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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이 영화로만 보이지 않는 이유

  • 입력 2015.08.18 12:04
  • 수정 2015.08.20 14:35
  • 기자명 김순종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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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은 현실에 기반한다. 최근 차트를 역주행하며 흥행몰이 중인 류승완 감독의 신작 <베테랑>도 그렇다. 영화 <베테랑>은 갖은 범죄행위를 다 저지르면서도 금력에 의해 보호받는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 분)와 한 번 꽂힌 범죄에 대해서는 끝까지 추적하는 형사 서도철(황정민 분)의 싸움을 담아낸 영화다.
<베테랑>은 <암살>에 이어, 국내작으로는 올해 두 번째로 누적 관람객 수 1000만 기록을 앞두고 있다. 이 두 영화가 흥행하는 것을 두고 평론가들은 정의가 없는 시대에 정의를 바로 세우는 내용을 담았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영화 <암살>은 친일파 청산의 문제를, <베테랑>은 갖은 범죄를 저지르고도 기득권으로 군림하는 재벌을 처단하는 형사의 얘기를 각각 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화 <베테랑>은 영화일 뿐이지만, 관객은 그 안의 이야기가 낮설지 않다. 우리가 그간 목격해온 재벌 문제가 고스란히 담겨진 까닭이다. 필자도 영화를 보는 내내 떠오른 실제 사건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영화 <베테랑> 속의 사건들과 현실 속의 사건을 비교해 보았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을 위해 영화 줄거리는 최대한 생략했다.

# 장면1
극 중 조태오는 회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화물노동자 배 씨(정웅인 분)를 사무실로 불러 폭행한다. 겨우 420만원의 체납임금을 돌려받기 위해 회사 앞에서 시위를 하며 회사 이미지에 먹칠을 하고, 조태오 자신을 피곤하게 했다는 이유다. 현실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바로 SK그룹 물류업체의 대표이던 최철원 씨의 맷값 폭행 사건이다.


이 사건은 극 중 내용과 매우 유사하다. 2010년 10월 최 씨는 회사의 인수합병을 반대하며 1인 시위를 하던 유 씨를 자신의 사무실로 부른다. 그리고 야구방망이와 주먹으로 폭행한 뒤 맷값이라며 2000만원을 건넸다. 이후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며 사회적인 파문이 일었지만 그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 사회봉사 120시간이라는 가벼운 형량을 선고받고 석방됐다. 이에 반발하여, 당시 온라인 서명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 장면 2
극 중 조태오의 거듭된 망동으로 화가 난 신진그룹 회장은 사태가 이 지경이 되기까지 무엇을 했냐며 자신의 아들이 아닌, 옆자리에 앉은 참모에게 역정을 낸다. 회장에게 야단을 맞는 참모는 전직 검찰총장이다. 검찰총장까지 역임한 사람이 왜 기업 임원이 돼 있는 것이며, 신진그룹 회장은 왜 그에게 역정을 낸 것일까?


현실에서도 재벌은 법조계 고관 출신자들을 임원으로 채용하곤 한다. 이는 기업의 위법행위가 드러날 경우 수사당국에 압력을 넣고 사건을 축소시키기 위해서라는 의혹을 받곤 했다. 그런데 한화 김승연 회장의 보복 폭행 사건에서는 실제로 이러한 움직임이 드러났다.
2007년 3월 김승연 회장은 자신의 아들이 술집에서 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경호원과 조직폭력배를 한 무리 이끌고 가해자들을 찾아갔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폭행한 가해자들을 청계산 자락의 공사장 창고로 끌고 가 보복 폭행했다. 주모자를 찾은 뒤에는 맞은 아들을 불러 "네가 맞은 만큼 때려라"며 직접 보복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남대문경찰서는 이 사건에 관한 수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남대문 경찰서장 장희곤 총경에게 당시 한화그룹의 고문으로 재직 중이던 최기문 전 경찰청장의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한화그룹 폭행사건을 수사중이냐?"며. 통화 뒤 폭행 현장에 나가 수사 중이던 남대문경찰서 수사관들은 모두 철수했다.
전화 한 통으로 묻힐 뻔한 이 사건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은 언론이었다. 4월 말 몇몇 언론들이 한화 김승연 회장의 보복 폭행 의혹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경찰과 검찰은 그제서야 수사를 시작하고, 김승연 회장은 구속 기소되었다. 하지만 그는 거물급 전관 변호사들로 꾸려진 변호인단을 이끌고 재판에 나섰다. 그 결과는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광복절 특사로 사면된다.

# 장면 3
극 중 재벌 3세 조태오는 마약 중독자다. 배다른 형제들과 지분 다툼을 벌이거나 일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때면 그는 늘 마약을 찾는다. 한국은 마약 청정국으로 불리는 나라 중 하나다. 그렇다면 영화 속의 조태오는 단순한 픽션일까? 답은 '아니오'다.
2013년 오산 공군 기지 소속 한 미군의 행낭에서 1KG에 달하는 대마가 발견됐다. 1KG에 달하는 대마. 혼자서 몰래 피우려고 들여온 것이라 보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양이었다. 인천지방검찰청은 수사에 착수했다. 이 과정에서 범현대가 3세인 정 아무개와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차남이 연루된 정황이 포착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또 한 번 금권의 힘이 작용했던 셈이다.

# 장면 4
극 중 조태오는 연예인을 대동해 파티를 여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그와 함께한 여자 연예인 중 한 명은 그와 내연관계였다. 조태오는 그녀가 임신한 뒤 난동을 피우려고 하자 강제로 마약을 주입하고 폭행했다. 재벌과 연예인의 내밀한 관계, 또 어디서 들어본 듯한 얘기다.


그런 사건 중 대표적인 것이 장자연 리스트 사건이다. 2009년 장자연 씨는 기획사 대표가 권력층의 술 시중과 성접대를 강요해 견딜 수 없다는 내용의 친필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녀의 유서에는 그에게 접대를 받은 것으로 보이는 10여 명의 명단이 있었다. 언론사 대표, 방송사 PD, 기업체 대표 등이 있었다.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었고, 경찰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41명으로 꾸려진 수사팀을 결성했다. 이들은 27곳을 압수수색하고 14만여 건의 통화내역을 조사했다. 118명의 참고인을 조사하고, 955건에 이르는 계좌 및 신용카드 사용 내역을 조회했다. 대대적인 수사를 한 셈이다. 그러나 수사 결과는 초라했다.

자연 씨의 소속사 대표인 제이슨 김만이 폭행, 협박, 횡령 및 도주 혐의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집행유예를 받아 지금도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또한 장자연 리스트에 오른 사람 중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오히려 명단에 오른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은 명예훼손 혐의로 한국방송과 문화방송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기도 했다.


# 장면 5
극 중 서도철(황정민 분)은 조태오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수사를 중지하라는 경찰 윗선의 압박을 수차례 받는다. 이에 서도철은 여론의 힘을 빌리고자, 한 기자에게 소스를 흘리며 사건을 공론화 시켜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조태오가 속한 신진그룹은 해당 언론사 데스크와 접촉해 언론사에 광고를 주는 대신 해당 사건을 기사화하지 않을 것을 요구했다.



이는 지난 2006년 6월 일어난 시사저널 파업 사태와 닮은꼴이다. 2006년 6월 15일 금창태 시사저널 사장은 삼성 측의 요청을 받은 후, 잡지에 실릴 예정이었던 삼성 관련 기사를 삭제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윤삼 편집국장 등은 편집권을 보장하라며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금 사장은 인쇄소를 직접 찾아 해당 기사를 삼성 광고로 대체했다. 일선 기자들이 이에 반발하자 금 사장은 장영희 취재팀장, 윤무영 기자, 백승기 사진부 팀장, 고재열 기자 등에게 정직 이상의 징계를 내렸다. 이 때 시사저널 기자는 24명이었는데 그 중 17명이 징계를 받았다.
그 뒤 1년간 시사저널 기자들은 편집권 독립 장치 마련을 요구하며 파업하지만 사측을 이기지 못했고, 결국 파업에 동참했던 22명이 회사를 나와 2007년 새로운 시사주간지 <시사인>을 창간하는 것으로 끝났다.


우리는 흔히 영화를 보며 '영화니까 그렇지, 말이 되냐?'는 등의 말을 한다.
하지만 <베테랑>의 경우는 이러한 말을 쉽게 쓸 수 없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정말 '말이 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베테랑>은 위의 예시가 보여주듯 철저하게 현실적이다. 이 영화에서 현실과 전혀 다른 부분이 있다면, 형사 서도철이 여러 난관을 견뎌내고 재벌 3세인 조태오의 팔에 수갑을 채운 일이다.
평론가들은, <베테랑>이 흥행하는 이유는 정의가 사라진 시대에 정의를 바로 세우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우리의 현실은 영화 속 정의 구현으로 대리만족을 취해야 할 만큼 암담하다.
우리가 영화 <베테랑> 속 재벌 3세의 안하무인적인 행동을 비현실적이라 생각하고, 말단 형사가 그를 체포하는 모습을 보며 당연한 일이라고 말하게 되는 날이 올까?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는 일전에 "정의는 천천히, 그러나 반드시 온다."는 말을 한 일이 있다. 영화 <베테랑>을 보며 그 말이 떠올랐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사회에 정의가 좀 더 빨리, 그리고 반드시 올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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