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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을 믿으십니까?

  • 입력 2015.10.01 10:20
  • 수정 2015.10.02 14:02
  • 기자명 BIG 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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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의 유효기간은 얼마나 될까
?
2, 3, 5? 개인적으로는 아직 2년을 넘겨본 적이 없어서, 어찌됐든 최대한 짧은 선택지에 한 표를 행사해야만 하는 위치에 처해있다. 예전에 신문에서 본 한 기사에서는 사랑이 불타오르는 기간은 최대 3년이라는 조사결과가 있었는데, 그러한 조사결과는 늘 보편적 정서에 호소하길 마련이니 잘 믿지 않는다.
영화 <블루 발렌타인>(Blue Valentine, 2010)도 이러한 낭만적 사랑에 회의를 던지는 수많은 영화들 중 하나다. 방금 이 문장을 쓰면서 스스로도 매우 진부하다고 느꼈다. 이 문장에 그다지 만족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영화만이 가진 독특한 시선과 매력들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 푸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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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일까>에서도 낭만적 사랑이 떠나간 뒤의 처참한 감정과 냉혈한 눈빛을 잘 보여줬던 미셸 윌리엄스는 이 영화에서도 십분 활약했다. 여주인공 신디는 "미래가 기대되는", 또한 "유학을 꿈꾸는" 의대생이다. 분명한 것은, 그녀에겐 현재의 삶(학교, 공부, 남자친구, 부모님 따위)보다 나중(유학, 미래, 새로운 남자, 할머니 등)에 더욱 무게를 두는 몽상가적 기질이 있고, 동시에 사랑과 감정의 문제에 있어서는 매우 현실적이다. 둘은 모순적인 것 같지만 실은 상호의존적이다.


이삿짐 센터에서 일하는 딘은
, 전형적인 블루칼라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에게 세상은 놀이공원이고, 일은 기쁨의 장소다. 사랑과 행복 이외에 돈도, 명예도 필요없어 보이는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 철저히 배반적인 캐릭터다. 그런 점이 처음에는 신디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법과 규율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남자. 재거나 계산하지 않고 그녀를 웃게 해주는 남자. 그녀와 원하면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무조건 달려오는 남자. 한 여자에 꽂히면 세상이 곧 그녀가 되는 남자.
그는 신디의 임신 사실을 듣고, 그것이 자신의 아이인지(혹은 그녀가 이전에 만나던 남자의 아이인지)도 불확실한 상태에서 그녀와 결혼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가 버스 안에서 기침처럼 내뱉은 "가족이 되자(Be a family)."라는 말은 가벼워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무거운 대사이기도 했다. 어쩌면 불우한 가정환경과 고등학교 중퇴라는 출사표를 들고 신디의 부모님을 마주한 것은 그다운 용기였고, 그만이 가질 수 있는 패기였다.


신디는 결혼 후 찾아온 권태와 감정의 소멸을 이겨내지 못한다
. 일찍이 부모님의 '사랑 없는 결혼'을 목격한 그녀는 영원히 지속되는 감정, 사랑의 영속성을 믿지 않는다. 그런 그녀가 잠시 동안이라도 이러한 회의감에 눈감은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최악(사랑하지 않는 남자의 아이를 가진 것)'의 상황에서 '최선(딘과의 결혼)'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못 가 그녀의 감정은 죽은 식물처럼 말라버리고, 그 결과는 처참했다.
딘은 점점 더 그녀에게 집착하게 되고, 신디는 그의 태도에 더욱 더 지쳐간다. 그가 내뱉는 '노력'이라는 단어가 신디에게는 이미 불가능의 영역으로 접어들게 된다. (사족이지만, 자칭 '권태기 전문 연기자' 미셸 윌리엄스의 연기는 역시 이 작품에서도 빛을 발했다.) 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그녀의 냉담함이 새삼 무섭기까지 하다.


한때 폴리아모리의 적극적인 지지자였던 나는 이러한 영화를 매우 즐겨보곤 했다
. 그녀들의 변덕에 공감하며, '이것은 변덕이 아니라 본능'이라고 스스로 자위하기 위한 용도였다. 그러나 여러 번의 연애(절대적으로 많은 양은 아닐 수도 있지만)를 거치면서 낭만적 사랑에 대한 회의감이 때로는 특정 대상과의 연애로 눈 녹듯 사라지기도 하고, 그러다가도 가끔씩 다시금 스멀스멀 기어오르기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그것이 어떤 연애에서든 '정해진 룰'이 아니라 상대가 누구이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기도 한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폴리아모리' 같은 용어를 쉽게 입에 담지 않게 됐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더 이상 '폴리아모리스트' '모노아모리스트'도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를 사랑하는 문제는 그처럼 한 마디 법칙으로, 한 줄의 소신으로 못 박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바보 같은 규정은 그만두기로 한다.


사랑할 때는 사랑에 대해 말하기 어렵고 이별하고 나서야 그 사랑에 대해 회고할 수 있듯이
,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한 쪽 눈이 까막눈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신디 또한 한 순간 까막눈이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시점이 있었듯이, 나에게도 언젠가 그런 순간이 올지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 나에게 이야기했듯이, '결말을 예상한 사랑'은 다소 재미없고 허무하지 않을까. 누구도 소설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서 처음으로 돌아오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소소한 검색 결과로는, 이 영화가 '지나친 현실주의'를 그려냈다는 평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낭만적 사랑의 진행단계와 그것의 어찌 보면 비극적인 결말을 뒤죽박죽 배치함으로써,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낭만적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형태의 '균형'이 필요한지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열린 결말에 대한 적당한 환상을 지닌 채로, 결말 따위에는 구애받지 않고 현재의 사랑을 만끽하라는 교훈 말이다. 결말이 어찌되든 간에 이 순간에 사랑하고, 행복하다면 그걸로 된 것이다. 인생이란 결국 순간이 모여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언제나, 이 순간의 사랑을 영원히 지키고 싶다. '영원'이라는 시간의 개념이 오로지 현재의 순간에서만 유효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원문 : 낙서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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