 했다. 재단을 둘러싼 사건·사고가 많았기 때문에 조언을 구한다고 했다. 사정이 절박하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인터넷에 육영재단을 검색해봤다. 얽히고설킨 문제가 복잡해 보였다. ‘여기 가면 죽는다. 정치적으로 죽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 결국 육영재단 자문위원직을 수락했다. 한나라당에서 내쳐진 이유가 박근령 씨와의 관계 때문이라고 보나.
약혼을 했기 때문이다(2007년 2월4일). 임태희 소장이 나와의 관계 때문에 쉽게 내치질 못했다. 내가 위원회에 아내를 초청하겠다고 하니까 발칵 뒤집혔다. 친이계가 장악했단 것을 알지 못했다. 연구원들이 저지했고, 난 위원장 권한으로 밀어붙였다. 결국 위원회는 해산됐고, 한나라당과의 인연은 그렇게 끝났다. 친이계에서 날 골수 친박으로 여겼지만 정작 친박계는 날 인정하지 않았다. 정치적 미아가 된 거다.

- 재단에서는 무슨 일을 했나.
약혼 전인 2007년 감사실장에 발령됐다. 재단은 곳곳이 허술했다. 주된 수입원인 주차장은 관리가 엉망이었다. 처음 한 달은 경비실에서 근무하며 출퇴근 시간과 입주자 등 재단 상황을 파악했다. 주차장 동선을 바꾸고 공짜주차 관행도 뜯어고쳤다. 한번은 이에 불만을 품은 쓰레기 운반 기사가 쓰레기를 쏟아버렸다. 차를 막고는 밟고 지나가던지 쓰레기를 치우던지 선택하라고 했다. 독종이라고 하더라.

- 내부 반발이 적지 않았을 텐데.
심했다. 이권이 개입된 구조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시 재단에 있던 사람들은 능동적이질 못했다. 시간만 때우다 월급만 받아가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지금 육영재단 앞을 지날 때면 차노래를 부르면서 지나간다. 현재 재단은 깨끗하게 정비돼 있지 않나. 갈등은 있었지만 결국 내가 원하던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 박근령 씨와 박지만 회장 간의 운영권 다툼이 심했다.
아내는 퇴임 후 후임으로 동생의 부인을 앉혀야겠다고 말하곤 했다. 서향희 변호사를 후임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고 나 역시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아내는 내가 욕심이 없다고 했다.

- 그런데 왜 운영권 다툼을 벌였나.
아내는 재단에 뼈를 묻고 싶어 했다. 재단은 아내의 삶의 터전이자 부모의 체취가 남아있는 곳이었다. 아내는 이사장실에 딸린 골방에서 잠을 자곤 했다. 밀폐된 공간이라 건강에 해롭다고 여러 번 만류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왜 이렇게 사냐고 물어보니 이곳에 오면 부모님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모의 손때가 묻어있는 곳이라고 하더라. 딸로서 육영재단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 재단 내의 분위기는 어땠나.
일례로 재단 앞에 야산이 있었다. 정리할 것을 지시하면 직원들이 나무 한 그루를 베는 데 한나절이 걸렸다. 전기 톱날을 교체하러 가면 역시 하루가 소요됐다. 보다 못해 몸에 밧줄을 감고 내가 직접 톱질을 했다. 20분 만에 끝나더라. 전기톱 체인을 갈아끼우는 데는 5분이 걸렸다. 당시 재단의 조직문화라는 것이 이러했다.

- 재정 상태는 어땠나.
주차비, 예식장 임대료, 유치원 외에는 수익 모델이 없었다. 임금을 지불하면 매년 적자를 면치 못했다. 기부자도 전무했다. 재단에는 돈이 없었다.

- 육영재단 서편운동장 개발 허가 후 상황이 달라졌다.
이명박 시장 당시 개발 허가가 떨어졌다. 4,500평 대지였다. 하루아침에 금싸라기 땅이 됐다. 곧 엄청난 개발 사업 프로젝트가 밀려들었다. 그렇지만 아내가 이사장으로 재직할 당시에는 개발 결정을 내리지 말 것을 제안했다. 이권과 관련된 오해를 받을 수가 있었다. 개발권은 삼형제가 합의를 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비록 (박근혜 대통령은) 재단을 떠났지만, 부모의 유산 아닌가. 최선은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라고 봤다. 아내도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칭다오, 죽는 줄 알고 따라갔다."

- 사망한 박용철 씨와는 어떻게 만났나.
(박용철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둘째 형인 박무희 씨의 아들들인 박재석 씨와 박재호 씨의 아들로 박근혜 대통령과는 5촌 간이다.)
박용철 씨와는 일면식도 없었다. 2007년 5월경 십여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재단에 몰려왔다. 오전 9시 출근 시간 즈음이었다. 재단에서 날 찾았다. 아내는 ‘용철이 너 무슨 일이냐’고 묻자 나와 할 얘기가 있다고 했다. 사무국장 방에 나와 박용철만 들어갔다. 앉으란 말을 하자마자 주먹이 날아왔다.




- 일방적 폭행이었나.
내가 사기꾼, 제비족이라면서 폭행을 가했다. 맞으면서도 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총무부장의 신고로 경찰이 들이닥쳤지만 회의 중이라고 둘러대곤 돌려보냈다. 보고 있던 박용철은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왜 잡아가라고 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내가 소문과는 다르다면서 저녁에 술을 마시자고 하더라. 오후 6시께 영동대교 인근 음식점에서 만났다. 가보니 골목에 사내들이 도열해 있었다. 짱구라 불리던 박용철의 오른팔 황 모 씨도 동석했다. 분위기는 대체로 화기애애했다.

- 다시 연락이 온 것은 언제인가.
한 달 뒤에(2007년 6월) 이제 식구가 됐으니 큰고모(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를 도와야 하지 않겠냐고 하더라. 큰고모 일로 김무성 의원과 중국 상하이 총영사 등과 함께 중국의 재경부 차관을 만나러 가는데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출국일은 6월 25일이었다. 28일에 귀국하는 당시 인도 세미나 일정과 겹쳐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박용철은 일정을 연기하겠다고 했다. 정치인들이 나 때문에 일정을 미룬다? 재경부 차관이 북경이 아닌 칭다오에 있다? 믿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결국 함께 떠나게 됐다. 중국 비자와 항공권 등은 박용철이 준비했다. 7월 1일 출국일 인천공항에는 박용철과 고등학교 친구 김 모 씨가 전부였다. 박용철은 공항에 함께 온 아내를 피했다. 아내를 따돌리고 화장실에서 만나자고 했다. 화장실에서 여권과 티켓을 받을 때 알았다. ‘죽으러 가는구나.’

- 그런데 왜 따라갔나.
피한다고 피해질 것 같지가 않았다. 나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비행기에 오르자 대화는 정치와는 상관없는 화제로 돌아갔다.


- 주칭다오 한국영사관은 외교통상부에 신 총재가 환각제를 복용해 공안에게 조사를 받았다고 보고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신 총재는 두 차례에 걸쳐 공안의 조사를 받았다. 첫 번째는 박용철 일행과 함께 성매매 혐의로, 이후 창문에서 뛰어내린 후 허벅지에 골절상을 입은 채 공안에 인계됐다.)
탈출하다가 붙들린 것이다. 창문에서 뛰어내린 후 택시를 타고 가다가 외곽에 버려졌다. 택시비로 지갑을 통째로 줬다. 직접적인 위해까지는 아니었지만 굉장히 위험했다. 위험을 감지했다.

- 뛰어내린 방에 함께 있던 사람이 있었나.
훗날 나에 대한 사회적으로 보호막이 쳐졌을 때 말하겠다.

- 박근령 씨의 반응은 어땠나.
(박용철은 귀국 후 경찰에 자진출두, 신 총재와 중국의 한 술집에서 마약을 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신 총재에게서는 마약 성분이 발견되지 않았다)
귀국한 후 아내에게 중국에서의 일을 이야기하니까, 아직 마약에서 깨지 않았냐고 묻더라. 난 칭다오에서 환각제를 복용하지 않았다. 권력은 무서운 것이다.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내가 당했던 일을 말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있다. 1년 동안 납치되는 악몽을 꿨다. 정신과 치료를 받고 싶어도 그랬다간 정말 정신병자로 몰릴 수 있었다. 이를 악물고 버텼다.




“살아남아야 한다”
- 박근혜 대통령의 미니홈피에 비방 글을 올린 이유는 무엇인가.
(신 총재는 박지만 회장을 살인교사 혐의로 고소했으나 증거 부족으로 박 회장은 무혐의 처리됐다. 박 회장은 무고죄로 신 총재를 맞고소했다. 신 총재는 박근혜 대통령의 미니홈피에 40여 차례에 걸쳐 비방 글을 올려 박 대통령으로부터 고소당했다.)
아내가 담배를 문 남자에게 멱살을 잡혀 끌려나오는 사진을 보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 (2007년 11월 박용철은 한센인 백 명과 폭력배들을 동원, 박근령 씨를 육영재단에서 끌어냈다.) 그 사진을 미니홈피에 올렸다. 이 사실을 알고 있냐는 거다. 대통령이 될 사람이 이 사진을 보고도 가만 있으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올리자마자 삭제됐다. 계속 올렸다. 고소장이 접수됐다고 연락이 오고 나서야 ‘드디어 메시지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고소장도 메시지다. 보고는 됐단 얘기다. 나라고 감옥 갈 생각을 안 했겠나. 1심 재판만 26번 받았다.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명예를 훼손했다? 난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 출소 이후 한동안 조용했다.
5년 동안 있어도 없는 사람으로 살겠다고 결심했다. 2013년 2월에 출소했는데, 4월에 <동아일보>에서 기사가 나왔다. 청와대가 내 출소를 불편해한다는 것이다. 숨을 쉬고 있는 것 자체가 불편하다는 것 아닌가.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의 측근을 통해 메시지를 전했다. 신변보호를 조건으로 5년 동안 외국에 보내달라고 했다. 아니면 다시는 한국에 돌아오지 않겠다고도 했다. 정 안되면 이혼을 할 테니 아내의 부채를 탕감해 줄 것도 부탁했다. 끝내 최 이사장을 만나지는 못했다. 최 이사장은 죽기 며칠 전 내게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ㅛ’라고 적혀있었다.

-‘ㅛ’라니, 그게 무슨 뜻인가.
한 정치권 인사는 ‘중요’라는 의미 아니겠냐고 말하긴 하더라.

- 박근령 씨와 결혼했기 때문에 고생한다고 생각하나.
한 정치권 인사에게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알고 싶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그는 내가 행운아라고 하더라. 권력이 칼을 겨누는 건 다 이유가 있다는 얘기였다. 단, 살아남아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감옥에서도 앞으로 가늘고 길게 살자고 결심했다.

- 대통령에게 바라는 건 없나.
대통령은 친·인척특별감사반으로 비리를 감시했고, 결국 친인척 비리가 없는 정권을 만들어냈다. 50점이다. 친인척이 청와대를 자유롭게 방문하고도 없다면 100점 아니겠나. 대통령이 용기를 냈으면 좋겠다. 두 분(박근령, 박지만)은 비리를 저지를 분들이 아니다. 동생들을 믿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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