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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콘돔을 벗은 다음의 이야기

  • 입력 2015.08.21 09:45
  • 수정 2015.08.21 13:33
  • 기자명 20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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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나쁜 짓을 아직 못 보셨나보네 ⓒ영화 ‘수어사이드 스쿼드’

밖에서 들어온 나쁜 균인지 확인을 해야 질에 생긴 염증을 완전히 치료할 수 있어요

맞은 편에 앉은 산부인과 선생님은 계속해서 ‘나쁜 균’을 강조하면서 세밀한 검사를 해야한다고 했다. 산부인과에서 말하는 검사의 비용이 결코 저렴하지 않다는 걸 아는 나는 그 말이 나오기 무섭게 ‘얼마냐’고 물어봤다. 돌아온 숫자는 11만원. 다음 달 월급이 들어오려면 2주는 남았는데.

방어적으로 “오늘은 치료만 하고 가겠다”고 몇 번을 이야기 하고서야 그 자리를 나올 수 있었다. 선생님은 계속 ‘~라는 건 알고계시고’ 라고 말하며 나를 물정 모르는 아이 다루듯 했다. 그것도 계속해서 ‘나쁜 균’을 언급하시면서. 왠지 내가 어디서 나쁜 짓을 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나쁜 짓? 섹스를 했을 뿐인데.

생리가 끝난 직후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관계를 가진 탓인지, 정말 산부인과 의사의 말처럼 그에게 ‘나쁜 균’이 옮았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그날 밤의 섹스는 함께였지만 산부인과 문 앞에서 나는 혼자였다는 점이다.

홀로 남겨진 14일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임신에 대한 공포가 찾아왔다. 테스트기를 사용하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관계 후의 14일 동안, 매일 혼자서 최악을 생각했다. 이모저모 따져봤을때, 가능성이 낮다는 건 알고 있어도 ‘여성은 365일 가임기’라는 말이 내 발목을 잡았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혹시라도 모를 1%의 가능성이 현실로 다가온다면, 내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남자친구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걸까. 엄마에게는 어떻게 말할까. 사서 하는 걱정이라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혹시 모를 가능성을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20대의 나이에, 총 1억 가까이 든다는 양육비를 현실로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 생명은 소중하니 무조건 아이를 낳으라는 사람은 생명의 소중함은 알아도, 엄마가 될 한 여자와 태어날 아이의 삶에 대해선 지극히 무관심한 사람이다.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다. 온라인 커뮤니티의 고민 상담 방에 들어가 글을 읽었다.

사후피임약 먹어야 할까요?’

질외 사정 후에 한 달이 지났는데 생리를 안해요’

임신 테스트기 지금 해도 될까요?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고민을 하는 사람 모두는 여자였다. 의문이 들었다. 왜 여기 있는 사람은 모두 혼자인 걸까. 섹스는 둘이 하는데 고민은 왜 한 사람의 몫인가. 그리고 궁금했다. 행위가 끝난 다음 내가 겪을 일들을, 고민들을 그는 알았을까. 이 모든 걸 알았더라면, 그리고 만약 그 자신이 똑같이 겪어야 하는 일이었다면 그는 피임을 별 것 아닌 일로 여길 수 있었을까?


만약 당신이 똑같이 겪어야 했다면
오래 지난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만났던 남자친구는 내 동의를 구하지 않고 관계 중간에 콘돔을 벗었다. 내가 화를 내자 남자친구는 미안하다며 자신을 자책했다. 눈물까지 흘리며 사과하는 그 앞에서 더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리고, 남자친구는 그걸로 끝이었다.

나쁜새끼… ⓒUFC

그 다음 날 처음으로 혼자 산부인과에 갔다. 사후피임약은 기록에 남지 않기 때문에 의료보험이 안된다는 말에 이유모를 죄책감이 들었다. 진단서를 받고 진료비 2만원과 약값 1만원을 지불한 후 사후피임약을 먹었다. 남자 친구는 다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라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그 말을 하는 그는 참 쉽게만 보였다.

더 불안하기 싫었기에, 내가 알아서 피임약을 먹기 시작했다. 약 먹는다는 것을 염려하던 그의 얼굴 한편에서 안도를 느낀 건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얼마 후, 그는 다시 "빼고 해도 돼?"하고 물었다. 내가 피임을 한다는 사실이 남자친구를 피임의 부담에서 자유롭게 만들어 준 듯 했다. 그러려고 약을 먹은 건 아니었는데, 스스로 피임을 시작한 순간 현실에선 오히려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우리는 예상치 못한 다툼으로 헤어졌다. 그리고 생리가 늦어졌다. 나는 또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만약 테스트기에 두 줄이 뜬다면, 헤어진 그에게 말을 해야할까?' 그런 고민은 여전히 나 혼자만의 것이었다. 다시 궁금해졌다. 중절 수술이라는 단어를 몰래 검색했다 지우고, 그 비용을 구할 수 있을지 밤새워 고민하던 그 모든 과정을 그도 겪어야 했다면, 그렇게 쉽게 "콘돔 빼도 돼?"냐는 질문을 내게 할 수 있었을지.

그러지 말았어야지 ⓒ백아연 instagram


"빼도 돼?" 고 묻기 전에
나는 함부로 섹스를 해서는 안된다거나, 여자가 몸을 소중히 해야한다거나, 남자가 여자를 책임져야 한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섹스는 즐겁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처럼 대가가 따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두 사람의 몫이어야 한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다. 당신이 콘돔을 쓰지 않겠다고 말하려면, 섹스가 끝난 뒤 딱 10분 후부터 이어질 고민을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상대를 먼저 떠올려보길 권한다.

다행히 14일 후 임신테스트기엔 한 줄이 떴다. 나는 오랜만에 편히 잠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날 밤도 누군가는 ‘가임기’며 ‘임신’같은 단어를 홀로 검색하며 잠들지 못했을 것이다. 부디, 그 누군가의 옆에는 결과를 함께 고민하고 책임질 다른 사람이 있었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런 헛소리를 교육과정에서 배우고 있잖아? 안될거야… ⓒKBS

원문 : 20's tim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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