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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세력에 "사람도 아닌 것들" 호통 친 장군

  • 입력 2015.10.18 14:30
  • 수정 2015.10.18 14:38
  • 기자명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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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4월 제 7대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이 선거의 승리자는 박정희 대통령이었으나, 그는 결코 승리에 환호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별의 별 짓을 다 해 간신히 얻어낸 승리였기 때문이다. 온갖 관권을 다 동원한 것은 늘 해왔던 일이라고 쳐도, 박정희는 김대중을 이기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 했다.

김대중의 일급 참모였던 엄창록을 매수하고, 신라와 백제까지 들고 나오며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전직 국회의장에게 “정권이 호남으로 넘어가는 걸 보고 있을 끼가?" 라고 소리치도록 주문한 것도 모자라 "이것이 제가 여러분께 저를 찍어 달라고 하는 마지막 선거"라며 읍소하기까지 했다. 그러니 소위 반인반신(半人半神)의 대통령이라는 박정희로서는 자존심이 적지 않게 상했을 것이다.


그는 새 임기가 시작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심상찮은 움직임을 보였다. 일단 당시 급변하던 국제 정세는 좋은 핑계가 되었다. 그간 철의 장막 속에 잠자던 중국이 미국과 화해하고 UN에 가입하여, 자유중국(대만)이 국제 무대에서 축출되고 만 상황이 그것이었다. 당시 UN 대사였던 후일의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는 "대만의 축출은 결의안에서 빼자."고 호소했으나 무위에 그쳤고, 그날로 UN 빌딩 앞에서 청천백일기(대만 국기)는 끌어내려졌다. 그리고 한국전쟁을 겪은 한국군들에게는 지긋지긋하게 느껴졌을 중국의 오성홍기가 그 자리에 내걸렸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1971년 12월, 한국 정부는 '비상사태 선언'을 발표한다. 정부 시책은 국가 안보를 최우선으로 하며 국가의 취약점이 될 일체의 사회 불안을 용납하지 않고. 모든 국민은 안보상의 책무 시행에 자진 성실해야 하며, 안보 위주의 가치관을 확립하는 가운데 “최악의 경우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자유의 일부도 유보할 결의를 가져야 한다.”로 마무리되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이는 10개월 뒤 1972년 10월 17일에 선포될 10월 유신의 예고편이었다.
조갑제닷컴에 기록된 1972년 10월 17일 박진환 특별 보좌관의 기록을 보면 당시의 싸늘함이 더 생생하게 전해진다.

아침에 우리 특보들은 부름을 받고 대통령의 집무실 안쪽에 있는 방에 모였습니다. 분위기가 팽팽하고 싸늘하더군요. 박(정희) 대통령은 그때 양복을 입고 있지 않았습니다. 어떤 옷을 입었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상황실에 좌정한 야전 지휘관 같은 옷차림이었습니다. 커피가 나오고 이어서 소책자 한 권씩을 돌립디다. 표지를 넘기니까 「국회해산」 「비상계엄령 선포」란 글이 눈에 홱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저는 뒤통수를 한 방 맞은 것처럼 머리가 핑그르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박진환의 기록에 따르면 그 자리에 모인 이들 중 단 한명도 소책자의 내용에 반대하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스스로 "그 자리에서 누가 반대할 줄 았았는데 아무도 하지 않더군."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보면, 그도 어느 정도의 반발은 예상하고 있었던 듯 하다. 하지만 어쨌든, 반발은 없었다.



보좌관들은 몰랐겠지만, 이미 권력 내부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직후부터 박정희의 장기 집권을 도모하는 계획이 진행 중이었다. 이미 유신이라는 괴물은 착실하게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보좌관들에게 커피와 함께 유신 관련 소책자가 들이밀어지기 24시간 전, 이미 한국 총리 김종필은 미국 대사 하비브에게 유신 선포 계획을 통보하고 있었다.

"10월 16일 18:00시에 김 총리 사무실을 방문했음. 놀랄 만한 소식이 있어 만나자고 했다면서, 계엄령 선포를 통보했음. 김 총리는 조치가 취해지기 전에 미국 측에 통보하는 것이 예의라고 믿어 24시간 전에 통보하는 것이라고 말했음." 그리고 그 앞의 보고서에서 하비브는 유신 선포 일정과 향후 정치 일정, 심지어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 선출까지 보고하고 있다.

(동아일보 2013.6.11 김지하와 그의 시대 중)

미국과 사전 교감까지가 오갔다는 것은 억측이겠으나, 미국은 박정희의 전횡을 막을 생각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미국은 유신 선포의 배경에서 “‘미국과 중공의 접근’ ‘월남 평화 협상’ 등 급변하는 주변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조처”라는 내용을 빼 달라고 주문했을 뿐이었다. 일본도“일본과 중국의 국교 정상화가 유신의 배경이라는 문구를 빼 달라"는 주문을 했다. 결국 유신은 국제정세가 아니라 국내 정세의 결과임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당시 국회는 한창 국정 감사 중이었다. 국회의원들은 국정 감사를 벼르며 자료 준비를 하던 중, 또는 호통과 질책을 한바탕 내지르고 목을 가다듬던 도중에 별안간 유신을 선포하는 박정희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우리 조국의 평화와 통일, 그리고 번영을 희구하는 국민 모두의 절실한 염원을 받들어 우리 민족사의 진운을 영예롭게 개척해 나가기 위한 나의 중대한 결심을 국민 여러분 앞에 밝히는 바입니다. …오늘의 이 역사적 과업을 강력히 뒷받침해주는 일대 민족주체 세력의 형성을 촉성하는 대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약 2개월간 헌법 일부 조항의 효력을 중지시키는 비상조치를 국민 앞에 선포하는 바입니다.

‘저의’도 아니고 ‘나의’ 중대한 결심이라니.



중앙청 앞에는 탱크와 장갑차가 진주했다. 수방사 마크 선명한 장갑차가 광화문을 뒤로 하고 포신을 세종로로 향했다. 나라의 군대가 국민을 향해 공격 태세를 갖춘 것이다. 동시에 이유모르게 잡아들여진 이들은 평소에 밉보였던 언론인과 재야인사, 그리고 야당 정치인들이었다. 그 가운데 이세규 의원이 있었다.
그는 예비역 준장으로 6.25 때 육사 7기 출신의 초급 장교였다. 그는 용감한 군인이었으며, 무엇보다 부패와 횡령이 일상화됐던 당시의 군대에서 보기드물게 청렴한 장교로 유명했다. 그의 별명 중 하나는 콩나물 대령이었다. 대령 시절 자기 월급을 떼 어려운 이들에게 나눠 주는 바람에 가계가 어려워져, 집에 손님이 왔을 때 콩나물 국 한 그릇만 내놓는다 하여 붙은 별명이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이 의원이 사단장으로 있던 시절 임지로 면회를 간 그의 부인과 자녀들은 "민간인이 군의 식량을 축낼 수 없다"는 이씨의 고집 때문에 서울에서 쌀과 부식을 가져가야 했으며, 가족들이 군용차량에 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아 가족들은 관사로부터 버스터미널까지의 수 ㎞를 걸어 다녀야만 했다. 당시 그는 집 한 채 없는 거의 유일한 장성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에 완곡한 반대 의사 표명을 한 것이 빌미가 되어 군복을 벗게 된 이세규는 정치에 입문했다. 당시 그는 야당 입장으로서는 귀중하기 이를 데 없는 야권 국방 전문가로서 활동했다. 천만 관객의 영화로 유명한 <실미도>의 주인공들이 실미도를 탈출하여 서울 시내에서 자폭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정부는 이들을 '무장 공비'로 규정했다. 이 거짓말을 폭로한 게 바로 이세규 의원이다.

그러니 정부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한 눈엣가시가 없었을 것이다. 유신이 선포되자마자. 이세규 의원은 다른 국회의원들 몇 명과 함께 일순위로 군 정보기관에 끌려갔다. 그리고 견딜 수 없는 고문을 당했다. 그들은 아마 이세규가 군내에서 반(反)군 인맥을 꾸리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이 의원에게는 유독 심한 고문이 가해졌다. 취조의 주 내용은 그의 인맥과 군내 동조자들의 이름을 밝히라는 거였다. 물론 유신 지지 서명도 함께 강요당했다.



많은 사람들이 잔인하거나, 비굴하거나 혹은 멍청한 시대였다. 이세규를 잡아들이라고 명령한 박정희는 잔인했고, 그 명령에 한 마디의 의문이나 반발 없이 이세규를 잡아들인 뒤 끔찍한 고문을 자행한 중앙정보부는 비굴했다. 그리고 나라가 어디까지 흘러가는지를 모른 체한 이들은 멍청했다. 그러나 간혹, 인간은 그렇게 하찮은 존재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세규는 그 소수의 사람 중 하나였다.
고문을 당하던 중, 이세규 의원은 자살을 결심하고 혀를 깨물었다. 그러나 고문의 고통이 심했던 탓에 혀를 정확히 깨물지 못했고 대신 의치가 부러져 나갔다. 부드득 소리와 함께 피가 쏟아지자 고문하던 이들도 당황했다. 왕년의 용감한 소대장, 어려운 이들에게 자기 월급의 반을 쪼개 주던 콩나물 대령, 부인과 가족에게 "민간인이 군 밥을 먹을 수는 없으니 먹을 음식은 직접 싸 오라" 말하던 대쪽 같은 군인. 한때는 박정희가 아끼는 제자이자 후배기도 했던 이세규는 입에 피를 가득 문 채 절규했다.

적군의 포로로 잡혀도 장성에게 이렇게 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제 장군으로서 최후의 것을 다 잃었다 더 이상 살아봤자…. 너희 놈들은 사람도 아니다.

1972년 10월 17일은 '사람도 아닌 자들'이 사람들에게 일으킨 쿠데타였다. 그 와중에 사람다운 사람들은 혀를 깨물며 피를 흘렸고 몽둥이찜질 속에 비명을 질렀다. 이세규 장군(의원보다는 장군으로 부르고 싶다)은 그 후 1년 동안 7번이나 끌려가서 고문을 받았다. 그는 그 후 지팡이를 짚고 생활할 정도로 몸이 망가졌고 박정희가 죽은 뒤에도 일체의 공직을 마다한 채 칩거하다가 1993년 사망했다. 그의 사망을 보도한 중앙일보 기사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고문 도중 혀를 깨물고 자결을 시도할 때 부러진 의치를, 이씨의 부인 권혁모 씨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권혁모 여사가 생존해 계신지 알 수 없으나, 나는 그 의치를 언제고 한 번쯤 보고 싶다. 그 부러진 이는 온 나라에 어둠이 참혹하게 내려앉던 시절, 그에 지지 않고자 버틴 사람들이 있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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