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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왕은 한 번도 항복한 적이 없다

  • 입력 2015.09.07 15:13
  • 수정 2015.09.07 15:59
  • 기자명 잡곡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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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얼마 전부터 조정래 선생이 쓴 <정글만리>를 읽고 있습니다. 어젯밤 3권을 읽다가, 정신이 확 깨는 놀라운 내용을 발견했습니다. 중국 베이징 대학 사학과 학생들과 난징 대학 사학과 학생들이 '난징다투사' 현장을 탐방하고 세미나를 개최하는 장면을 읽던 중이었습니다.
그 부분에서, 한국인 유학생 송재형이 1945년 8월 15일 일왕이 발표한 항복문을 인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필자는 소설에서 이 대목을 읽기 전까지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항복을 했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지, 일본 항복 선언문에 정확히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는지는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이 사건을,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한 후 핵무기의 위력에 놀란 일본이 '무조건 항복'했다는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글만리>에 나오는 일본 천황의 항복문을 읽어보니 아무리 봐도 항복선언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일왕은 선언문에서 ‘항복’이라는 말을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습니다. 항복을 연상시키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선언문을 다 읽지 않은 사람이 필자 뿐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우선 그 전문을 옮겨 봅니다. 지루하시다면 아래 설명을 보셔도 되지만, 한번쯤 다 읽어 보셔도 좋을 듯 합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선언문>
오늘날 세계의 대세와 우리 제국이 처한 조건을 깊이 숙고한 결과 짐은 비상수단에 의지해 현재의 상황을 해결하기로 결정했노라. 짐은 우리 정부에 공동선언 조항을 수락하기로 했다는 뜻을 미국, 영국, 중국, 소련 정부에 통고하라고 지시했다. 우리 백성의 안전과 안녕뿐만 아니라 만국의 번영과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우리 황실 대대로 내려오는 엄숙한 의무인바 짐은 그 의무를 마음 깊이 새기고 있노라.
실로 짐은 일본의 자존과 동아시아의 안정을 확보하려는 진심 어린 바람에서 미국과 영국에 전쟁을 선포했을 뿐 다른 나라의 주권을 침해하거나 영토를 확장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전쟁은 근 4년을 끌어왔다. 그동안 짐의 육군과 해군은 전쟁터에서 용맹하게 싸웠고, 국가의 종복은 근면을 아끼지 않았으며, 짐의 1억 백성도 섬김에 소홀함이 없었다. 다들 최선을 다해왔으나 세계의 대세 또한 일본의 이익과 반대로 돌아가고 있다.
더욱이 적은 잔인하기 짝이 없는 폭탄을 새로이 사용해 무고한 생명을 무시로 빼앗기 시작했으니 그 피해가 실로 어디까지 갈지 헤아릴 수 없구나. 이 이상 교전을 계속한다면 일본 한 나라의 파괴와 소멸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류 문명 전체의 절멸로 이어질 것이니라.
상황이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짐의 1억 백성을 구할 것이며, 또 무슨 낯으로 황실 조상님들의 신위를 뵈옵겠는가? 이것이 짐이 정부에 열강의 공동선언 조항에 응하라고 지시한 연유다. 짐은 제국과 합심하여 시종 동아시아의 해방에 힘써온 동아시아의 동맹국들에 심심한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에서 다쳤다거나 제 본분을 다하다 죽은 장교와 사병 뿐만 아니라 그 유족을 생각하면 짐의 가슴은 밤이나 낮이나 고통을 가눌 길이 없다.
짐이 가장 염려하는 바는 부상자와 전쟁 피해자, 집과 호구지책을 잃은 사람들의 후생복지다. 금후 제죽에 닥칠 고난과 시련은 분명히 녹록지 않을 것이다.
짐은 그대들, 짐의 백성들 속내를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짐은 시운의 지시를 바다들여 어차피 불가피하다면 아무리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라 해도 인고하고 또 인고해 만세에 태평성대를 위해 길을 닦기로 다짐하였노라. 지금까지도 제국의 근간을 유지해 온 바 그대들의 한결같은 충정을 믿기에 짐은 항시 그대들과 함께 있다.
행여 감정이 격발해 공연히 일을 복잡하게 만들거나 형제끼리 의견이 달라 갑록을박하며 소요를 조성해 정도에서 벗어나 헤매다 끝내 세계의 신의를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유의하라.
각자 책임이 막중하고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명심하고 신령스러운 땅의 불멸을 항시 믿으며 세세손손 한 가족으로 지내라. 장래를 건설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라. 정직하고 고결한 품성을 도야하며 굳은 의지로 밀고 나가 제국의 영광을 드높이고 진보하는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할지어다.

앞서 말했듯, 우리가 흔히 <항복선언문>이라고 알고 있는 이 연설에는 '항복'이라는 말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일본 정부의 공동선언 조항을 수락하기로 했다는 뜻을 미국, 영국, 중국, 소련 정부에 통고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전쟁 책임자인 일왕은 항복을 한 일이 없고, ‘세계의 대세와 우리(일본)제국이 처한 조건을 깊이 숙고한 결과 짐은 비상수단에 의지해 현재의 상황을 해결’하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미국, 영국, 중국, 소련에 ‘공동선언 조항을 수락하는 비상수단을 강구’하였을 뿐 항복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아베 총리를 비롯한 일본 정치인들과 우익 인사들의 왜곡된 역사인식이 어디서 출발하였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항복문이라 하기 힘든 이 연설문에는, 미국·영국을 제외한 나라들과는 전쟁을 일으킨 일도 없고, 주권을 침해하거나 영토를 확장하려는 생각조차 없었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나 난징대학살 등의 책임을 피하며 아시아 공영을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일본 우익 인사들의 망언은 이 연설문의 내용과 일맥상통합니다.
일본의 왜곡된 역사인식이 쉽게 바로잡히지 않는 것은, 이 연설문이 단적으로 보여주듯 전쟁이 끝난 시점에서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1945년 8월 15일을 기해 일본이 전쟁 중단을 선언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은 누구에게도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피해를 입은 아시아 주변국들의 문제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연설문에는 전쟁을 중단한 까닭 역시, '자국 백성들의 안위를 걱정한 조치이고, 고난을 이겨내고 다시 힘을 기르기 위한 후퇴였을 뿐'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혹자는 이미 지난 일들을 물고 늘어지면 현재의 한일관계에 해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지난 일’일까요? 사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70년 전, 일본은 말 그대로 전쟁만 끝냈을 뿐입니다. 항복도, 책임 인정도 없는 껍데기뿐인 선언문을 읽으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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