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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군용기 헌납을 강요했던 김무성 부친 김용주

  • 입력 2015.09.21 13:32
  • 수정 2020.09.30 10:14
  • 기자명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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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는 김용주 전 전남방직 회장의 친일 행적을 밝혔다. ⓒ <뉴스타파>


2015년 민족문제연구소(이하 민문연)는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의 선친인 김용주 전 전남방직 회장이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 징병을 독려하고 일제에 군용기 헌납을 선동하는 등 자발적 친일 행위를 했다고 밝혔다. 선친의 평전인 <강을 건너는 산(2015, 청어)>을 펴냈던 김 대표로서는 스타일을 잔뜩 구겨버린 셈이 되었다.



일제의 '군용기 헌납' 강요

김용주의 친일 행적 가운데 눈에 띄는 대목은 ‘군용기 헌납’이다. 군용기 헌납이란 말 그대로, 민간인이 군용기를 구입해 일제에 헌납하는 행위를 말한다. 일제는 만주침략 후 중국과의 본격적인 전쟁에 대비한 군비증강을 위해 1935년 각 도·부·군이나 단체에 국방비 헌납을 강요하였고 그 선봉에 친일 관료, 지식인, 자본가가 나섰다.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군용 비행기를 헌납한 친일인사 100여 명과 친일단체 명단에 따르면 당시의 친일 인사들이 낸 국방헌금 내역이 일부 드러난다. 당시 1엔을 오늘날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1만 원인데 이들은 1천만 원(천 원)에서 40억(40만 원)까지를 일제에 헌납했다.
일제에 국방헌금을 낸 친일 인사들의 명단과 금액이 명시되어 있는 ‘내어노차 비행기’ 포스터에 명시된 내역은 어마어마하다. 당시의 금광왕 최창학은 103만3천 엔(현재 가치 103억3천만), 조선 최대갑부 경성방직 김연수(인촌 김성수의 동생) 사장은 81만3천 엔(81억3천만),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 25만 엔(25억), 중추원 참의 이경식은 10만 엔(10억) 등을 냈다.

▲ 국방헌금을 낸 친일 인사들의 명단과 금액이 명시된 포스터

거대 부호인 친일파들은 스스로 돈을 헌납했지만 일반인들을 상대로 한 모금은 강제였다. 일본은 각 지역에 다양한 단체를 조직해 모금운동을 벌이게 했다. 또 시도 및 학교별 모금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일본은 효과적인 모금을 위해 비행기에 헌납자의 이름은 물론 학교이름까지 새겨 넣었다.

개신교, 불교계도 비행기 헌납

종교계도 비행기 헌납에 나섰다. 해방 뒤 조계종 중앙총무원장까지 지내고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친일 승려 이종욱은 여러 사찰로부터 성금을 모아 모두 5대의 비행기를 일본에 헌납했다. 조선예수교장로교도 1941년에 비행기를 헌납했다.

▲ 해군함상전투기 조선장로호. 조선예수교장로회에서 헌납한 비행기다.

1936년에는 조선 각지에서 1개 군(郡)에서 돈을 모아 1대 비행기를 일본군에 바치는 ‘1군 1비행기 헌납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를 주도한 사람은 친일 기업인이자 관료인 문명기(文明琦, 1878~1968)다. 일본 이름을 후미아키 기이치로(文明琦一郞)라 지은 문명기는 평남 안주군 출신으로 경상북도 영덕의 대표적 친일파다.


문명기, '애국옹' 또는 '야만기·야변기'

그는 대한제국 말기 생선장수로 돈을 모은 뒤 1910년대부터는 제지업으로, 1920년대부터는 광산업을 통해 대부호로 성장했다. 1935년 10만 원을 국방헌금 형식으로 납부하여 비행기 2대를 사서 조선총독부에 헌납하였는데, 당시 총독부는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그가 기증한 비행기에 ‘문명기호’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한 1930년대 초부터 세금 외에도 막대한 돈을 국방헌금으로 납부하여 이른바 ‘애국옹’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 자기 이름이 붙은 비행기를 헌납한 뒤에 ‘1군 1비행기 헌납 운동’을 주도하고, 조선국방비행기헌납회를 조직했다.

문명기는 생선 장수 시절에 지역 경찰서장 집에 청어를 정기적인 뇌물로 갖다 바쳤는데 이는 ‘뇌물’을 뜻하는 ‘사바사바’라는 은어의 어원이 되었다. 청어는 일본어로 사바이라 불렀으므로 그의 선물을 가리켜 ‘사바사바’라고 풍자했기 때문이었다.
1920년대 이래 경상북도 도평의회 의원 등을 지내면서 지방 유지로 활동하던 그는 비행기 헌납 후 전국적 친일파로 알려졌다. 1935년에는 자신의 금광에서 발견한 두꺼비 모양의 금덩어리를 일왕에게 헌납했고 그가 바친 비행기에는 그의 이름이 붙었다.
전쟁 기간 동안 국방비를 거듭 바치고 의용단 모집에 앞장섰으며 1943년에는 비행기뿐 아니라 배를 기부하자는 이른바 ‘헌함(獻艦) 운동’까지 벌이고 자기 광산을 기증했다. 그는 의식주조차 일본식을 따라 집안에서도 일본어를 쓰는 광신적 모습을 보였다.
그는 일제로부터는 ‘애국옹’이라는 칭호를 받았지만 다수 조선민중으로부터는 ‘야만기(野蠻琦)’ 또는 ‘야변기(野變琦)’라 불리는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1941년부터 해방 때까지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다. 해방 이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기소되었지만 고령을 이유로 보석으로 풀려났고 결국 아무런 처벌로 받지 않았다.


군용기 헌납한 친일 인사들, 후손에도 부 대물림

문명기는 90살까지 살았으며 두 명의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손들도 번창했다. 장손인 문태준은 박정희 정부와 유신 정권 때 국회의원, 노태우 정부의 보건사회부 장관, 대한의사협회 회장을 지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 매국을 하면 3대가 떵떵거린다’는 속설을 증빙해 주는 집안이다.
비행기 헌납에 적극 참여한 김연수·박흥식 등은 직접 비행기 제조공장을 운영했다. 김연수는 조선항공공업회사를, 박흥식은 조선비행기주식회사를 각각 설립 운영하면서 일제 침략 수단인 비행기를 직접 제작해 공급한 것이다.
이는 일제에게 직접 무기를 공급한 중죄로 민족적 심판을 피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해방 후 친일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이들은 역사적 단죄를 피했고 광복 후에도 우리 사회에서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민문연에서 밝힌 김용주의 친일 행적은 경상북도 도회의원으로서 출정 황군에 대한 감사 전보 발송을 제안하고, 조선 청년들에게 징병제 참가를 독려하는 광고를 냈으며 친일단체 간부로서 일제 식민 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는 것이다. 또 그는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를 위한 신사 건립 등을 주장했고 대구국체명징관 등에 기부금을 헌납하고, 군용기 등 헌납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김용주가 일제에 군용기를 헌납했다는 정확한 내역은 밝혀지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그가 1943년과 44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에 조선인 강제 징병을 독려하고 일제에 군용기 헌납을 선동하는 광고를 낸 것은 그의 행적을 간접적으로나마 짐작케 한다.

시국은 확실히 승리냐 죽음이냐의 결전의 한가운데로 돌입하고
더욱이 적은 공군으로써 승패를 결정지으려고 한다.
적의 맹렬한 공습 하에서 묵묵히 (조국) 수호에 애쓰는
우리 아버지, 우리 아들, 우리 형, 우리 동생,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통과 그리고 “좀 더 비행기를”이라고
외치는 필사의 요청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광고 ‘결전은 하늘이다! 보내자 비행기를!’(<아사히신문> 1944.7.9.)

이 광고를 낸 이들은 ‘경북 포항읍’ 사람들이다. '영일어업조합' 옆에 김용주의 창씨명 가네다 류수(金田龍周)가 선명하다. <위키백과>에서 살펴본 김용주의 해방 후 이력은 눈부시다. 김용주는 1948년 대한해운공사 사장을 지낸 이후 국회의원과 기업(전남방직)을 경영하며 1970년 한국경영자총협회 초대 회장 등 각종 직능단체의 장을 골고루 지냈다. 여느 친일 인사와 마찬가지로 해방 후에도 그는 여전히 기득권을 유지한 것이다.


일본, 다시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김용주는 관련 자료가 드러나지 않아 <친일인명사전>에 오르는 불명예만은 피했다. 이에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부친이 ‘애국적 삶’을 살았다고 강변하지만, 민문연은 이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김용주가 <친일인명사전>에서 빠진 것은 사전 편집 당시 ‘추가조사가 필요해 보류한 것’뿐이고 ‘당연히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일제 식민지 시기 민족사를 정리, 청산하지 못한 질곡은 해방 70년이 지나도 여전하다. 일본의 아베정권은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뼈대로 한 안보법 제·개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패전 이래 다시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되돌아갔다. 이 일련의 흐름들이 주는 기시감이 어쩐지 서늘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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