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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댕이는 절대 안 돼!" 미국 사회를 뒤흔든 '리틀록 나인' 사건

  • 입력 2015.09.29 13:05
  • 기자명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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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록 나인' 기념 동상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 선언 후, 공식적으로 미국의 노예 제도는 폐지됐다. 그러나 실지로 인종 차별이 철폐되었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임을 우리는 안다. 백인 여인을 희롱했다는 이유로 목이 매달리는 흑인은 해방 이후에도 지천이었고, 투표소에 나타난 흑인의 집이 불타고 부서지는 것은 비일비재해서 사건 축에도 들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더 웃기는 것은 흑백이 평등함에도 ‘분리’가 법적으로 보장됐다는 사실이었다. 1896년 퍼거슨이라는 이름의 흑인은 유색인종 전용칸으로 가라는 명령을 거부했을 때 그는 ‘인종 격리 차량법' 위반으로 고발된다.
퍼거슨은 대법원에 이 법에 대한 위헌 소송을 냈는데 대법원은 “분리했을 때 각각의 시설이 똑같으면 괜찮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그 후 수십 년 동안 기차에서, 식당에서, 화장실에서 일상적인 인종분리가 시행되는 근거가 된다. ‘한 방울의 피’만 섞여도 유색인종으로 분류하는 ‘one drop’ 법칙도 일상적으로 통용됐다. 1984년 루이지애나 법정은 230년 전 프랑스 노예 농장주와 흑인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이의 후예라는 이유로 누가 봐도 완연한 백인 여성을 ‘흑인’으로 판정했을 정도니까.



리틀록 나인의 등교에 반대하는 백인여성



가장 안된 것은 자라나는 아이들의 교육조차 칼같이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특목고에 생활수급자 가정의 자녀가 들어가는 것이 꿈이 되어 가고 “내 새끼를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랑 같은 학교에 보낼 수 없다.”고 학부모들이 반발하는 나라의 멀지 않은 미래와 같이.
‘분리하지만 평등하다.‘는 이 판결은 수십 년이 지나서야 뒤집어진다. 집에서 가까운 백인 학교에 가지 못하고 먼 거리를 통학해야 했던 ‘흑인‘ 린다 브라운이 소송을 감행한 것이다. 이에 1954년 미국 대법원은 이런 판결을 내린다.


'분리하지만 평등하다'는 논리는 이제 공교육 분야에서 설 자리가 없다.

분리한 교육 시설은 태생부터 불평등하다.

공교육에서의 흑백 분리 교육을 철폐하라.


역사적인 판결이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남부 백인들은 벌집을 쑤신 듯 난리가 났다. 사학법 파동 때 우리나라 학원 재벌들과 일부 종교인들이 눈을 까뒤집었던 것과 유사한 소용돌이가 미국 각 주를 휩쓸었다. 일반 시민들은 물론 정치인들까지도 흑백 통합 반대투쟁의 깃발을 들었다. 아칸소 주는 그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아칸소의 주도(州都) 리틀록의 센트럴 고등학교는 일약 태풍의 눈이 됐다. 흑인 학생 17명이 입학 원서를 제출한 것이다. 학교위원회는 대법원 판결을 받아들여 입학을 수용하려 했으나, 학교 내외의 반발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흑인 학생들이 학교에 나타났을 때 백인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침을 뱉고 돌을 던졌다. 아칸소 주지사는 한 수를 더 떴다. 착검한 주 방위군과 경찰을 보내 흑인 학생들의 출입을 막은 것이다.
착검한 군인들에 막히고 "불태워 죽여라."를 부르짖는 성난 백인들에 둘러싸였던 흑인 여학생 엘리자베스 액포드의 회고는 슬프다.


나는 누구든 내게 호의적인 사람을 찾으려 애를 썼어요. 사방을 둘러보다가 친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한 나이 든 여자를 봤지요. 잠시 그녀를 놓쳤다가 다시 찾았을 때 그녀는 내게 침을 뱉었어요.


17명 중 8명은 그 위협에 못 이겨 입학을 포기했다. 하지만 9명은 꿋꿋하게 남았다. 어니스트 그린, 엘리자베스 엑포드, 제퍼슨 토마스, 테렌스 로버츠, 카로타 월스 라니어, 미니진 브라운, 글로리아 레이, 텔마 마더세드, 멜바 빌스. 바로 ‘리틀록 나인’이었다.



하교하는 흑인 학생을 경호하는 제101공정부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브라운 판결’에 개인적으로는 불만스러움을 표현했지만 리틀록 사태에 강력하게 대응한다. 1957년 9월 25일, 노르망디 상륙 작전 직전 독일에 낙하했던 저 유명한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제101공정부대원들을 리틀록에 투입한 것이다. 이 ‘형제단’들은 나찌 독일군들을 위압하던 그 기세로 ‘리틀록 나인’을 호위하며 학교 안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아이젠하워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UN 헌장 속에서 세계인이 하나 되어 선언했던 행동 기준을 어기는 이들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UN 헌장은 ‘기본적인 인권에 대한 믿음’과 ‘인간의 가치와 존엄’, 그리고 ‘종교와 언어, 성별과 인종에 차별받지 않음’을 확고히 하고 있습니다. 이에 저는 깊은 신뢰로써 아칸소 주 주민들에게 호소합니다. 법 집행을 가로막는 모든 시도를 중단하라고 외쳐 주십시오.


인권의 존엄함에 반해 왔던 법, 그 법에 대한 기나긴 투쟁과 그에 대한 법의 호응, 그리고 이제는 또 다른 질서로서 수구 꼴통들을 제압하는 일대 드라마의 클라이맥스가 펼쳐진 것이다.
흑인들이 분리에 순응했더라면, 버스의 백인 좌석이 비어 있더라도 앉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게 알고, 담 넘어 코 앞의 백인 학교에 보내지 못하고 몇 킬로미터 떨어진 흑인 학교로 끙끙대며 딸을 등교시키는 것을 ‘법치국가 민주 시민의 도리’로 알고 따랐더라면, 리틀록 나인이 모두 그 위협에 질려 등교를 포기했더라면 아마도 아이젠하워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고, 애시당초 브라운 판결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리틀록 나인'의 용기와 아이젠하워의 결기가 없었다면 미국은 흑인 대통령을 가질 수 있었을까?



법이 인간의 가치와 존엄‘에 어긋나는 질서를 형성하고, 그것이 ’기본적인 인권에 대한 믿음‘을 훼손하는 무기가 될 때, 법은 신성함을 잃고 그 법에 저항한 사람들은 새로운 역사와 질서를 창조하는 영웅들로 그 성의(聖衣)를 입는다. 가까이는 부당한 정리해고에 반대하여 수백 일을 크레인 위에 매달린 여성 노동자들부터 인간이 인간을 차별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일이라며 항의하고 일어섰던 수많은 선각자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발걸음은 역사의 새 길을 열었다.
리틀록 나인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유색인종 대통령(One Drop법에 따르면 무조건 흑인인)의 취임을 감개무량하게 지켜보았다. 그들은 모두 취임식에 초청되었지만 그 감격의 현장에 가지 못하고 TV로만 함께한 사람도 있었다. 엘리자베스 액퍼드는 리틀록 사건 때 당한 폭행과 압박의 후유증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를 앓았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갈 자신을 상실했던 것이다. 오바마의 취임식은 그들의 아픔으로 장식되고 그들의 이름으로 수놓아진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된다. 그들이 없었으면 오바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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