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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학생도 들러리는 아니다

  • 입력 2015.09.30 14:01
  • 수정 2015.09.30 18:39
  • 기자명 309동12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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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에서 처음 학생들과 마주했을 때, 나는 무척 두려웠다. 내가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지,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무엇을 가르치면 안 될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곧 내가 얼마나 오만했는가를 깨달았다. 약간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만으로도 학생들은 정말이지 훌륭한 인문학을 만들어 냈다. 평범한 집단 지성의 힘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은 나의 지도교수가 되었고, 구원자가 되었다. ‘교학상장’, 가르침과 배움은 서로 성장한다, 라는 말을 항상 기억하며 강단에 선다. 이 글에서는 평범한 지방대 시간강사의 시선으로, 학생들에게 배운 인문학을 나누려 한다.

첫 강의를 시작하던 날, 강단 위에 올라선 나는 무척 놀라운 경험을 했다. 고작 한 뼘 높이의 강단에 올라서니 강의실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30여 명 학생들의 표정과 몸짓까지 모두, 그것은 나를 향한 호감이나 적대감까지 전달될 만큼 선명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가진 두려움과 긴장감 때문일 것이라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강단에서의 시야는 생각보다 모두에게 닿았다. 그래서 모두와 소통할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우선 들었다. 그런데 동시에 어떠한 배신감이 찾아왔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감정은 커져 갔다.
초·중·고 학창시절의 나는 그다지 눈에 띄는 학생이 아니었다. 손을 들고 제대로 발표해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워낙 내성적인 성격을 가졌던 탓도 있겠지만, 용기를 내어 손을 들었을 때 나를 지목해 준 교사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느 교사들은 항상 몇몇 특정 학생과 눈을 마주치며 수업을 했다. 발표도, 칭찬도, 모두 그들에게 돌아갈 몫이었다. 시야 바깥의 학생들이 손을 드는 것을, 그들은 제대로 돌아보지 않았다.


ⓒJoins


어느새 내 역할은 그저 조용히 자리를 채우는 이름 없는 학생으로 구획되었다
. 나는 대개 이름보다는 무작위의 번호로, 혹은라는 지칭대명사로 불렸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들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지금은 한 반에 몇 명의 학생이 있는가 잘 모르겠지만, 그때는 반마다 50여 명이 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를 탐색하기는 무척 힘든 일일 테니 면대면의 수업을 하는 일은 어려울 것이다, 하고 미루어 짐작한 것이다. 어린 나이에 그러한 배려를 하고, 일찌감치 발표를 포기할 만큼, 나는 다수의 학생과 함께 강단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교무실에서 언젠가 교사들의 대화를 얼핏 들은 기억이 있다. “6학년 3반의 S학생은 참 수업 태도가 좋아요”, “ 3반은 S학생만 보고 수업하면 되니까 참 편하죠.” 서른이 넘어서도 어떤 오래된 상황이나 대화가 그 분위기와 질감까지 선명히 떠오르는 경우가 있는데, 나에겐 이것이 그 중 하나다. S는 무척 우수한 학생이었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어머니께서는 녹색어머니회의 회장직을, 아마 맡고 계셨다. 키도 크고 예쁘게 생겨서, 많은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 때의 나는 그저 나도 S 같은 학생이 되어야지, 하고 속 좋게 넘겼던 것 같다.
강단 위에 서 보니, 실제로 S와 같이 눈에 먼저 들어오는 학생이 몇몇 있었다. 그들은 대개 앞자리에 앉았고, 눈을 반짝이며 수업을 들었고, 내가 질문하면 가장 먼저 손을 들었다. 나를 향한 호감의 눈빛도 아낌없이 주었다. 강의하는 입장에서 무척 사랑스러운 학생들이었다. 하지만 그 적극적인 태도를 존중하며, 나는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그들의 즉각적인 반응에 기대고자 한다면 강의는 쉽게 풀어나갈 수 있겠지만 그 순간 강의실은 그저 몇몇 특정 학생을 위한 공간이 된다. 무엇보다도 눈에 먼저 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그들의 성실함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성실함이란 강의실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사유하는가의 정도로 측정되어야 한다. 강의실에 앉은 그 누구라도, 들러리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강의를 해 나가며, 몇 가지 다짐을 만들었다.

① 모두에게 공평한 시선을 주기


어느 한 지점을 바라보거나 몸을 기울이거나 하는 것을 되도록 피했다
. 특히 질문을 할 때는 고개를 좌에서 우로 의식적으로 돌려가며, 모두에게 시선을 주려 노력했다. 어느 특정 학생에게 답을 기대하지 않는다, 라는 무언의 전달이었다. 누군가 의견을 발표할 때도, 그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다른 학생들을 둘러보며 그들의 반응을 함께 살폈다.

② 모두의 움직임을 기억하기
손을 든 모든 학생들을 기억했다. 예컨대 약간의 순을 두고 5명이 함께 손을 들었다면, 5명의 순서와 이름을 모두 새겨 넣었다. 그리고 순서대로 모두에게 발언 기회를 주었다. 그에 더해 손을 들다가 말았다든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든지 그러한 경우에도, 제가 잘 보지 못했는데 A학생도 손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혹시 그렇다면 발표해 주십시오, 하고 청했다. 손을 들지 않았더라도 누군가에게서 발화의 가능성을 감지하면 그런 식으로 에둘러 물었고, 대개의 경우 해당 학생은 좋은 발표를 해 주었다.

③ 학생 간 위계를 만들어 내지 않기
강의실에서는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 내가 어느 특정 학생들에게 집중한다면 그것은 노골적인편애가 된다. 학생 간 갑과 을의 위계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강사들을 나는 많이 보아 왔다. 그러면 강의실은 더 이상 집단지성의 실험실이 아니며, 틀에 박힌 죽은 공간이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신의 가능성을 박탈 당한 채로 밀려나 들러리가 된다. 강의실에는만 존재해야 한다.
위와 같은 다짐을 한 것은, 역설적으로 모두에게 시선을 주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잠시 긴장을 풀면 어느새 항상 손을 드는 몇몇과 소통하고 있기도 했고, 시야에서 벗어난 학생들의 지루한 모습이 다시 눈에 들어오기도 했다. 특히 오늘 강의는 참 학생들의 반응도 좋았고 분위기도 좋았어, 하고 느끼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가도 돌이켜 보게 되었다. 연구실로 돌아가며 그 날의 강의를 복기하며 몇몇 학생의 얼굴만 떠오른다면, 몇몇 학생의 얼굴과 이름이 흐릿하다면, 나는 그날 가장 나쁜 강의를 한 것이다. 강의가 끝난 후에는 그 날 강의실에 있었던 모두의 얼굴이, 발언이, 몸짓이, 점점이 떠올라 전체를 구성해야 한다. 그래야강의를 한 것이다.
강의를 시작했던 학기에, 나는 서울에 대중 인문학 강좌를 들으러 다녔다. 인기가 많은 강사여서,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 온 수강생만 매주 100명이 넘었다. 강의는 수강생들의 질문에 강사가 답하는 식으로 이루어 졌다. 배우는 것이 많아 주말마다 기차를 타고 서울을 왕복하는 수고가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곧 강사에게 실망했다. 그의 시야가 고작 20여 명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질문을 위해 세 번이나 손을 들었지만, 한 번도 그의 시야에 들지 못 했다. 강사의 선택은 무척이나 즉흥적이었다. 나뿐 아니라 선생님이 여길 좀 봐주었으면, 하고 아쉬워하는 수강생들의 반응이 여기저기에서 눈에 띄었다. 그래서 나는 곧 수강을 그만두었다. 내가 강단에 서기 이전이었다면 별로 상관하지 않았겠지만, “당신은 나를 볼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었다.


강의실에서 가장 기쁜 순간은
, 학생들이반짝반짝할 때다. 좁은 시야에 갇힌 몇몇이 아니라, 모든 학생들의 반짝임을 내가 느낄 수 있을 때다. 그것은 어떤 감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에게 부여된 가능성을 자각하고, 치열하게 사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모두를 반짝이게 하는 것이 나의 일이다. 모두를 갑으로 만드는 것이 나의 일이다. 그것이 인문학을 가르치는 강의실에서, 모든 학교의 교실에서 지향해야 할 바다.
강의실이 존재하는 것은 교수자와 학생이 서로면대면으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눈을 마주 치고, 교감하고, 소통하기에, 강의실은 비로소 존재 의미를 갖는다.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없다면, 차라리 인터넷 강의로 모든 수업을 대체하는 편이 낫다. 강사는 모든 학생에게의 역할을 부여하기 위해 강의실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강의실은 을이 없는, 오로지 갑만 존재하는갑갑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교무실에서 들었던 그 대화를 앞으로도 오래 기억하려 한다. 애쓰지 않아도 종종 기억나는 것이지만, 그러한 인간으로 강의실에 존재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의실의 모든 학생들에게 자신의 시선을 나누어 주었던 모든 선생님들께, 무한한 감사와 존경을 보낸다. 모든 학생이, 그러한 선생님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가능성을 키워 나갈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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